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488화


924화

이드가 본 그것은 새하얀 송곳 같았다. 길이가 팔뚝만 하고, 굵기도 그만하다는 점이 달랐지만, 앞이 뾰족하고 뒤가 뭉툭한 생김새는 완전 송곳이다.

그런 송곳 여러 개가 다섯 개 문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파파파팍!

재질은 몰라도 송곳의 속도와 회전력이 심상치 않다. 모르고 당하면 십중팔구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지원조 회피!”

이드가 급한 경고의 고함과 함께 뇌정화를 쏘아 냈다. 검극이 하얗게 번뜩이며 거기에서 갈라진 검화가 허공을 나는 송곳을 요격했다. 퍼퍼퍼펑!

십여 개의 송곳이 동시에 폭발했다. 그와 함께 반대편에서도 같은 폭음이 터졌다. 이드와 마찬가지로 일리나가 송곳을 막아 낸 것.

그러나 두 사람이 방어할 수 있는 공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뇌정화라도 시공의 한계는 넘을 수 없는 법.

퍽. 퍼퍽!

“커윽!”

둔탁한 신음과 함께 송곳에 피격당한 기사들이 쓰러졌다. 그나마 이드의 경고와 지원조로 나설 만큼 좋은 눈 덕분에 부상자는 20명이 넘지 않았다. 문제는 상처가 하나같이 중하다는 것이지만,

“부상자는 이쪽으로!”

라미아가 있는 이상 숨이 붙어 있다면 죽을 염려는 없다. 대량의 포션과 고위 클래스의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그녀는 신관 이상의 존재였으니까.

라미아의 말에 따라 기사들이 부상자를 데리고 모여들었다. 동시에 그들을 노리고 송곳이 다시 날아들었다.

까가가강!

그러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돔형의 푸른빛 파문이 일었다. 라미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실드 마법을 걸어 둔 것이다.

“누굴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하는 바보로 아나 이거나 먹으시지!”

땅에 떨어진 송곳이 덜그럭거리며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본 라미아가 양손을 펼쳐 들었다.

“써먼 엘리멘탈 블레이즈 폴!”

화르르륵-

콰르르르-

시동어와 함께 한쪽엔 거친 불기둥이, 또 반대쪽엔 거친 물기둥이 생겨나 주인에게 돌아가는 하얀 송곳을 따라 문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에 이를 막으려는 듯 문 안에서 하얀 송곳 뭉치와 함께 공격이 쏟아졌고, 두 힘이 입구에서 그대로 맞부딪쳤다.

꽈과과광!

강력한 폭발이었다. 입구에서 폭발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폭발의 압력만으로도 안구와 고막이 터지고, 피를 토하며 죽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그러나 송곳을 쏴 기사를 쓰러트린 자들이 어디 보통 사람이겠는가. 그 힘과 속도, 정확성을 보면 기본이 소드 마스터일 것이고, 그런 자들은 이런 후폭풍으로부터 내공으로 몸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

때마침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부서진 돌덩이가 비처럼 쏟아지는 문 안에서부터 마나와 함께 갈무리되지 않은 진한 살기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역시 그렇게 허술하게 죽어 주진 않네.”

하긴, 그렇게 쉽게 끝나서야 어둠을 깔아 둔 사전 준비가 아깝지. 이드가 귀찮음을 덜 좋은 기회를 놓쳐 아쉽다는 듯 말할 때였다.

콰드득!

어디서 출발 호루라기 소리라도 들린 것처럼 다섯 개의 문에서 그림자들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덩치가 큰데, 움직임이 날랬다.

이드는 그중 반이 네발을 사용하는 모습에 라이칸스로프를 떠올렸다. 꼭 메르시오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커다란 덩치에 두 발과 네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대표적인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단정하기엔 놈들의 몸에 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코 어둠에 가려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물론 맨눈보다야 시야가 깨끗하진 않다. 예를 들면 옛날 흑백 화면이나, 야간 투시경을 보는 느낌에 가깝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라이칸스로프 특유의 길고 멋진 털을 분간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없다.

“어디 단체로 브라질리언 왁싱을 하고 온 것도 아닐 테고 말이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이놈들이 라이칸스로프가 아니라는 것.

“라이칸도 아니면서 왜 네발로 달려?”

이드가 투덜거렸지만, 그에 답하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거친 숨을 뱉으며, 미리 짜 놓은 듯 셋으로 무리를 나누어 달려들 뿐이었다.


“씨벌・・・・・・ 디지는 줄 알았네. 괜히 사람 쫄리게 만들어.”

적 상관은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눈물을 찔끔거렸다. 어마어마한 폭발에 준비한 자들이 휩쓸려 죽는 것을 보며 자신도 꼼짝없이 죽었다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죽은 줄 알았던 놈들이 쌩쌩하게 달리고 있으니. 마음이 퍽 벅차올랐다. 아무렴 마탑 마법사 놈들이 공을 들인 놈들이 쉽게 죽을 리가 없는데! 그에 벅찬 마음을 담아 소리쳤다.

“이 느려 터진 잡종 굼벵이 놈들아! 모조리 죽여! 네놈들이 죽더라도 모조리 죽이라고!”

“그릉그릉. 개새끼!”

실로 상호 존중이라는 말을 똥통에 처박은 대화가 아닐 수 없다.


땅속을 헤엄치던 초인 노예들을 다루던 것과 같은 모습의 반복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6층에서 명령을 내리고 감독하던 놈들이 노예보다 강했는데, 여기 상관은 부하보다 약하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네발로 달리는 모습이나, 거친 숨소리 등으로 보아 지능적으로 문제가 있는 때문인 듯하다.

“아니, 근데 라이칸스로프도 아니면서 왜 네발로 뛰고, 으르렁거리기까지 하는 건데?”

“죽어라! 그아악!”

역시나 정상적인 답변이 돌아오진 않는다.

대신 불쾌한 날숨과 함께 맹수가 발톱으로 할퀴듯 손을 휘둘러 왔다. 그들의 손가락은 기묘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는데, 그 끝에서 초인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야수공에 가까운 제법 훌륭한 조공이라 할 만했다. 그렇다고 칭찬해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우선은 이 지독한 입 냄새부터 처리하고.”

정말이지 뭘 먹고 나왔는지 냄새가 말도 못 하게 끔찍했다. 잠시 숨을 멈춘 이드는 마각철황격으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콰아아아-

그러자 쿵, 하는 소리에 이어 이드의 발끝에서 시작된 경력이 와류가 되어 치솟아 올라, 마치 끈끈한 풀처럼 달려드는 자들의 몸을 잡아끌었다. 자연 이드를 향하던 손이 목표를 잃고 와류에 붙잡혀 옆의 동료에게로 향하자 당황하여 급히 손을 거둔다.

“몸이 끌려간다!”

“쿠와와와와!”

개중에는 몸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와류에 저항하는 놈도 있었지만, 화경의 흐름을 탄 와류는 단순히 힘만으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드가 벗어나길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일라이져가 바닥을 향했다.

팅.

검강이 바닥의 돌을 부수며 작은 소리가 났다. 동시에 붉은 검강에서 수십의 검화가 쏟아져 여전히 힘을 유지한 와류의 흐름을 탔다. 바람이 아니라 경력의 흐름을 탄 풍화다.

와류에 휘말리면 모두 중앙으로 모이듯, 흐름을 탄 검화들이 자연스럽게 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아무리 폭발의 압력을 견딘 튼튼한 몸이라도 검화를 막아 내진 못한다. 강한 바람과 바늘의 차이랄까?

그리고 이런 것은 아무리 지능에 문제가 있어도 본능이 먼저 느끼는 것인 모양이다.

“도망! 본앵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뻗자 손바닥을 뚫고 하얀 송곳이 튀어나왔다.

파파팡!

본앵커가 검화와 부딪혀 폭발하자 본앵커를 쏜 자들이 그 폭발력을 이용해 와류를 벗어나려 했다. 실로 적절하고 대담한 대처다. 지능은 떨어질지 몰라도 뛰어난 전투 센스를 가진 것 같았다.

“어딜 들어올 땐 맘대로였는지 몰라도, 나갈 땐 내 허락을 받아야지.”

그에 쉽게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이드가 흐름을 유도하던 와류의 고삐를 풀어 버렸다. 고삐 풀린 와류는 순식간에 밖으로 퍼져 나갔고, 풍화가 그 태풍 같은 흐름을 탔다. 그 속도는 통제되던 때보다 몇 배나 빨랐다.

적들이 다시 본앵커를 쏘며 대응했지만, 속도에 대처하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커윽…….”

그에 비해 풍화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정확히 급소만을 노렸다. 모두 일격필살. 와류가 사라진 순간 절반에 가까운 자들이 이드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쓰러졌다.

“크르르륵, 괴, 괴물 같은…….”

“괴물이라니. 거, 말이 심하네.”

그에 겨우 공격에서 피한 자들이 한데 모였다. 그 모습이 맹수라기보다는 무리를 만들어 몸을 부풀려 맹수를 피하려 애쓰는 초식 동물 같았다. 오히려 본능이 예리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짧은 공방에서 이드의 무서움을 빠르게 감지한 것이다. 하긴 본능이 아니라도 단 한 번의 공방에 동료의 반이 죽었으면,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그리고 이드의 검은 그들의 본능보다 한참 빠르다.

슬쩍 투덜거린 이드가 한데 모인 그들을 향해 손을 까딱이는 순간, 흩어지는 와류 속에 은밀히 숨겨 뒀던 잠영화가 유령처럼 바닥에서 떠올라 목을 찔렀다.

“사, 살려・・・・・・ 줘…….”

앞서와 같은 일격필살. 정확히 급소를 찔렀다. 그나마 감이 좋은 하나를 제외하고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남은 하나도 곧 숨이 끊어지리라.

그리고 그 사실을 이드도 알고, 적 상관도 알았다.

・비, 빌어먹을. 저게 뭐야, 저게 뭐냐고! 삼검왕이라고 해도 믿겠다. 젠장, 애초에 잡종 굼벵이들로 저런 괴물을 잡으란 게 개소리지!”

돈에 홀려 계약하고, 힘에 대한 탐욕에 가입할 땐 지금처럼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가장 큰 문제는 저 잡종 굼벵이들이 너무 쉽게 당했다는 것이다. 그게 이상해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잡종 굼벵이들은 멍청하긴 해도 결코 약하지 않다. 반대로 충분히 강했다.

저렇게 힘없이 쉽게 죽어서는 안 되는 놈들이다. 훈련 중에 자신이 그토록 기를 쓰고 죽이려 했는데도 멀쩡하던 놈들이 왜 저렇게 아무 반항도 못 하고 줄줄이 죽어 나가는 것인지.

본앵커를 포함한 각종 원소 공격기와 육체 변화 기술은 쓰지도 못했다. 피부 변형, 육체 강화로 방어도 못 했다. 방어는커녕 발악도 못 하고 멍청하게 죽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 싶어 무서웠다. 그렇다고 항복할 수는 없다. 그게 계약이니까. 지금은 그저 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을 찾아야 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손가락 길이의 작은 호각이 들려 있었다. 이걸 불면 최소한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그걸 불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지?”

“히익ᅳ”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남자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호각을 급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입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엇……?”

“딱히 특별해 보이진 않는데.”

거리를 벌렸음에도 여전히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와 함께 적의 손에 들린 호각과 이마에 닿아 따끔거리는 검.

・젠장…….”

“뭐, 욕 나올 상황이긴 하지. 그래도 욕을 하기보단 이 물건의 용도부터 말해 주면 좋겠는데. 당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드가 울상인 적 상관의 눈앞에 호각을 흔들어 보였다.

“우우…….”

적 상관이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들썩인다. 그러다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문다.

“내가 보기에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맞나?”

정확히는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아 묻자, 알아줘서 고맙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베일록에게 걸린 계약 마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초인기를 이식받을 때 뭔가 조치를 당했거나. 이런 자에게까지 계약 마법을 사용하기엔 마법이 아깝다.

“결국 쓸모없다는 말이네.”

“아니, 자, 잠깐만 제약을 풀어 주면…….”

혀를 차는 이드의 혼잣말에서 뭔가를 느꼈나 보다. 남자가 급히 말꼬리를 잡지만, 이드는 이미 돌아선 후다.

동시에 남자의 뒤통수에서 꽃잎 한 장이 팔랑, 하고 떨어졌다. 붉은 핏물과 함께.

이드는 남자가 쓰러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일리나는 이드와 마찬가지로 라이칸스로프의 흉내를 내는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라미아와 기사들 역시 부상자를 보호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우선은 일리나가 먼저 끝날 것 같다.

“그럼 그 전에 나머지를 정리해 볼까.”

이드는 방금 쓰러진 남자와 함께 나타나 자신들을 공격한 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물러서서 장내를 관망하고 있는 자들을 살폈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싸움을 걸어 놓고, 어디서 구경질인지.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