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91화
927화
물론 반대로 오히려 마탑 유치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힘을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지배자들 입장에서는 언제든 줬던 힘을 거둬들일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점을 오히려 반길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뒤져 보면 지배자가 하사한 힘을 이용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사한 힘을 마음대로 거둘 수 있다면? 그렇다면 통수 맞을 일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는 것이다. 지배자 입장에서는 이보다 마음 편할 수가 없는 일이다. 수상하다 싶으면 힘을 빼앗아 버리면 되니까.
물론 마탑이 다른 꿍꿍이를 품는다면 곤란해지겠지만, 수많은 초인을 컨트롤하는 것보다 마탑 하나를 다루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에게 초인 마탑을 컨트롤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설마 마탑에서 거기까지 내다보고 꺼내 놓은 걸까요?”
그런 목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지. 어차피 확인할 수도 없는 거고, 거기다 우리가 고민할 문제도 아니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 문제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있을까 봐 걱정하는 거죠.”
그럴 경우 문제가 제법 복잡해진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딜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도 라미아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은 몰라도 마스라면 오히려 이런 점을 더 좋아할 겁니다.”
“마스에 대해 잘 아나 봐요?”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 시절에 사귄 마스 출신의 친구가 있어서 마스인의 성향에 대해서는 나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것은 처음이다. 그에 모두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자 곧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내성적인 줄만 알았더니, 의외로 자기 의견이 있다. 거기에 책임감도 강하고, 이드는 꽤 괜찮은 사람을 알았다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록마틴 후작께 보고할 때는 딜런 경의 의견을 덧붙이도록 하지.”
“으아아~ 제발 제 이름은 빼 주십시오.”
보고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에 심장을 부여잡는 딜런이다.
그 모습에 이드와 기사들은 웃음이 터졌다. 한바탕 웃은 김에 긴장도 풀렸겠다. 모두들 다시 출발 준비를 했다. 부상자도 옮겼으니, 공략을 이어 가야 한다.
“그럼 마법을 해제할게요.”
라미아의 말에 기사들이 눈을 감았다. 어둠 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빛이 가득하다 사라지면 적응하기까지 잠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아는 라미아도 잠깐의 텀을 두고서 마법을 해제했다.
그리고 이드가 다시 앞장서 출발했을 때였다.
“그런데・・・・・・ 시신의 숫자가 줄어든 것 같지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드의 말이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신이 어딜 간다고 숫자가 준단 말인가?
하지만 서둘러 주변을 둘러본 사람들은 정말 그 말대로 시신의 숫자가 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드 말이 맞아요. 키메라 초인 시신만 사라졌어요. 그런데 옷이 남은 걸 보면 시신이 움직이거나, 누가 가져간 건 아닌 것 같아요.”
이드와 함께 가장 많은 키메라 초인을 상대한 일리나가 자신이 싸웠던 자리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군데군데 주인을 잃은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으갹! 이거 설마!”
그에 뭔가를 알아차린 라미아가 화들짝 놀라 급하게 아공간을 열며 수선을 떨었다.
“휴~ 다행이다.”
“왜? 무슨 일인데?”
이드가 궁금한 듯 물었다.
“키메라 초인들의 시신이 사라져서, 아공간에 있는 시신도 사라졌으면 어쩌나 싶어서 확인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괜찮은 것 같네요. 아직은.”
“아직은? 문제가 있긴 하다는 말이네?”
그 말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공간의 특성 때문에 진행이 느린 것 같지만, 시신이 검은 안개로 변하면서 분해되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아공간 내부의 오염은 없는 것 같지만, 여기 있던 시신도 그렇게 분해되어 사라진 것 같아요.”
이드는 그 말에 다른 인공 초인들의 시신과 달리 키메라 초인의 시신은 절대 넘기지 않겠다는 마탑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조치인지도 모른다.
키메라 초인은 말 그대로 이리저리 오려다 붙인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다. 크고 작은 흉터만 남은 인공 초인과는 달랐다. 그런 키메라 초인의 시신이 공개되어 보라.
그 순간 탑주가 그렇게 자랑하던 초인 마법은 한순간 흑마법의 아류로 전락할 수가 있다. 그러니 이런 방법으로 시신을 처리한 것이리라. 그에 누군가는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애초에 사용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아니냐고.
그러나 여기엔 마탑의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증거는 없지만, 키메라 초인을 존재를 알려 마탑이 가진 어둠을 미리 공개한 것이다. 이미 제국의 적이 된 시점에 부정적인 부분을 털어 내려 한 것.
동시에 우리와 함께하려는 나라는 이런 점을 미리 알고 뒤에 딴소리하지 말라는 경고의 뜻도 숨은 것이다.
과연 제국 토벌대를 상대로 초인 마법의 시연회를 열어 버린 마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라고 하겠다.
다만 마탑에서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재빠르게 시신을 아공간에 챙겨 둔 라미아의 행동이었다.
“그거 토벌대에 전달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공간 안에서라면 며칠은 괜찮아요. 하지만 아공간에서 꺼내는 순간 즉시 사라질 거예요.”
“쯧, 그럼 챙겨 둔 의미가 없네?”
“그런 거죠.”
아까워 혀를 차는 이드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공간을 열어 보이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꺼내봤자 그 순간 사라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그걸 멈출 마법은 있다. 동결봉인이나, 타임스톱 같은 9클래스 이상의 대마법들 말이다. 하지만 라미아의 실력을 공개할 생각이 없는 이상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일단 그대로 둬 봐. 혹시 모르니까.”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인 라미아는 시신을 아공간 안에서 따로 격리해 보관했다. 지금 상태로 봐서는 검은 안개로 인한 아공간 오염은 없을 것 같지만 만사 불여튼튼. 사소한 일이라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허탈한 사건을 뒤로하고 이드들이 다시 어둠을 가르고 나갔다.
“그래도 아쉽고, 어이없네. 이래서야 유령하고 싸운 기분이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들이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시신.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투덜거릴 수도 없다. 기사들은 딜런의 명령에 따라 다시 사방으로 눈을 번뜩였다.
이미 한번 기습을 받아 부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경계심은 최고치였다.
그러기를 10분, 20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숨 막히는 답답한 어둠만이 계속 이어졌다.
“음?”
그러던 중 선두에서 주변을 살피던 이드가 멈춰 섰다.
“전투 준비!”
동시에 떨어진 딜런의 명령에 기사들이 전투 진형을 짰다. 이드의 정지와 함께 거의 자동적으로 이뤄진 움직임이다.
이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만큼 지원조의 기사들이 이드를 믿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곧 삼조에 속한 기사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전공이나 부하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이드도 이런 마음은 참 고맙고 기쁘다.
그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앞을 살폈다.
“숲? 이라고 하긴 나무가 없고, 풀숲인가? 아니면 늪지?”
그랬다. 이드 앞에 나타난 것은 촘촘히 자리한 이름 모를 풀들이 허리까지 자라 있는 풀숲이었다.
“돌로 된 던전 한가운데 풀숲이라니. 어울리지 않네요.”
“그렇지. 대놓고 의심스럽잖아.”
10층에 있던 휴식을 위한 숲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한참 살폈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자 이드라 일리나를 찾았다.
“역시 잘 모를 땐 전문가에게 물어야지.”
“제가 전문가예요?”
“그럼요. 여기 숲과 식물에 대해서 일리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렴 숲의 종족인 엘프 앞에서 누가 식물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마치 선생님을 모시는 듯한 이드의 행동에 일리나가 풋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풀숲으로 다가갔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 역시 궁금하던 차였다. 이런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라니.
빛 없이 자랄 수 있는 식물은 극히 희귀해서, 그녀도 들어 보기만 했을 뿐이다. 정말 그런 식물이라면 그녀도 관심이 있었다.
유심히 풀잎을 살피는 일리나 옆에는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해 이드가 꼭 붙어 섰다.
그렇게 조용히 시간이 흐르는 중이었다.
샤르르르륵.
어디서 불어 온 것인지 미약한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며 사각거리는 화이트 노이즈를 발생시켰다. 누가 들어도 그저 흘려 넘길 만큼 대수롭지 않은 소리.
샤륵. 샤륵.
하지만 이드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옆에 일리나가 다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어서 잘 들렸는지도 모른다.
“잠깐만요. 일리나.”
갑자기 이마 앞쪽을 막는 이드의 손길에 쪼그려 앉아 있던 일리나가 이드를 올려다본다. 그 모습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웠지만, 아쉽게도 이드의 눈길은 앞을 향해 있었다. 이드가 손을 뻗어 풀숲을 쓸었다. 손과 풀잎이 스치며 샤르르륵거리던 찰나였다.
사가각!
풀잎의 생기 사이로 차가운 금속의 냉기가 이드의 손을 베었다. 아니, 베려고 하다 잡혔다.
이미 어중간한 예리함으로는 상처도 내기 힘든 손이다. 풀숲에 숨은 얇은 칼날에 베이기에 이드의 피부는 너무 튼튼했다.
이드는 움켜쥔 칼날을 그대로 뽑아 들었다.
기이이익-
그러자 풀이 마치 만드라고라처럼 기이한 소리를 내며 금방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시퍼런 면도날처럼 금속 같은 날카로움을 보이던 풀잎도 금방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허, 과연 정상적인 풀숲은 아니네. 일리나, 더 볼 것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확인이 끝났어요.”
“뭐,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지만, 어때요?”
“제가 짐작하던 희귀 식물들은 아니에요. 전부 일반 숲에서 볼 수 있는 식물인데, 이상하게 변형되어 있어요. 단순히 어둠을 견딜 뿐 아니라 독을 품고 있어요.”
“독이라. 태워 버릴 걸 예상하고 준비한 것 같네요.”
의심스러운 숲이 나타났을 때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이 바로 태워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풀잎이 모두 독을 품고 있다면?
타오르는 순간 바로 이 주변에 독연이 가득 차올라 기사들을 중독시킬 것이다.
누가 풀을 태운 연기에 독이 실려 올 걸 생각할까?
거기에 보지 않아도, 맹독일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그런데 이런 식물을 조종하는 초인기도 있나 보네요.”
던전에서 토벌대를 공격하는 모든 것은 초인 마법, 그리고 초인기와 연결되어 있다.
당연하다. 던전이 곧 초인 마법의 시연장이니까.
그렇게 따지면 이 풀숲도 초인기와 연관된 것이 분명하다.
“안타깝네요. 숲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이런 곳에 쓴다니.”
슬픈 얼굴로 한숨을 쉬는 일리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