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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99화


935화

일리나 앞에서 흔들리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몰래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모이엔은 혼자서도 충분히 일을 벌일 능력도 있고, 생각도 있지만 존 워스가 나타난 이상 주도권은 그에게 있으니까.

거기에 이번에 이 조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긴급을 대비한 지원조다. 당연 그중에는 모이엔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사람도 함께하고 있다. 그들의 눈을 피해 일을 벌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은 일을 벌일 타이밍이 아니지.”

세 개의 문.

갑자기 나타난 변수. 이드는 이 변수가 모이엔의 숨겨진 계획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조씩 차례대로 공략에 나서는 기존의 방법대로라면 초인들과 적색 기사단이 함께한 오 조를 도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짜잔, 하고 기존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는 변수가 나타났다. 너무도 절묘하게 말이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그럴 수 있다. 모이엔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문이 세 개가 아니라 열 개의 문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하고, 기묘하며 혼란이 가득한 곳이 세상이 알고 있는 던전이니까.

다만 이드처럼 토벌대 안에 숨어 다른 꿍꿍이를 품은 모이엔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세 개의 문이 그냥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이엔과 마탑이 미리 등장할 때를 정해 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심하고 보면 자연 보이게 된다. 문 안에 한가득 들어찬 의심스러운 점들이 말이다.

그런 수상한 점을 모으면 자연스럽게 모이엔과 마탑, 그리고 존 워스의 노림수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저 짐작일 뿐이지만 가능성 높은 추리들. 그에 따르면 모이엔이 오 조를 공격하는 시점이 지금은 아니다. 세 개의 문. 그 안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알려지고, 그에 따라 토벌대의 질서가 흔들리는 때, 바로 그 시점에 놈들이 움직일 것이다.

이드들은 그렇게 판단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확신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 세 개의 문 안에서 모이엔과 존 워스가 움직일 거라는 점.

그 외의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꾸준히 감시도 계속하고 있다. 다만 이번에 이드가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록마틴 후작이 이 조에 추가로 투입한 개인 전력 때문이다.

오로지 록마틴 후작에 충성하는 그들이라면 충분히 이드를 대신한 눈이 되어 줄 테니까.

때마침 오 조의 꽁무니를 쫓아 이 조가 던전에 진입하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군침을 질질 흘리는 늑대 같아 보여 헛웃음을 흘린 이드가 일리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은 토벌대도 조용하니, 느긋하게 산책이나 할까요?”

“라미아는요?”

이드는 아침 일찍 쳐들어온 마법사들에 둘러싸여 끌려간 라미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드가 보는 데도 라미아의 옷을 죽어라고 붙잡고 늘어진 마법사들이다.

그 기세를 생각하면 산책은 둘째 치고 오늘 안에 막사로 돌아올 수나 있을까 싶다. 모르긴 몰라도 실시간으로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여 그녀가 만들어 둔 스타 로드에 대한 설명과 아티팩트에 대한 해석을 해 주느라 갈려 나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마음 아픈 사실은 그에 이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저녁에 데리러 가 볼까?’

명예 후작이 아내를 찾아 돌아가겠다는데, 막는 마법사들은 없을 테니까. 뭐, 장담할 수는 없지만.

“라미아는 바쁘니까 다음으로 미루죠. 10년간 적립해 둔 것도 있으니까요. 이번엔 일리나와 적립해 두려고요.”

물론 말과 달리 라미아에게 따로 알려 두는 것도 잊지 않는 이드다. 라미아가 토라지진 않겠지만, 자신은 열심히 일하는 중인데, 다른 쪽에선 느긋하게 놀고 있었다고 하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테니까.

“좋아요.”

거부할 이유가 없는 일리나가 곱게 웃으며 이드의 팔짱을 낄 때였다.

“소검후님!”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힘차게 달려왔다. 그녀들의 뒤로는 스폴이 따라오고 있었다. 쉴라와 은색 기사단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특히 일 조에 속해 있던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쉴라의 명령에 의해 남겨졌다. 갑자기 등장한 변수에 아직 경험이 모자란 두 사람을 남긴 것이다. 당연히 두 사람은 반대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두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닌, 동료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말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경험을 메꿀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이를 악무는 것 외에는 말이다.

배웅을 마치고 당장 일리나를 찾아 달려온 것도 이런 마음 때문이다.

“대련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앞으로는 지금처럼 남겨지고 싶지 않습니다.”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숨도 고르지 않고 말했다. 일리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평소라면 팔짱을 끼고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에 알아서 피하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 모습에 이드는 내심 입맛을 다셨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쉴라와 함께 두 사람을 가르쳤던 일리나다. 그녀는 짧지만 제자였던, 그리고 지금도 제자나 마찬가지인 두 사람의 열의를 무시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네요. 산책은 다음에 해요.”

“고마워요.”

쪽.

그래서 먼저 말했더니,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 돌아서는 일리나다.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뒤늦게 상황을 알고는 어어거렸지만, 이미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수련장으로 향하고 있는 일리나에 끌려갈 뿐이었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죄송해요. 마스터~~~어!”

긴 사과를 남겨 두고 말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떠나고 스폴이 다가왔다.

“우후후, 열정적인 두 기사에 부인을 뺏겨 외로우시겠군요. 단장님.”

우후후 웃으며 다가와 장난을 거는 스폴이다.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다지만, 이드는 명예 후작의 작위를 받은 이후 장난은커녕 조심에 조심을 더하는데 말이다.

사람이 참 한결같다고 해야 할까? 어째 사고치고 그 벌로 저택에 와서 수련생을 가르치던 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런 점이 싫은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자신을 어려워하는 사람보다 스폴처럼 감정에 솔직하고 소박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이드가 스폴을 깔아 보며 말했다.

“하하하. 우리 부단장님은 아직 어리시군요.”

“욱! 저 나이 먹을 만큼 먹었거든요.”

“그럼 정신 연령이 어리신가? 그렇지 않고서야 자식 같은 제자들을 돌보는 일에 일리나를 뺏긴다느니, 외롭다느니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신 연령 미성숙한 부단장님?”

“칫, 이제 받아치는 게 능숙하셔서 재미없네요.”

이드는 항복을 의미하는 스폴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 웃었다.

그에 스폴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는 멀어지는 세 사람을 바라보더니, 툭 하고 감사의 말을 건네왔다.

“두 녀석 다 위험하다고 남겨져서 침울해 있었는데. 두 분처럼 의지할 곳이 있어서 기운을 잃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필요 없어. 말했잖아. 두 사람은 우리 제자라고.”

“그렇지요. 생각해 보면 제 제자이기도 하네요.”

저택에서 케마란, 네리베르와 함께 수련생을 가르쳤던 때를 떠올린 스폴의 말이었다. 그러다 스폴이 갑자기 생각난 듯 손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참, 제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배웅을 나갔다가 빅터 수련생을 만났어요. 이젠 전 수련생이지만.”

“빅터가 누군데?”

“……뭐, 확실히 중요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 왜, 수업권을 팔아먹은 수련생 있잖아요.”

그 말에 이드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수업권을 팔아먹었다는 말에 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잊겠는가. 수업권을 팔다니. 어지간히 어이없는 일이어야 잊어 먹지. 그 사건은 이드뿐 아니라 소드 팰러스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사건일 것이 분명하다.

빅터라는 터무니없는 바보의 이름과 함께.

“그런데 그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설마, 누가 기사로 임명했나?”

“그런 사건을 저지른 인간을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기사로 쓰겠어요? 병사로 자원해서 따라왔나 봐요. 이번 토벌에 참가할 병사를 모집할 때 지원한 거겠죠.”

그 말에 이드의 고개가 갸웃했다.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로 왔다고? 내 기억엔 그 수련생, 귀족 출신이었던 것 같은데?”

기사를 목표로 하던 귀족 가문 자제가 평민들이나 지원할 병사로 지원해서 따라왔다니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 것이다.

거기에 이드가 기억하고 있는 빅터는 귀족으로서 우월감에 빠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간이 평민들 사이에 섞여 병사로 지원했다니 놀랄 일이 아닌가.

“뭐, 그만큼 급했던 거죠. 수련생 신분을 박탈당하고, 소드 팰러스에서 쫓겨났으니, 절망적이었겠죠. 그런 사고를 쳤으니, 가문으로 돌아가도

쫓겨날 가능성도 높고, 어떻게든 용서를 받고 다시 수련생의 신분을 회복하고 싶었나 봐요.”

“대충 알겠네. 병사로 따라오면 언젠간 날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거로군.”

“정확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말에 이드가 혀를 찼다.

도대체 사고 회로가 얼마나 단순한 것일까. 생각이 짧다 짧다 해도 이렇게 짧을 수가 있는 것인가?

도대체 말단 병사가 제국의 명예 후작을 만나는 일이 쉽다고 생각한 것일까.

거기에 엄청난 기사의 수를 보면 알 수 있듯, 토벌대의 중심은 기사들이다. 병사들은 그저 허드렛일을 위해 모집한 것일 뿐이다. 하는 일은 물론이고, 활동 공간 자체가 나뉘어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우연히라도 마주치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건 토벌대 구성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귀족으로서 교육을 받고,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생으로 있었으면서도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내보내길 잘했네. 아무리 가르쳐 봤자 제대로 된 기사가 될 인간은 아니었네.”

“그렇죠. 그런 멍청이가 기사가 되어 봤자 그 밑에서 죽어 나갈 병사들만 불쌍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그 멍청이가 뭐래?”

“단장님을 만나게 해 달래요. 용서를 빌고 싶다고. 자신은 억울하다고. 쫓겨날 때 했던 말을 그대로 하던데요.”

그에 이드가 혀를 찼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는지. 아직도 자신이 쫓겨난 것이 수업권을 판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의 행동과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다 스폴을 봤다. 사람이 없다고 자신에게 농담을 걸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빅터의 말에 오냐,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용서받고 싶다면 사무엘 백작부터 설득한 후에 오라고 했죠.”

말과 함께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스폴의 모습에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지옥으로 등을 떠밀었네. 살아 돌아올 수 있으려나?”

사무엘 백작을 만날 수 있냐는 둘째다.

백이면 백, 속으로 사무엘 백작을 원망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수업권 판매에 대해 사무엘 백작을 의심하는 마음이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과연 그 빅터가 침착하게 백작을 설득할 수 있을까?

뭐, 갑자기 깊은 지혜를 각성해서 감정과 생각을 다스렸다고 하자.

이번엔 사무엘 백작이 문제다. 그의 성격상 자신이 이용해 먹은 멍청이가 눈앞에 알짱거리면 손을 쓸 것이 분명하다.

마침 환경도 딱 적당하지 않은가. 토벌이 한창인 전장. 일반 병사 하나 사라진다고 신경 쓸 사람이 없는 곳인 것이다.

“쓰레기는 쓰레기가 정리하게 하는 것이 가장 깔끔하죠.”

인정사정없이 냉혹한 말. 스폴은 이런 사정을 알고서 일부러 빅터에게 사무엘 백작을 언급한 것이다.

병사로 토벌대에 참가해 세상 속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빅터는 곧 사무엘 백작을 통해 약육강식의 처절한 법칙을 알게 되리라.

“뭐, 혹시나 운 좋게 살아나면 세상 보는 눈이 좀 생기려나.”

스폴의 방식에 반대할 생각이 전혀 없는 이드는 다시 볼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빅터의 명복을 미리 빌어 주었다.

“그보다 산책하실 생각이면 그 파트너로 저는 어떤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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