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0화
487화
당연하게도 연락관은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자작의 호출을 받은 자가 다른 일 때문에 내일 오겠다니,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치도곤을 당해도 할 말이 없고, 자작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면 단칼에 목을 잘랐을 정도로 무례한 짓이다.
연락관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도 거칠어졌다. 연락관이라는 한직이기는 하지만 그도 관직에 있는 자였다. 평소 평민들이 말도 붙이지 못하게 하던 콧대 높은 관리였다. 그나마 이번엔 상대가 자작의 호출을 받았고, 말로만 들었던 엘프가 함께 있어 조심하고 말을 높였던 것이다. 엘프가 함께하는 만큼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였다. 솔직히 아름다운 엘프의 모습에 계속 눈이 돌아가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아름다운 엘프의 모습보다는 자작의 명령이 중요했다.
“당장 따라오지 못해!”
“쭛!”
이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 나름대로 생각해서 돌려 말을 했는데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펄펄 뛰는 연락관에게 에단이 붙었다. 웃는 얼굴에 손을 살살 비벼 가며 연락관의 옆에 껌처럼 붙어 섰다.
“아니, 그렇게 화만 내지 마십시오, 어르신, 선물입니다. 자작께서 선물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지시면 어르신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
저희가 자작님의 선물만 챙기겠습니까. 잠깐 이리로.”
“이, 이놈들이 감히 날 어떻게 보고.”
“자자, 그러지 말고 잠시만 이리로 와 보십시오.”
짐짓 화를 내는 연락관이었지만, 에단이 한 팔을 잡고 몸을 밀어 대자 어어 하며 힘없이 좁은 골목의 그림자까지 밀려갔다. 그 안에서 에단이 그의 귀에다 열심히 뭐라고 속삭이며 품에서 꺼낸 주머니를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허, 잘하네.”
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런 경험이 많은 것 같아 보이네요.”
[뭐, 저런 재주라도 있어야 먹고살죠. 그러고 보면 이드는 이런 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다고요. 저 연락관에게 말한 것도 그렇고요.]
그사이 곁으로 다가온 일리나와 라미아가 말했다.
“하하하. 그렇게나 안 어울렸어?”
“네, 정말 어색해 보였어요. 그런데 이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어색하게 웃는 이드에게 확인 사살을 해 준 일리나가 이드의 귓가에 조용히 물었다.
“저기, 에단이 오면 같이 말할게요.”
이드는 손을 들어 에단을 가리켰다. 그는 그 짧은 시간에 연락관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결국 그를 돌려보내고 혼자 돌아왔다.
“일단 제가 가진 돈을 써서 돌려보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다가와서 하는 첫마디가 저거다. 문득 돈이 아까운가 싶은 생각이 들어, 이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했다. 나중에 수고비는 충분히 챙겨 줄게. 그리고 일단 움직이면서 이야기하자.”
이드는 여관이 아니라 용병거리 쪽으로 길을 잡았다. 거짓말이라도 볼일이 있다고 했는데 다시 여관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연락관을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다시 영주성으로 호출하기 위해서 사람이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천천히 걸으면서 가까이 선 두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좀 전에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영주성에 가면 죽는다고 말하더라고. 자칭 파이온이라는 굴뚝의 요정이 말이야.”
“엑? 굴뚝 요정이요? 그게 뭡니까?”
“굴뚝 요정 파이온. 일리나와 라미아는 아는 것 같은데, 모르겠어?”
이드의 말에 에단이 난감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글쎄요. 제가 동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거 꼭 알아야 하나요?”
“알아야 하는 건 아닌데…….”
[쯔쯔쯔. 이런 기억력으로 어떻게 트와이스 같은 곳에서 일했나 모르겠네요.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세 까먹어요. 아까 당신 대장이 이야기해줬잖아요.]
라미아는 바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핀잔을 주더니, 에단의 귓가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말을 더했다.
[산적 이름이 파이온이라고요.]
“아!”
순간 에단의 입에서 바보가 도 트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라미아가 재빠르게 한마디를 더했다.
[설마 바보처럼, 큰 소리로 파이온의 이름을 부르려는 건 아니겠죠?]
“그…………… 그런 바보가 어디 있냐? 크흠.”
목을 움츠리며 대답하는 모습이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에단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다 라미아는 일리나에게로 날아갔다.
“허험. 그런데 그 요정은 왜 저희가 죽을 거랍니까? 또 그걸 왜 알려 주는 거랍니까? 저희하고는 별로 좋은 감정도 없을 텐데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래도 곧 알 수는 있겠지. 적당한 곳에 가면 말이야.”
이드의 말에 에단이 그들이 향하고 있는 앞을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혹시 그 적당한 곳이 대장 숙소입니까?”
“하하하. 당연히 거기지. 거기 빼면 우리가 여기 아는 곳이 어디 있다고.”
·즐거워 보이십니다, 마스터?”
“나쁠 건 없잖아. 굴뚝 요정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곧 이 하이탈에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이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말대로 파이온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작과는 절대 좋게 지낼 수 없으니 하이탈에서 탈출하게 될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소드 팰러스와의 연줄을 통해서 하이탈을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드, 왜 하필 굴뚝 요정인가요?”
일리나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물었다.
이드는 슬쩍 반대편 건물의 옥상을 눈짓해 보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굴뚝 안에 살고 있으니까 굴뚝 요정인 거죠.”
집사는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돌아온 연락관의 말에 의하면 여관에 남은 자는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고 합니다. 남아 있던 자가 말하길 자신의 일행들이 늦은 밤이나 되어야 돌아올 것이라고 했답니다. 해서 영주님의 명령을 그에게 전하니, 지금 당장 영주님을 찾아뵙지 못하는 것을 사죄하고 돌아온 일행들과 함께 내일 영주님을 배알하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후훗, 뒤쪽은?”
이 멍청한 것들은 어째서 하이탈의 지배자 앞에서 하이탈에서 일어나는 일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집사는 건조하게 웃는 자작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뒤따른 자의 보고로는 급한 일이 있어 내일 찾겠다고 말하고, 연락관에게 돈을 쥐여 주며 적당한 핑계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후 용병거리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용병거리라.”
“불러들일까요?”
“그대로 두어라.”
하이탈 자작은 집사의 말에 그리 대답하고 버릇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놈에 대한 소식은?”
“송구합니다. 아직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아무 성과도 없는 상황에 집사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하이탈 자작은 당연하다는 듯 크게 상관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럴 것이다. 상대는 일반인이 아니라 초인이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그렇게 쉽게 찾거나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탈출하지 못하게 막고, 철저히 수색하도록 해.”
“예. 다시 한 번 더 주의를 주고, 연락관도 처리를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도록.”
하이탈 자작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집사를 내보내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는 땅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소유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겼다. 그것이 즐거운 그의 취미였다. 하지만 지금 그 소유물 안에 이물질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잘 알고 있는 상대지만, 다른 무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무서운 선배가 어째서 그들을 찾는지도 궁금했다. 아니, 솔직히 그 이유 자체는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오로지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먹거리가 가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힘들겠다 싶었다. 감히 주인에게 이빨을 보인 똥개도 그렇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 사이에도 초인이 끼어 있다. 기사들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초인은 보통 인간과 달랐다. 초인은 특별했다.
“바로 나처럼 말이지.”
자부심 가득한 하이탈 자작의 말에 따라 그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역시 내가 먹을 건 내 손으로 잡아야겠지.”
하이탈 자작은 뭔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허리를 숙이자 말했다.
“지하 감옥으로 간다.”
“모시겠습니다.”
지하 감옥 앞에는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하이탈 자작은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금한 뒤 집사를 남겨두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지하 감옥에는 좁은 복도를 중심으로 열 개의 방이 있었는데, 모두 철문이 열려 있고 안은 비어 있었다. 하이탈 자작은 그곳을 지나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다른 방과 다르게 통짜 철로 만들어져 안을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는 철문이 있었다.
하이탈 자작은 품에서 붉은 녹이 가득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했던 복도와는 다르게 방 안은 대낮의 야외만큼이나 밝았다. 하이탈 자작은 방의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 생각은 잘 하고 있느냐?”
“무, 물론입니다, 자작님. 물론입니다!”
하이탈 자작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이드가 익히 알고 있는 두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바로 하이탈로 오며 만났던 산적, 티티와 벤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방의 벽과 중앙에 매달려 있었다. 그중 대답을 한 것은 벽에 매달린 티티였다.
그는 벽에 붙어 있는 수갑에 양팔과 양다리가 결박당해 있었는데, 옷은 걸레보다 못하게 변해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논두렁처럼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특히 하루 만에 푹 꺼진 두 눈에는 한가득 두려움을 담고 하이탈 자작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에 감히 얼굴을 마주 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이탈 자작은 그런 티티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 방의 중앙에 네 개의 쇠사슬로 사지가 묶여 매달린 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벤의 모습은 참혹했다. 전신이 성한 곳 없이 부서져 있고,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피칠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해괴한 것은 이틀 전만 해도 근육질의 거체를 자랑하던 벤의 몸이 뼈와 가죽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런 벤의 호흡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늘었고, 의식도 없는 듯했다. 하이탈 자작은 그 또한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고, 마치 먹음직스러운 천하진미를 바라보는 것처럼 연신 군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하하하. 잘 숙성되었구나.”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있던 티티는 오금이 저리고 다리에 힘이 빠져 찔끔 실례를 하고 말았다.
‘미, 미친 악마 새끼! 또라이 변태 새끼!’
그들은 지금까지 자작의 의뢰를 받고 산적질을 하면서 초인을 만나게 되면 그 정보를 자작에게 넘겨 왔다. 그리고 혹시 세 명이서 제압한 초인이 있다면 많은 돈을 받고 그를 팔아넘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도대체 이들로 뭘 하나 싶어서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런 이상한 짓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자작의 섭외에 절대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떠냐. 맛있어 보이지 않느냐?”
“예, 예옛, 아무렴요. 당연합니다. 그럼요.”
딴생각을 하던 티티는 갑작스러운 하이탈 자작의 물음에 뻣뻣이 굳어서는 입만 본능적으로 놀려 댔다.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티티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이탈 자작의 입가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하. 좋아, 좋아. 그럼 먹고 힘내서 다른 사냥감도 잡으러 가 보자!”
한바탕 웃어 보인 하이탈 자작이 방의 벽에 설치된 작은 장치를 건드렸다. 그러자 벤의 아래위로 새하얀 백색의 복잡한 마법진이 나타나며 벤을 그 안에 가두었다.
푹!
무언가 준비가 된 듯하자 하이탈 자작의 손에서 태어난 손가락만 한 뱀이 화살처럼 날아 벤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 심장에 똬리를 틀었다.
“컥!”
그 고통에 정신을 잃은 벤의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하이탈 자작은 뱀이 확실히 자리를 잡도록 잠시 기다렸다가 뱀이 완전히 자리를 잡자 어느새 뽑아든 검에 붉은 초인기를 두르고 휘둘렀다. 다음 순간 벤의 머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붉은 선이 생겨나며 그의 몸이 순식간에 바짝 마른 흙덩이처럼 변하더니, 양쪽으로 쪼개지고 부서져 내리며 순식간에 하얀 가루가 되어 바닥에 쌓였다. 그것은 십여 초도 안 되는 극히 짧은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이탈 자작은 바닥에 쌓인 하얀 가루를 손으로 뒤적거리더니 너무나 진해서 얼핏 검은색으로도 보이는 푸른 구슬을 찾아 들었다. 그러고는 손과 구슬에 묻은 벤의 흔적을 씻지도 않고 입에 넣어 꿀꺽 삼켜 버렸다.
“흐으음. 좋구나.”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간 구슬인데도, 하이탈 자작은 그 맛에 취한 듯 한동안 눈을 감고 그렇게 서 있었다.
따닥………… 다닥… 닥……..
‘떠, 떠그럴. 주, 죽기・・・・・・ 싫어…… 살려 줘.’
티티는 두려움에 저절로 떨리는 이빨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입술을 물어 죽이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숙성시킨다, 맛있어 보인다, 자작이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정말 저렇게 죽이고, 그 안에 든 무언가를 먹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티티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구원을 바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런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흐흐흐. 이봐, 너. 이쁜 엘프를 끌고 다니는데. 잠깐만 우리한테 좀 빌려 주지 않겠어?”
“어, 난 잠깐으로는 안 되는데? 크헤헤헤.”
“그러게. 저 새끼는 히끅………… 잠깐으로 해결되나 보다, 히끅. 으흐흐흐.”
이드와 일리나는 두 번째, 에단은 세 번째로 용병거리를 찾아와 황당한 경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불콰하게 술이 오른 얼굴의 용병과 그렇지 않은 용병들이 모여 세 사람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들은 마치 산적이나 강도처럼 각자의 무기를 번뜩이며 징그러운 눈으로 일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등신들은 또 뭐야!”
순간 솟아오르는 화에 이드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