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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06화


942화

비스듬히 앉아 한쪽 팔을 턱 올린 모습이 마치 빚 독촉을 하러 온 업자 같다.

그래서인지 탑주는 뻐근해져 오는 뒷덜미를 주무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나마 귀족의 위엄이라고는 티끌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10층에서 아주 찐하게 경험했기 때문인지, 곧 신색을 회복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명예 후작의 지금 이런 태도는 원래 그런 것이오.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이오?”

즉, 싸우는 사이라고 해도 자신은 고위 마법사이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해 달라는 말이다. 제법 심각한 표정을 한 탑주의 말. 투정에 가까운 말에 라미아와 눈을 마주친 이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밀도 아니니 말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알고 싶으시오?”

이드의 말에 탑주의 눈이 흔들렸다. 원래 성격이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일부러 그런다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궁금해서 물었지만, 알아 봤자 득 될 것은 없고, 속만 탈 것 같다는 결론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 ・그냥 넘어갑시다.”

“현명한 선택이오. 그럼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되오? 거래 준비 말이오.”

“물론이오. 조건을 채우기 전엔 만나지 않겠다 하지 않았소. 협상도 없다 못 박았고.”

“그게 바로 을이 거래하는 방법이오.”

폭압적인 거래 방식에 대해 은근히 비꼬는 탑주에 이드가 짧게 답했다.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간절함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을일 수밖에 없는 상황. 갑을 놀이의 첫째 조건은 누구에게 힘이 있느냐지만, 그 못지않은 것이 누가 더 간절한가 하는 것이니 말이다.

괜히 말을 꺼냈다 본전도 찾지 못한 탑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차르르르륵.

따악, 소리가 나자 정자의 한쪽 벽이 사라지고, 번쩍이는 금괴와 손가락 두 개 크기로 가공된 희귀 금속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래 대가로 준비한 금과 미스릴, 오리하르콘이오. 양은 이전 조율한 대로요.”

탑주는 말을 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깊은 마법의 진리에 빠져 물질적인 것에는 크게 마음을 주지 않는 그에게도 이번 지출은 뼈아픈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 양으로만 따져도 이 정도면 자작 작위와 영지를 사고, 그 자리에 작은 성을 올리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특히 귀금속의 경우 아티팩트 제작과 마법 촉매로도 많이 사용되기에 특히나 아까웠다.

토벌이 아니라 급히 긁어모은 이 자금 때문이라도 정신의 관을 잠시 닫아야 할 판이니, 정말이지 바이트 타블렛이 걸린 일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래다.

힐끗.

하지만 이드에게는 곁눈질 한 번으로 끝나는 문제기도 했다.

“적당해 보이는구려.”

짧은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이드의 반응을 기대하던 탑주는 내심 한탄을 했다.

어떻게 긁어모은 것인데, 저렇게 가벼운 반응이라니. 저 정도의 보물을 보았다면 조금이라도 흔들려야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이럴 것 같기는 했지, 그래도 바이트 타블렛의 가치를 철저히 따지는 모습에 혹시나 했건만…….’

보물로 이드를 흔들어 보려던 탑주가 크게 아쉬워했다.

이드는 입맛을 다시는 탑주의 모습에 고소를 지었다. 그가 기습적으로 보물을 쏟아 낸 의도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사실 속세와 인연을 끊은 도사나 스님도 아닌데, 이드라고 왜 보물에 관심이 없을까. 다다익선의 최상위 존재가 바로 돈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 다다익선에도 정도라는 것이 있다. 지금 아공간에 쌓여 있는 보물의 양이 얼마던가. 신안을 가진 이드로도 한 번에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다.

아무리 다다익선이라도 아공간에 있는 보물이 얼마인데, 고작 이런 푼돈에 눈이 갈까.

물론 탑주가 꺼낸 보물이, 아니 정확히는 라미아가 뜯어낸 보물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글쎄? 아공간에 든 같은 종류의 보물과 비교했을 때 백분의 일 정도는 될까?

그러니 이드에겐 충분히 푼돈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이드가 진짜 바라는 것은 따로 있기도 하고,

“그래도 정확한 것이 좋으니, 확인은 해 봐야겠죠?”

그렇다고 허술하게 넘어갈 생각은 없다. 말과 함께 라미아가 마법으로 보물의 무게를 체크했다.

상대를 앞에 두고 돈을 세는 것은 무례지만 세관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나선 라미아에 탑주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어쩐지 나섰다가는 더 뜯어 먹힐 것 같아서 무서웠기 때문이다.

“금, 미스릴, 오리하르콘 모두 정량이네요. 역시 탑주님도 마법사라 그런지 수치에서는 0.1의 차이도 없으시군요.”

대단하다 칭찬하는 말인데도 전혀 기쁘지 않은 탑주다.

“후작 부인이야말로 그 칼 같은 성격이 참으로 대단하시오. 다시 한번 입탑을 권하고 싶지만…….”

“거절합니다.”

“휴~ 어쩔 수 없구려.”

미련을 떨치지 못한 탑주. 그가 이번엔 원통을 꺼내 들었다. 편지를 넣을 만한 작은 원통이다.

“이건 두 번째 거래 조건인 검후가 있는 위치를 표시한 지도요.”

드디어!

보이지 않게 불끈 주먹을 쥐는 이드다. 검후를 찾기 위해 시온 숲을 나온 이후 이제야 겨우 검후의 정확한 위치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크게 기지개를 켜며, 끝났다! 하고 외치고 싶었다. 거기에 이 소식을 들으면 은색 기사단과 황녀를 포함해 검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말로 하면 될 것을 지도까지 준비해 주다니. 보기보다 친절하시구려.”

그러나 이런 마음과 달리 원통을 향해 곧장 손을 내밀지는 않는 이드다. 검후의 행방이 궁금하지만 지금은 급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거래는 더 간절하고, 급한 사람이 을이 된다.

그리고 아직 거래 진행 중에 있다. 그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다. 이드는 손을 앞으로 내미는 대신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말했다.

“그런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검후의 행방과 실종 당시의 상황, 그리고 메르시오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 이드다. 그러나 탑주의 말 속에 있는 것은 검후의 행방뿐이다. 빨리 나머지도 내놓으라는 듯 독촉하는 이드에 탑주가 고개를 저었다.

바이트 타블렛을 빼앗겨 이드에게 끌려다니고는 있지만, 그는 결코 쉬운 인물이 아니다. 그런 말랑한 인간이었다면, 미완의 마탑을 만들지도, 토벌대를 상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물론 준비되어 있소. 하지만 그 전에 나도 바이트 타블렛을 확인하고 싶소만?”

그 말에 이드가 라미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나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쿠루루루~

그러자 이드와 라미아의 등 뒤 공간이 갈라지고, 그곳에서 바이트 타블렛이 굴러 나왔다. 다만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색색의 마법진이 마치 쇠사슬처럼 바이트 타블렛을 칭칭 감고 있었다.

허락 없이는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고 시위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 상태로 라미아가 손가락을 돌리자 바이트 타블렛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원하시는 바이트 타블렛이에요. 보시다시피 진품이고요. 부서진 곳은 없어요.”

“아, 확인했소. 진품이 확실하구려.”

아련한 눈으로 바이트 타블렛을 바라보던 탑주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마법진에 묶여 있지만, 자신의 피와 땀의 결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 그의 심정은 잃어버렸던 자식을 찾은 부모의 심정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만큼 마음의 격동이 크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냉철한 마법사의 뇌는 빠르게 상황을 계산 중이다.

과연 저 봉인을 뚫고 바이트 타블렛을 당장 회수할 수 있을까? 혹은, 이드와 라미아를 공격하고 틈을 타 바이트 타블렛을 회수할 수 있을까?

그 가능성과 실패 했을 경우의 대가는?

순식간에 10가지의 가상 시나리오가 탑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나머지 조건에 대해서는 직접 구술하도록 하겠소. 어떤 정보부터 듣고 싶소?”

“후후, 강제로 빼앗을 생각은 포기하셨나 봅니다?”

이드는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없어도, 찰나 간 흔들리는 마나의 흐름은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흔들림은 어떤 의미로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이드의 말에 탑주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바이트 타블렛을 걸고 위험한 도박은 할 수 없으니 말이오.”

“생각할수록 생명의 관에서 바이트 타블렛을 획득한 것은 최고의 행운이다 싶군요.”

“나에게는 최고의 불행이고 말이오. 검후 실종 당시의 상황에 대해 먼저 말하면 되겠소?”

“좋습니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탑주가 긴 숨을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의 이야기는 짧고 간결했다. 자질구레한 설명은 없었다.

의도적으로 자세한 설명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건 무언가를 숨긴다기보다는, 스스로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다수의 힘으로 검후를 제압한 사실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리 준비했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연락이고 계획이었다.

즉흥적인 충동에 의해 움직였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마탑의 이익을 따지는 일에는 한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탑주는 소드 팰러스, 삼검왕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바로 소드 팰러스에서 검후를 지우는 일에 말이다.

탑주도 삼검왕이 어떤 방법으로 검후가 숨어 있는 숲을 알아냈는지 알지 못했다.

계획의 주는 삼검왕과 초인파였고, 마탑은 지원 전력에 가까운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세세한 계획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세 곳에서 나온 전력은 사건이 있던 날 밤. 숲 밖에서 모였다. 우선 마탑은 숲을 외부와 단절시켰고, 초인파에서 나온 초인이 공격의 시작을 끊었다.


“비록 다수로 검후를 제압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당시 검후가 보였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소. 검후라는 이름이 오히려 모자란 느낌이었지. 초인기를 찢어발기는 검강과 허공을 날아다니며, 적을 베는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했소.”

그때의 기억이 뇌리에 깊이 박힌 듯.

건조하게 상황을 설명하던 탑주가 참지 못하고, 당시의 감정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 작은 모습에서 당시 검후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분명 검후는 대단했다.

하지만 숫자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녀가 강하기는 해도, 결코 압도적이진 않았다. 그녀에게 미치지 못해도, 그녀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강자가 많이 모여 있었다.

특히, 한창 전투의 열기가 오르고, 흐름이 고착되는 시점에서 틈을 노리고 튀어나온 삼검왕은 검후에게는 살수의 검보다 위험한 것이었다. 

“삼검왕의 참전이 결정적이었소. 그들이 나서고 십 분. 검후는 세 자루의 검에 찔려 쓰러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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