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09화
945화
라미아가 힘을 낸 덕분에 금방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퇴! 전원 후퇴해!
“던전이 무너질지 모른다. 전투 중지!”
“나도 그러고 싶다고! 그런데 이 미친놈들이 놓아 주지 않는데 어쩌라고!”
“그만 떨어져. 이 개자식들아! 네놈들도 돌에 깔려 죽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냐!”
공터는 물러서려는 삼 조와 끈질기게 달라붙어 전투를 이어 가려는 적들로 혼란이 한창이다. 그러는 중간에 황녀와 스폴이 열심히 삼조를 다독이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다행히 잘 대처하고 있네. 그래도 많이 당황한 것 같지?”
“무너지면 사망 확정인데 당연하죠. 오히려 패닉에 빠져서 진형을 무너트리지 않은 것이 대단하네요.”
무너지는 건물 안도 위험한데, 여긴 깊이 수백 미터의 지하다. 마법사나 초인도 아니고, 기사들은 던전이 무너지는 순간 탈출 불가, 사망 확정이다. 수만 톤의 흙의 무게는 일반 기사가 아니라 그랜드 마스터라도 감당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진형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황녀, 스폴, 일리나의 우먼 파워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만 해도 일리나가 전투를 끊어 내기 위해 동분서주 중이지 않은가.
스르르릉,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 일라이져를 뽑아 들었다. 전장을 가르는 일리나에 손을 보탤 생각이다.
‘무너진 않지만, 무사히 복귀하길 바라겠소.’
서비스 정보와 함께 남긴 탑주의 말. 무너지지 않아도, 안전하진 않다는 말이다.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 좋다. 그러자면 전투부터 중단시켜야 한다.
“우선 내가 갈라 놓을게.”
일라이져를 들어 삼백 미터가 넘는 길이로 형성된 전선을 가리켜 보이는 이드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라 놓은 간격은 제가 뒤따라가며 벌려 놓을게요.”
“후퇴가 우선이니까. 적에 대한 공격보다는 공간 확보에 신경 써 줘.”
라미아에게 추가 주문을 한 이드는 곧장 땅을 박차고 나갔다.
짜자작.
뇌령전궁보를 밟은 이드의 발아래로 번개 소리가 났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일라이져에서는 수라참마인의 붉은 강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제우스의 명령을 받은 성난 천마 같았는데, 워낙 속도가 빨라 그 압도적인 힘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일라이져가 전선의 끝을 가르고 들어오고 있었다.
콰지직!
가장 먼저 공격에 당한 초인 하나가 피떡이 되어 뭉개졌다. 무자비한 속도와 힘에 마치 산사태로 굴러온 거대한 바위에 부딪힌 것 같다. 말 그대로 겨우 인간의 형체만 남은 처참한 모습.
“뭐야 이거거컥!”
“끄아아악!”
“켁.”
그 모습에 뒤에 있던 자들이 알아차렸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 역시 피떡이 되는 신세를 피하진 못했다. 오히려 밀집해 있던 적들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차라리 그게 편했을지도 모른다. 비명이 긴 만큼 고통이 크다는 것인데, 몸이 저 상태가 되는 고통을 그대로 느낀다는 것은, 죽는 것 이상으로
끔찍한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붉은 강사를 두른 이드가 전선을 거침없이 가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이드의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이드가 지난 길에 3미터의 공간이 생겼지만, 초인이고 기사고 어느 쪽도 그 공간에 먼저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다.
“베, 베링 벤시?”
그런 중에 기사 하나가 육편과 핏물로 진득해진 바닥을 보며 더듬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적아 구분 없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베링 벤시는 지옥 불을 먹고 사는 유령마로 전신에 붉은 갈기를 감싼 채 달리는데, 이마에 박힌 저주받은 마검은 앞을 막아선 것은 무엇이든 갈아 버린다고 했다.
지금 상황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그 취급이 편치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남의 남편을 베링 벤시 취급하다니. 너무하네요.”
슈루루룩.
사람들이 제대로 정신도 차리기 전 나타난 라미아였다. 그녀의 발아래엔 새파란 물회오리가 요동치고 있었다.
“후작 부인?”
앞서 달려 나가 유령마로 오해받은 이드 만큼이나 뜬금없는 등장. 하지만 기사들 중에 그녀를 알아본 기사가 있었다.
동시였다.
콰콰콰콰
회오리치던 물이 무너지며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바보처럼 입을 헤벌린 적들을 뒤로 쓸어내 버렸다.
3미터의 공간이 한순간에 열 배로 늘었다.
“지금입니다. 바로 본진에 합류하고 후퇴하세요.”
짧은 말을 남기고 이드의 뒤를 따르는 라미아다. 그런 그녀의 발아래로는 물회오리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예? 아, 옙!”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기사들은 뒤늦게 상황을 이해하고는 복창과 함께 뒤돌아 달렸다.
“명예 후작님께서 돌아오셨다!”
“뭐야, 그럼 아까 우리가 봤던 베링 벤시가 명예 후작님이셨던 거야?”
“베링 벤시라니! 어디서 무엄한 소리를!”
“두 분이 도와주셨으면, 닥치고 달려라 이놈들아!”
“옙!”
이런 모습이 이드와 라미아가 지난 길을 따라 연이어 반복되었다.
끄억!
“여기가 끝인가.”
전선을 완전히 관통한 이드가 일라이져를 털었다.
“이렇게 실력을 내보여도 괜찮아요?”
그에 중간부터 이드를 도우며 움직인 일리나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곧장 뒤따라오는 라미아 덕분에 빠르게 씻겨 나가고 있지만, 이드가 만든 피의 길이 선명하다.
저 길을 만들며 이드의 손에 죽은 적이 기백이다. 그것도 결코 길지 않은 짧은 순간에.
삼조의 많은 기사들을 괴롭히던 적들을 마치 짚단 베듯 하지 않았던가. 이래서야 모이엔과 마탑의 반응을 걱정해서 전력을 숨겼던 의미가 있을까 싶었던 것.
그에 대한 답은 빠르게 뒤따라온 라미아가 내놓았다.
“괜찮아요. 던전도 막바지고 오 조에 대한 공작도 시작한 뒤라서 저쪽에서 대처하기도 힘들 테죠. 거기에 던전이 변형 중이라 이쪽 상황을 볼 수도 없을 거예요.”
“거기에 조금 과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삼검왕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리고 전 그 삼검왕을 이겼던 사람이고요.”
그러니 삼검왕 정도의 전력은 사용해도 큰 영향이 없다는 이드의 주장이다.
“두 사람이 그렇다면 할 말은 없네요. 그보다 지금은 후퇴부터 할까요?”
일리나의 말처럼 삼 조는 이드와 라미아가 갈라 놓은 전선에서 썰물처럼 빠르게 빠지고 있었다. 행여 다시 적들에게 발목을 잡힐까 걱정한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한번 쓸려 나간 적들은 끈덕지게 달라붙던 아까와 달리 깔끔하게 포기하고는 돌아서는 모습이다.
그들의 시선이 이드와 라미아에 한참이나 머무른 것을 보면 두 사람 때문에 돌아서는 것이 분명한 듯했다.
그에 더해 후퇴 중인 삼조의 후미에서 손을 흔드는 스폴과 아이넬 기사단까지.
“그러네요. 일단 삼 조와 함께 후퇴부터 하죠. 탑주를 만난 이야기는 그 후에 자세히 해 줄게요. 얻은 게 제법 많아요.”
“기대되네요.”
짧은 대화와 함께 세 사람은 빠르게 스폴이 있는 삼조 후미에 복귀했다. 그리고 복귀한 이드의 지휘 아래 흔들리는 공터를 빠르게 벗어났다. 쿵! 콰쾅!
그 직후 공터의 천장이 갈라지며 커다란 돌덩이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중 제일 작은 것이 다 큰 돼지만 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전투가 아닌 돌에 맞은 사상자가 부지기수로 발생했을 것이다.
“휴우~ 천운이군. 명예 후작님이 늦지 않게 돌아오셔서 천만다행이야.”
마지막으로 복도 안으로 사라지는 기사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무사히 세 개의 입구가 있는 공터로 빠져나왔다. 신기하게도 문을 벗어난 13층 던전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뒤이어 다른 두 개 문에서도 이 조와 오 조가 황급히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조 모두 큰 피해는 없어 보이죠?”
라미아가 속삭였다.
“피해가 있을 턱이 있나. 이 조에 있는 청색 기사단은 마탑이랑 한편 먹고 있고, 오 조는 공략보다 다른 곳에 더 신경 쓰고 있으니까.”
“그래도 처음 공략보다는 좀 열심히 했나 봐요. 부상자도 많아 보이고.”
고집을 부려 진입했는데, 기본은 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이드가 천천히 두 조를 향해 다가갔다.
“갑자기 던전이 흔들려 크게 놀랐을 텐데, 이 조와 오조 모두 큰 피해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명예 후작님도 무사하신 듯하니 다행입니다. 황녀 전하와 두 분 후작 부인도.”
“저 안은 당장이라도 붕괴될 듯한데, 여긴 전혀 흔들리지 않는군요.”
“아무래도 신기한 일이 많은 곳이 던전이니,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그 순간이다.
구르르릉.
안심하긴 이르다는 듯 세 개의 문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세 개 문 안처럼 던전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방금 전까지 강렬한 지진 체험을 하고 나온 기사들이 벌써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 이드가 그 모습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일단 공략을 중지하고 토벌대에 복귀하도록 하지요. 이대로 공략을 강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반대는 없었다.
세 개 조는 빠르게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개 조가 모두 빠져나간 후.
이리저리 일그러지던 문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는 점점 덩치를 키우며 문이 있던 공터 전체가 문으로 변한 후 곧 13층에 가득한 어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토벌대 지휘부가 지켜보고 있었다.
“으음. 저게 도대체 무엇인지 짐작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복귀 전 라미아가 박아 놓은 수정구가 전해 주는 영상을 지켜본 록마틴 후작이 고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답을 찾아 토리빈을 중심으로 한 마법사들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초인 마법이라는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고 있지만, 마법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던전에 대해서도 마법사들만큼 잘 아는 사람이 이 자리에 누가 있겠는가. 그런 기대에 토리빈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세 조에서 일어난 현상과 지금 수정구를 통한 영상을 보니 제 생각으로는 던전 융합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던전 융합이 무엇입니까?”
“던전 융합은 말처럼 여러 구역으로 나뉜 던전이 하나로 합쳐지며 더 넓고, 더 복잡하고, 더 위험한 형태로 바뀌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 이해가 가지 않는데. 세 개 문은 이제 겨우 공략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벌써 더 강하게 융합한다고요?”
“물론 그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공략이 끝이 나면 던전 안에 무엇이 있는지 다 밝혀진 후가 아니겠습니까. 융합을 하면 더 강력해지긴 하지만, 기존에 있던 것이 강력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공략이 끝난 후라면 융합의 의미가 떨어집니다. 그러니 상대가 강하다 판단되면 빠르게 던전 융합을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허. 마탑 놈들이 우리 토벌대를 강하게 여기는 것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서로를 보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이다.
그때 토리빈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록마틴 후작이 물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으신 듯하오만?”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융합이 끝난 던전의 공략은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를지 모릅니다.”
“다르다면 어떤?”
“다른 것은 제외하고, 우선 넓을 것입니다. 굉장히요. 지금까지처럼 시간을 정하고서 공략하고 돌아와 쉬는 패턴은 아마・・・・・・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