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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10화


946화

록마틴 후작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이 되었다.

세 개의 문이 나타나며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질 정도로 신경을 썼는데, 그 짓을 또 해야 한다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픈 것이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던전 융합이 이번 토벌의 최대 고비가 될 것입니다.”

그런 고민에 못을 박는 토리빈의 목소리다.

그에 탄식과 함께 이마를 부여잡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하나같이 표정이 우울한 것이 그들의 심정도 록마틴 후작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숙제만 던져 준 회의가 끝나고 록마틴 후작이 다가왔다. 할 말 많은 답답한 표정을 한 그의 식사 권유를 이드는 정중히 거절하고는 양손에 라미아와 일리나를 잡고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괜히 잡혔다가는 쓸데없는 하소연을 들어줘야 할 것 같아서다.

“이야~ 큰일 날 뻔했네.”

토벌대를 조직한 후 유독 이드에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록마틴 후작이다. 생명의 관에 대한 공을 밀어준 것도 있고, 중요 인물인 이드와 친분을 쌓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일전에 이드가 감시조에 솔선해서 나서서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준 것을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사실 제국 귀족들과 별다른 친분이 없는 이드로서는 나쁠 것 없는 좋은 일이지만, 지금처럼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마우면 답례를 해야지 말이야……………

잡혔으면 최소 3시간은 대화 상대가 되어 줘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도망치신 건 좀 과민 반응이 아닐지.”

뒤따라 막사로 들어선 쉴라가 록마틴 후작이 불쌍하다며 말했다. 거기다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당시 일리나와 라미아의 손을 잡고 빠져나가는 이드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도망이었다.

물론 그 모습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드와 같은 분위기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도망은 아니라고요. 그리고 신경이 쓰이시면 쉴라 경이 록마틴 후작님과 함께 식사하지 그랬습니까?”

“크흠. 할 일도 있고 해서 그렇게 하긴 좀……”

“세상에나 지금 쉴라 경이 변명을 하시는 거예요? 쯧쯧쯧.’

슬쩍 발을 빼려는 모습에 이드가 혀를 차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는 쉴라의 귓불이 붉어져 있다. 평소는 볼 수 없는 쉴라의 모습에 막사에서 기다리던 스폴이 싱글싱글 웃으며 구경하고 있다 나섰다.

“자자, 우리 귀여운 단장님 그만 괴롭히고 이리 오세요.”

“그렇게 말하면 현 단장 섭섭한데.”

“앗, 실수, 그럼 남의 귀여운 단장님이라고 바꾸겠습니다.”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너스레를 떠는 스폴이다. 그리고는 수도에서부터 가져온 황궁 요리사 특제 쿠키를 내왔다. 바사삭 쿠키에 가장 먼저 손을 댄 일리나가 달콤한 맛에 마법으로 가려진 귀를 쫑긋거리다 말했다.

“이제 탑주를 만난 일에 대해 말해 주세요.”

“저도 듣고 싶었습니다. 혹시…….”

일리나의 말에 쉴라와 스폴이 퍼뜩 정신이 든 듯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느긋하게 반응을 지켜보기도 미안할 정도의 모습에 라미아가 순순히 원통을 꺼내 놓았다.

“탑주가 내놓은 지도에요. 검후님의 현재 위치가 그려져 있죠.”

흡,

순간 이드 일가족 세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숨을 멈췄다. 부릅뜬 눈이 모두 원통으로 향했다.

누구도 쉽게 손을 뻗지 못하는 사이 쉴라의 손이 움직여 원통을 잡았다. 순간 멈췄던 숨이 한 번에 터졌다.

“……”

그사이 손에 든 원통을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던 쉴라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이드에게 예를 표했다.

 “갑자기 왜…….”

“긴 시간 노력했지만, 의심만 늘어갈 뿐 검후님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검후님이 사라진 날의 진실이 나타나고, 검후님의 행방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명예 후작님의 은혜. 주인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은 검이지만, 저와 은색 기사단은 죽는 순간까지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과합니다. 아직 지도가 정확한지 확인도 하지 않았는데.”

“아니요. 두 분께서 그런 확신도 없이 거래를 하지는 않으셨을 테니까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걸 믿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도가 틀리면 손해 배상이라도 청구할 것 같아 무서운 정도의 믿음이 아닌가.

“그래도 과합니다. 일어나세요.”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색 기사단의 맹세는 이미 끝이 났습니다.”

“역시 우리 남의 단장님. 화통하시다니까. 저도 그 맹세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아아. 스폴 경은 잠깐 빠지고!”

쉴라 옆에 털썩 무릎을 꿇는 스폴에 이드가 고개를 흔들 때였다.

“정말 감동적이네요. 이런 순간에 함께하는 것도, 검후님을 찾게 되었다는 사실도.”

훌쩍이는 코맹맹이 소리에 돌아본 곳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드와 기사의 맹세를 한 쉴라를 번갈아 보는 황녀가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야기 속 한 장면을 현실에서 본 듯 감동이 그득했다.

이드는 그 모습에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 그만 일어나세요. 맹세도 좋지만 자세한 정보도 확인해야 할 거 아닙니까.”

이드의 말에 쉴라와 스폴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쉴라는 원통을 바로 열지 않았다.

“열어 보지 않습니까?”

“지금 열었다가는 당장 검후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갈 것 같아서요. 우선 명예 후작님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추스른 후에 확인하려고 합니다.” 글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은색 기사단 입장에서 검후가 공격당해 납치되던 날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 싶다.

그래도 이야기할 것은 해야지. 이드는 탑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조금 더 간추려 풀어 놓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니나 다를까 쉴라들의 반응은 살벌했다. 삼검왕이 검후의 공격 계획을 주도했다는 시점부터 뿜어지던 살기가 이제는 아른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뭉게뭉게 피어났다.

“까드득.”

중간부터 번갈아 가며 이빨을 갈아 대는 소리도 심상치 않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빨이 무사할지 모르겠다.

중간에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 메르시오에 대한 내용도 가볍게 넣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하긴 검후가 그녀의 검에 찔렸다는데 메르시오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

특히 그중 가장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은 황녀였다.

쉴라와 스폴의 것이 절제된 살기라면, 황녀의 얼굴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자, 일단 한 잔씩 마시고 진정들 하세요. 그렇게 화를 낸다고 당장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말과 함께 독한 술을 꺼내 한 잔씩 권하는 라미아다.

그녀의 잔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법 많은 술이지만 단숨에 넘겼다. 목과 가슴이 타는 듯할 텐데, 오히려 시원한 표정으로 긴 숨을 내쉰다. 그 모습에 이드가 말했다.

“화를 내는 건 이해하지만,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검후님이 쓰러지신 그 날의 상황을 듣고 있으니, 너무 분했습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자신과 믿었던 검에 찔렸을 때 아팠을 검후님의 마음을 생각하니.”

사실 이드로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 새삼 감정이 격해질 것이 있을까. 그렇다고 죽여야 할 놈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내 감성이 메마른 편은 아닌데 말이지.’

라미아와 일리나에게도 충분히 다정하다는 말도 들었던 이드였다.

그때 독주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황녀가 물어왔다.

“황제 폐하께도 알려야 할까요?”

“알려야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정보도 탑주의 것이고, 정확한 증거가 없습니다. 제 생각엔 검후님을 구출한 후에 사실을 밝혀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이미 늦을 대로 늦어 버린 것이기도 하다.

“명예 후작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황녀.

그 한편에서 쉴라가 원통을 까고 있었다. 그러자 이드와 라미아가 이미 확인한 작은 지도가 굴러 나오며 한편에 적힌 글자가 드러났다.

“마스…… 쉐어 가든…………… 이곳에 검후님이.”

글자 하나하나를 머리에 박아 넣듯 읽어 내리는 쉴라다.

다행히 그녀가 충동을 다스리지 못하고 달려 나가는 일은 없었다.

마음만 급해 봤자 좋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완벽히 준비해서 검후를 구해 내야 한다.

작은 실수로 검후를 구하지 못하면 언제 또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니, 그 전에 검후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드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토벌에 참가한 이드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건 은색 기사단 포함 오색 기사단도 마찬가지.

거기에 오 조가 당하는 것을 그냥 둘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결과적으로 조금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잘 알겠지만 오 조에 대한 작전이 끝나고 나면 마탑과 소드 팰러스, 그리고 초인파에 균열이 생길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검후님을 감금하고 있는 곳에 대한 관리에도 빈틈이 생기겠군요.”

중간에 말을 자르고 들어온 쉴라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틈까지는 아니라도 아무래도 반응은 느려질 겁니다. 우린 그때를 노려야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정보는 확보해 두는 차원에서 은밀히 기사들을 움직이겠습니다.”

괜히 손 놓고 있다가, 들이쳤더니 쳐들어오기 전날 검후를 옮겼다더라 하는 황당한 일은 피해야 하니까.

“에단에게도 연락을 해 보죠. 어쩌면 그 근처에 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초인파의 뒤를 쫓던 에단이니 가능성은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대략적으로 서자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당장 해결할 수도 없는 일에 신경을 쓰는 것도 심력 낭비.

거기에 지금은 그 일이 아니라도 생각해야 할 일은 많다.

가령 던전 융합 같은 것 말이다.

“진짜 예상 밖이지요. 인공 초인만 해도 대단한데. 설마 던전이 변하다니. 설마 변신에 비행까지 하는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네? 비행이라니요?”

어떤 비행 요새를 떠올린 이드의 말에 살짝 혼란이 생겼지만 답하지 않는 이드에 곧 흐지부지되었다.

“그래도 수단 자체는 칭찬해 줄 만해요. 세 개 조를 동시에 투입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토벌대 전체가 움직이게 만들었잖아요.”

“한 번에 쓸어 넣어서 요리하겠다는 거지. 모두 정신없는데, 오 조에 대해 신경 쓸 사람도 없을 테니까.”

“저희를 빼고는 말이죠.”

“그래. 우리 빼고.”

검후의 구출을 위해서라도 좀 더 적극적으로 마탑과 소드 팰러스를 방해해, 초인들을 살려 보려는 이드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각.

모이엔은 수정구를 통해 마탑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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