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20화
956화
“기다리던 이 조가 등장하셨네.”
복면인들을 바라보는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 이 시점에 오 조를 공격할 기사 전력이 이 조 말고 누가 있겠는가? 특히 이드는 복면인 중 몇을 주목했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유독 검이 날카로운 자들. 그들의 움직임에서는 청색 기사단 특유의 내력이 느껴졌다.
나름 감춘다고 감추고 있지만 힘을 쓰는데, 힘의 근본을 감추려고 한다고 감춰지겠는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감추려는 의지가 강력해 보이지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 석실에서 끝을 볼 생각일 테니. 아무렴 오 조가 쓰러진 앞에 당당히 나타나, 너희들을 쓰러뜨린 것이 바로 우리다. 하고 조롱도 하고 싶지 않을까.
“아무리 기사도를 외쳐 봐야 복면을 쓴 시점에서 바닥의 얕음은 드러난 거니까. 그나저나 발터 저 사람 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
이드의 눈에 극도로 분노한 발터의 모습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아닌 게 아니라 발터는 지금 터지기 직전이었다.
설마 후방이 당할 줄이야. 그는 복면인들보다 적의 기습을 경계하지 못한 스스로에 화가 났다. 후방의 터널이 막혔다는 사실에 방심했고, 암살 기사의 등장에 눈이 멀어 앞만 보고 달리다 뒤통수를 맞았다.
눈이 가려진 경주마도 아니고,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실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발터는 칸을 불러 후방을 맡겼다.
“충! 완벽하게 후방을 막아 내겠습니다.”
칸이 외치며 달리자 익숙한 형태로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청색 깃털 기사단의 기사들이다. 그들이 단장의 분노와 실수를 알고 이를 악물고 나선 것이다.
그 모습을 믿음직스럽다는 듯 보던 발터가 다시 복면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적은 한눈에 봐도 흔한 용병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예도 아니다.
검에 절도가 있고, 공격이 체계적이다. 또한 초인과의 싸움에 익숙한 저 모습은 마탑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마 네놈들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누가 이 시점에 저런 자들을 준비할 수 있을까. 순간 떠오르는 후보에 발터는 뒤통수가 저릿할 정도로 치솟는 분노를 억눌러야 했다. 그간 정치판에서 갈고 닦은 경험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당장은 눈앞의 적을 먼저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오조는 앞뒤로 적을 마주한 위기의 상황이었으니까.
분노를 갈무리한 발터가 앞뒤 양쪽의 적을 확인했다. 양쪽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다면 우선 한쪽을 빠르게 정리한 후에 나머지 적을 쳐야 한다.
“정말 놈들이라면 곧 적 전력이 더해진다. 그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말이 끝나게 무섭게 발터가 엑스카베이터를 발동시켰다. 그의 초인기가 일어나자 파도치던 땅에서 흑마가 나타나 발터를 등에 태웠고, 땅에서 솟아난 마상창 두 개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친다. 내 뒤를 따르라!”
히이이잉~
흑마가 길게 울며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런 발터가 택한 우선 처리 대상. 그건 몬스터와 마수,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암살 기사였다.
언뜻 암살 기사에 대한 집착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계산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암살 기사와 상관없이 몬스터와 마수를 먼저 상대하는 것이 빠르게 전투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이 맞다는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인간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할까? 몬스터와 마수는 후퇴와 속임수를 모르고 무조건 달려들지만, 기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약점이 보이면 찌르기보단 우선 멈춰서 살펴야 한다.
당연 전투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발터는 몬스터와 마수를 죽이고 그 전력을 기사들에게 돌릴 생각인 것이다.
이드는 그런 의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결정이야. 좋은 결정이긴 한데, 문제는 적이 그런 걸 살피지 못했겠냐는 거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마탑과 소드 팰러스에서 준비한 함정이 발터의 예상보다 크고 치밀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존 워스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초인 혐오가 극한에 도달한 그가 오 조를 공격하는 일에 빠질 리가 없지 않나.
그런데 복면 기사들 사이에 청색 기사단은 있어도 존 워스는 없다.
“즉, 아직 본 게임이 아니라는 거지. 거기에 적색 기사단도 상대해야 할 테니. 슬슬 저 인간도 빠질 때가 되었고.”
선수 교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까?
그런 이드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도망치는 것이냐! 암살 기사!”
오만하게 서서 초인들이 공격당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던 모이엔이 통로 안으로 돌아섰다.
그에 발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를 태운 말은 앞을 막아선 몬스터를 깔아뭉개 그 대가리를 밟아 터트리며 앞으로 나갔고, 황궁 기둥처럼 큰 마상창은 몬스터와 마수를 꼬치처럼 연신 꿰뚫는 중이었다.
마상창에 매달린 몬스터의 숫자만 벌써 아홉 마리. 그런데 초인기가 형상화된 말은 물론이고, 발터조차 전혀 무게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기가 찰 정도다.
가히 압도적인 힘이 아닐 수 없었다. 기사라기보다는 전사에 가까웠고, 창에 꿰인 몬스터를 튕겨 공격하는 모습은 야성적이기까지 하다.
거기에 그가 만든 틈을 벌리고 뒤따르는 오 조의 초인 기사들의 모습까지.
어지간한 간담이면 그들의 목표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줌을 싸며 기절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암살 기사로 변장하고 있는 모이엔에게서 위기감은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크크큭. 천하에 발터 단장이 화가 나신 모양이군. 도망이라.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거기서 그렇게 외친다고 날 잡을 수나 있나?”
“지금이 아니라도 네놈은 결국 이 던전에서 죽는다. 그게 진실이다.”
“훗~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도망치지 말라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부디 잘 버티길 빌어 주지.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말이다.”
마지막은 분명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말이었다. 전투의 소음이 아니라도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
“이야, 저 밉상. 남 속 뒤집는 말솜씨는 아주 타고났네.”
이드가 말했다.
분명 작기는 하지만 이드는 물론이고 발터가 듣지 못할 크기는 아니다. 절대 실수 같은 혼잣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터의 이마에 구불구불한 핏줄이 솟아올랐다.
“뿌득! 역시 네놈들이었나! 뒤에서 마탑과 손을 잡은 것이냐. 소드 팰러스!”
“이런, 뭐라는 건지? 하하하.”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통로 안으로 들어가는 모이엔이다. 통로 때문에 울리는 웃음소리가 마치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웃는 것처럼 들린다.
“누가 가게 둔다더냐! 크아압!”
콰우우-
발터가 손에 들고 있던 마상창을 냅다 집어던졌다. 말 위지만 충분히 힘을 받은 창이 미사일처럼 허공을 날았다. 거기에 이 미사일, 최첨단의 가변형이다. 뭉툭한 마상창에서 흙이 떨어져 나가며 공기 역학적으로 날렵한 투창의 형태로 바뀌어 속도를 더했다.
그게 끝이 아니다.
남아 있던 마상창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지형을 바꾸는 것은 네놈들만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지!”
마치 주사약이 주입되듯 긁던 마상창이 가늘어지며 모이엔이 들어선 통로의 바닥이 흔들렸다.
그리고 바닥을 뚫고 나온 손과 창이 모이엔에게 도착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퍼퍼퍼퍽!
폭발이 일어났다. 흙과 돌이 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그런데 비명 소리도 없고, 폭발음도 좀 이상하다. 창에 찔렸다면 비명이 들려야 하고, 손에 잡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암살 기사가 방어했다고 해도 마찬가지. 연속적인 폭발이 아니라 하나의 폭발음이 들려야 한다.
이런 점들을 보면.
슈우우우.
빠르게 먼지가 가라앉고 나타난 통로, 거기에는 다섯 손가락이 부러진 손과 폭발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암살 기사의 흔적도, 핏자국도 없다.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고 놓친 것이다.
“후우~ 적 진형을 양단했다. 기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비록 목표는 놓쳤으나 발터의 괴력에 몬스터와 마수들이 순간 주춤했다. 기사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몬스터 사이로 그물처럼 파고들어 놈들의 연계를 가닥가닥 끊어 놓았다.
그에 통로를 바라보던 발터가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암살 기사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도 미련도 없었다. 물론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눈동자 깊이 분노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무엇이 중한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현재 발터의 정신은 날카롭게 날이 선 상태였다.
그는 암살 기사의 말을 통해 반 확신을 얻은 상태였다.
소드 팰러스와 마탑이 손을 잡았다는 확신 말이다.
“세상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이렇게 앞과 뒤가 다른 작자들이 기사도의 수호자라니. 크흐흐흐.”
또한 그런 놈들을 믿고 일을 벌인 자신들이 바보 같았다. 왜 이런 가능성을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탑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는 동안은 한편이라고 너무 방심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 떠들어 대는 기사도에 홀렸는지도 모르고,
“주인을 잡아먹는 놈들에게 애초에 없는 것이 신뢰이며 믿음인데 말이지.”
물론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정말 소드 팰러스와 마탑이 손을 잡은 것이라면 위험했다.
그들이 손을 잡고 노릴 목표는 많지만, 발터는 그들의 우선 목표가 자신과 청색 깃털 기사단. 그리고 오 조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목표가 아니라면 굳이 비밀로 감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적의 적이 아군이듯, 연합군의 연합군도 아군이다. 오 조와 발터가 목표가 아니라면 마탑과 손을 잡았음을 알리고 마탑과 오 조가 싸워 서로의 전력이 소모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비밀로 했다.
무엇보다 암살 기사가 오 조의 조원들을 암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도…….
“우선 이곳을 탈출한 후・・・・・・ 삼조와 합류해야 한다.”
물론 최종 목표는 던전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가서 자신이 추리하고 확인한 것들을 알린 후 대비해야 했다. 마탑과 소드 팰러스 간의 전투를 말이다.
이드가 이런 발터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두 손을 번쩍 들어 기뻐했을 일이다. 노리대로 잘 돌아간다고.
푸스스슥.
발터가 양손을 뻗자 땅에서 새로운 창이 솟아 올라왔다. 전투를 빨리 끝내려면 그도 거들 필요가 있다.
발터가 창을 동시에 던져 냈다.
콰릉! 꾸웨엑!
두 자루의 창은 대나무 살처럼 갈라져 몬스터들을 덮치기도 하고, 빠르게 회전하며 기사들과 대치 중인 오거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발터가 한참을 더 창을 쏘아 내면 몬스터는 금방 정리가 가능할 듯 보였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타타타타!
나는 듯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복면인들이 더 나타나 후방의 초인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잘 막고 있던 후방이 밀렸다. 칸이 진형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 애를 썼지만 힘의 우열이 애를 쓴다고 메꿔지는 것이던가.
“자네들은 이곳을 정리하는 즉시 합류하게.”
명령을 남긴 발터가 후방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리고 가장 위태로운 기사들 앞으로 점프하며 창을 내질렀다.
“사라져라.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 놈들.”
“드디어 그 이름도 높으신 검왕께서 오셨구만.”
느긋하게 구경하던 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막 기사 하나를 꼬치 꿰듯 꿰려는 창 앞으로 창백한 빛이 나타나며 폭발했다.
꽈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