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33화
969화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까딱거리는 손가락이 제법 거슬렸다. 당장 꺾어 버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파괴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요물이다.
부하 마법사들이 다 죽고, 일리나에게 밀려 숨기고 있던 힘을 드러낸 것치곤 제법 여유로워 보인다. 흉측한 모습이지만, 변신하고 자신감이 올랐나 보다. 옷만 입으면 대담하고, 강해지는 쫄쫄이 성애자들처럼.
그런데 해더웨이가 손을 까딱거리는 방향이 좀 이상하다. 일리나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닌가.
“저거 지금 일리나가 아니라 나보고 오라는 거 같죠?”
“그런 거 같은데요?”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착각이 아니다. 해더웨이의 시선도 정확히 이드를 향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라미아고, 그런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이드이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누구와 싸우고 있었는지, 일리나의 손에 부하 마법사들이 얼마나 죽었는지도 해더웨이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탑주의 명령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해더웨이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할래요?”
이드에게 중요한 건 일리나였다. 적이 자신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싸우겠다는 것은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다행히 지금 일리나에게 그런 느낌은 없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검을 거둔다. 그 모습이 오히려 담백할 정도다. 어쩌면 징그럽게 변한 해더웨이를 상대하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저도 꼭 싸우고 싶은 건 아니니까. 맡길게요. 부관주가 슬슬 진심으로 상대하려 들어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에이, 진짜 실력이 아니었던 건 일리나도 마찬가지잖아요.”
좁은 통로와 비좁은 공간을 더욱 좁히는 보호 마법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못한 일리나다. 물론 외형을 비롯해 기질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해더웨이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일리나 역시 그런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싸우는 상대의 변화를 모를 정도로 그녀는 미숙하지 않다.
“그렇다 해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죠. 부관주는 절 알지만, 전 부관주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는 거예요. 그건 곤란하잖아요.”
냉정한 분석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기는 일에만 나서는 냉혹한 승부사는 아니다. 당연히 승패에 대한 결벽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보다 긴 시간을 살아온 그녀에게 패배는 승리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이드까지 옆에 있다. 위험한 순간 그가 나설 것이니 두려울 이유가 없다. 이 싸움은 일대일 결투가 아니니까.
그럼에도 일리나가 이드에게 싸움을 맡긴 것은 이드가 오 조에게 돌아가야 할 시간 때문이었다.
해더웨이와 일리나가 싸우게 된다면 긴 시간 싸우게 될 것이고, 당연히 일리나를 걱정한 이드는 그 시간 동안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오조가 있는 석실로 돌아갈 시간이 늦어지고, 늦어진 만큼 오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 모두 존 워스와 마탑에 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기지를 발휘한 오 조가 잘 탈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에 기대기에 마탑의 준비는 철저하고, 존 워스는 너무 강하다. 말 그대로 하늘이 돕지 않는 이상 오 조만의 힘만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일리나로서는 해더웨이와의 싸움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침 해더웨이도 자신이 아닌 이드를 지목했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이드에게 맡길게요. 빨리 끝낼 수 있죠?”
살포시 이드의 어깨에 손을 걸치는 일리나에 이드의 입매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상냥한 그녀의 배려심이 마냥 좋은 것이다.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큰 뱀 상대로 손맛이 부족했는데 잘됐네요. 하하하.”
“그럼 전 뒤에서 응원하고 있을게요.”
말과 함께 이드의 어깨에 짧게 입을 맞추고 통로 안으로 들어가는 일리나다. 이런 응원까지 받았으니 정말 힘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싱글벙글하던 얼굴은 해더웨이를 향하는 사이 평온하게 변했다.
“이런 이유로 지금부터는 내가 상대하겠소. 부관주도 원하던 일이니 불만은 없겠지요?”
“바라던 바입니다.
그리 말한 부관주가 이드 너머에 있는 통로를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황녀가 무사히 복귀하기 위해서는 소검후가 옆에 있어 주는 쪽이 안전하겠지요.”
“훗, 제국이 무섭긴 한 모양이오.”
“현 대륙에서 아나크렌 제국의 힘을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마탑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초인 마법을 인정받고 대륙의 정식 마탑으로 인정받는 것. 제국의 적이 되어 끝까지 싸우고 싶은 것이 아니오.”
사실 마탑 입장에서는 토벌대를 따라온 황녀의 존재는 골칫덩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공격할 수도, 죽일 수도, 납치할 수도 없는 위험한 폭탄 같은 존재가 바로 황녀였으니까.
“통로 안의 토벌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반가운 말이오. 그럼 시작해 봅시다. 내가 좀 바쁘니, 서둘러 끝내는 게 좋겠군요.”
“그 역시 바라던 바입니다.”
역시나 시원시원한 대답을 내놓는 해더웨이의 태도에선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만큼 자신의 힘을 믿고 있다는 의미일 테지만.
‘글쎄. 초인들의 것을 갈취해서 사용하는 힘을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초인기를 아티팩트 같은 것으로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이드는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쓸데없는 생각이지. 일리나의 응원도 있겠다. 지금은 싸움을 빨리 끝내는 것에나 집중하자.’
속으로 빨리빨리를 외친 이드가 손을 들었다.
시작 신호를 울리는 것은 아니다. 벌써 한참 전에 시작한 싸움이다. 따로 시작 신호가 왜 필요한가.
슬쩍 들린 이드의 손에서 붉은 번개가 뿜어졌다.
다섯 손가락에서 뿜어진 혈뇌천강지가 심장과 머리를 노렸다. 사전 동작도 필요 없고, 은밀한 지공은 타이밍만 잘 잡으면 한방에 적을 죽여 버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이드도 첫 시작을 혈뇌천강지로 택했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다. 지공은 기본 옵션일 뿐, 진짜는 따로 있다.
위이이잉!
지력을 뿌린 손이 어느새 일라이져를 잡았다. 오랜만에 전해지는 강력한 기운에 기분 좋은 울림을 토하는 일라이져. 그 위로 구름처럼 모여든 내력이 거대한 검형을 일으켰다.
무형대천강의 검력이다.
붉은 번개가 번뜩이고, 그 뒤로 산더미 같은 검강이 일어섰다. 보통 그 광경을 보면 정신을 놓고 죽음을 받아들이겠지만, 해더웨이는 달랐다. 괜히 그가 정신의 관 부관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드의 공격을 인식한 순간 그의 거대한 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더웨이의 머릿속에 이식되어 종속된 초인들의 뇌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수십의 뇌는 이드의 공격에 어떤 초인기로 대응해야 할지 빠르게 답을 찾아냈다.
뿌드드드득.
해더웨이의 머리를 감싸 지지하기 위해 형태가 변형되어 있었던 지팡이의 일부가 순간 삐죽 솟아올랐다. 그 모습이 꼭 안테나 같다.
콰과과과~
그러자 해더웨이로부터 거칠고 차가운 삭풍이 일어났다. 그것은 강력했다. 초대형 태풍의 바람 이상이었다. 삭풍은 마치 석공의 조각칼처럼 혈뇌천강지를 깎아 냈다.
뒤이어 또 다른 안테나가 솟고, 녹색 안개가 일어나 무형대천강을 받아 낸다.
이드는 녹색 안개에서 부드러움을 느꼈다. 유능제강.
마법에서 유로 강을 제압하는 무리를 느꼈다면 이상할까? 사실 응용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드도 나름 무공을 마법으로, 마법의 이론을 무공을 적용해서 쓰니까.
하지만 어설픈 응용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녹색 안개가 부드럽지만,
찌지지직!
천강의 힘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무형대천강이 녹색 안개와 함께 공간을 갈랐다.
다만 그 자리에 해더웨이는 없었다. 녹색 안개가 갈라지는 것을 인지한 순간 공간 이동으로 피한 것이다.
공간 이동의 초인기를 사용한 것을 증명하듯 그 머리에는 몇 개의 안테나가 더 솟아 있다.
하지만 이드가 마법사의 공간 이동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특히 다종다양한 마법들이 많아 한 수에도 그에 대한 대응법을 다섯 개 이상 리스트에 올리는 이드다.
해더웨이가 다시 나타나는 순간 허공을 가르던 무형대천강의 검형이 폭죽처럼 터지며 수천의 물방울 형태로 바뀌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온 사방으로 튀어 오른 물방울은 곧 빠르지 않지만, 물샐틈없이 촘촘한 간격을 유지하며 해더웨이를 조여들었다.
그러자 다시 해더웨이의 안테나가 늘어났다.
파파팟.
신호를 주고받듯 반짝인 안테나 끝에서 돌연 빛의 접시가 나타나 광선을 뿜어냈다.
꽈르르릉!
한 발도 아니었다. 각 안테나 위에 접시 하나씩. 수십의 광선이 레이저쇼처럼 난무하며 물방울 형태로 해더웨이를 조여 오는 검계를 두드렸다. 꽝! 꽈꽝!
무형검강결의 검계는 쉽게 뚫리지 않았다. 그러자 여러 개의 접시가 합쳐지며 강력한 광선이 뿜어졌다. 강력한 힘이 집중되자 검계도 일부가 허물어지고 만다. 검계를 무너트린 광선이 벽에 깊은 구멍을 만들며 석실을 흔들었다.
그 무식한 힘 밀기에 고개를 내저은 이드가 검계를 복구하며 화령화의 검기를 뿜어냈다.
차르륵. 차르륵.
물방울의 위치가 바뀌며 검계는 성벽에서 그물로 변했다. 단단함을 잃은 대신, 질기고 끈끈해졌다. 그런 검계의 틈으로 화령화의 붉은 꽃잎이 넘어 들어와 독사처럼 해더웨이를 공격했다.
그에 광선이 채찍처럼 길게 늘어지며 화령화를 요격했다. 빛의 성질을 가진 광선이라 속도에서 전혀 화령화에 뒤지지 않았던 덕분이다.
쿠르르르르르르!
쉬지 않고 이어지는 폭음이 천둥소리 같다. 광선이 강력했지만, 이드의 화령화는 무한했다. 천둥이 요란해지고, 검계 안의 온도가 가파르게 올랐다. 폭발은 열을 만드는데, 검계가 열까지 배출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
거기에 자신의 일은 그뿐이 아니란 듯 검계가 움직였다.
느리지만 거리를 좁히던 검계의 물방울이 시계추처럼 움직이며 검계 내부 해더웨이를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화령화가 예측불허라면, 검계는 기계적이고, 수학적이다. 진법에 근본을 둔 규칙적인 움직임이 진압을 만들어 해더웨이를 내리눌렀고, 화령화 또한 그 힘을 더한다.
화령화는 광선이 막아도, 진압까지는 광선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가.
쩌어엉!
머리에 솟은 안테나가 강하게 진동하자 해더웨이의 허리 부근에서 기운이 솟아났다. 무형의 기운은 날카롭게 뻗어 나가며 공간을 갈랐다.
검계가 변한 성격을 따라 해더웨이도 방법을 바꾼 것일까. 검계의 일부가 무형의 기운에 찢어진다.
순간 해더웨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간 이동으로 한없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공간에서 탈출을 시도한 것.
다시 해더웨이를 놓쳤지만, 오히려 이드의 눈은 반달로 휘어졌다. 그리고.
“크윽!”
쩌렁!
공간이 붕괴되며 종소리를 닮은 기음이 났다. 직후 해더웨이가 허공중에 나타나며 답답한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런 그의 어깨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쩌억 갈라져 덜렁거렸다. 공간 이동의 마지막, 재구성과 융합 단계에서 충격을 받아 부상을 당한 것이다. 공간이 갈라지며 당한 부상은 마치 검으로 벤 듯 예리했다.
“내가 이곳으로 움직일지 어떻게 알고 함정을?”
“당연히 당신이 그곳으로 움직일지 몰랐소. 대신 촐랑촐랑 도망 다니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말이오. 석실 전체에 미리 좀 깔아 두었다오.”
이드가 해더웨이를 향해 돌아서는 순간이다.
반짝,
작은 반짝임을 시작으로 마치 하늘에 별이 내려온 듯 수많은 빛이 석실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