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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35화


971화

그건 일종의 현실 도피였다.

해더웨이가 본 광인멸혼류는 공격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에 가까웠다. 그것도 항거불능 수준의

감당할 수 없는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무기력해지는 것처럼, 해더웨이도 잠시 정신을 놓았다. 달리 말하자면 겁을 먹고 굳은 것이다. 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죽여 달라는 말과 마찬가지.

이드로선 상대가 얌전히 죽어 주겠다는데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힘을 내자 빛의 흐름이 격렬해졌다.

눈 깜빡할 사이 분신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퍼퍼퍼퍽!

그 충격이 해더웨이에게 전해졌다.

마치 명치에 연타를 당한 듯한 느낌. 실제적인 고통은 아니지만, 의념으로 전달된 충격은 정신을 직접적으로 뒤흔들었다. 한겨울 얼음물을 뒤집어쓴 정도라고 할까?

그 덕에 정신이 번쩍 든 해더웨이가 발악을 시작했다.

아무리 엄청난 힘이라도 그렇지, 고위 마법사에 정신의 관 부관주의 자존심이 있다. 꿈틀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밟혀 죽을 수는 없다.

“막아라!”

생각과 동시에 머릿속 보조 뇌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초인기가 분신들을 휘감았다.

불, 얼음, 가시, 독, 번개 등등. 갖가지 속성을 휘감은 분신들이 말벌처럼 날뛰며 광인멸혼류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견적이 나와야 하는 법. 애초에 초인기와 광인멸혼류는 힘의 크기가 다르고 질이 달랐다. 무엇보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광인멸혼류도 결코 얌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싸아아~ 싸아아~

광인멸혼류의 빛 무리가 태양의 플레어처럼 뿜어지고, 그때마다 유성처럼 날아온 분신이 불 속에 뛰어든 하루살이처럼 재로 변해 흩어진다. 해더웨이는 그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의념을 두드리는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분신이 저토록 쉽게 부서지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더웨이나 장로들이 사용하는 초인기는 많고 많은 초인기 중 희귀하고 특별한 것을 신중히 골라 빼앗은 것이었다. 분신을 만든 초인기 ‘숲나무’ 역시 그런 특별한 초인기 중 하나다.

초인기 숲나무는 드래곤도 구분할 수 없는 분신을 만들어 내고, 그 신체 강도는 본신의 두 배 이상을 유지시킨다.

본신이 가진 마법이나 초인기를 분신이 사용할 수는 없지만, 본체와 이어진 무형의 라인을 통하면 그런 단점도 충분히 보완이 가능하다. 실로 해더웨이를 위해 준비한 초인기라고 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해더웨이도 이 초인기를 얻고 매우 기뻐했던 것이 사실.

한데 지금 그런 초인기가 해변가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런 자를 삼검왕과 동급이라고? 어떤 놈들인지 눈이 삐었구나.’

정보 오류도 적당해야지.

삼검왕은커녕 검후보다 강해 보이지 않는가.

무엇보다 눈앞의 빛 무리. 해더웨이는 무공으로 이런 공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이건 마치 초인기 같지 않은가.’

해더웨이에게 무공이란 검을 비롯한 병장기를 들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빛 무리를 쏟아 내는 광인멸혼류는, 힘의 규모는 둘째로 두더라도 그 형태만은 초인기나 마법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그 사실이 초인 마법에 대해 해더웨이가 가지고 있던 미래에 대한 자부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를 비롯해서 미완의 마탑 마법사들은 초인기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진리의 궁극이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초인기는 이전의 힘들과 다르다.

수행도, 공부도, 써클을 만들기 위해 마나를 모을 필요도 없으며, 비싼 재료와 주문도 필요 없다. 오로지 사용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이런 초인기야말로 영혼에 새겨진 진짜 힘이다! 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던 것.

하지만 그런 주장도 이드의 압도적인 힘을 마주하면 퇴색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났다고 떠들어 봤자, 이드의 무공에 부서지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힘이 곧 진리인 세상에서 대륙 최강을 앞에 두고 어떻게 초인기가

진정한 진리라는 주장에 힘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산산이 부서지는 분신과 함께 자부심도 무너졌다.

그러나 힘이 빠지진 않았다.

분신이 사라진 자리에 곧 새로운 분신이 나타났다.

믿음이 흔들려도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죽고 나면 믿음이고 이론이고 아무 소용도 없다.

‘당장 뇌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초인 마법에 바쳤다. 이 길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빠르게 정신의 재무장을 마친 해더웨이다.

과연 머리 좋은 마법사라는 것일까. 생각을 정리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머리가 커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해더웨이의 제일 큰 문제는 역시 성인처럼 빛을 휘감고 거침없이 다가오는 이드였다.

‘인정해야겠지. 저 괴물 같은 자를 상대할 초인기는 없다.’

세상에 어딘가에는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해더웨이 본인은 가지지 않았다.

그 순간 해더웨이는 초인기로 이드를 상대하겠다는 고집을 버렸다.

대신 그가 꺼내 든 것은 그의 근간이 된 힘. 바로 마법. 그것도 어중간한 것은 쓸모가 없다.

‘고대에 잠든 이름이여, 들으시오. 여기 제물을 바칩니다.’

주문과 함께 해더웨이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지팡이가 느슨해졌다.

그 틈을 이용해 머리통 안에서 뇌수에 젖은 회색의 뇌가 밀려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해더웨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이드다.

그는 마나와 공격의 형태를 통해 수 초간의 짧은 변화를 읽고 있었다. 그 덕에 꽁승이 아깝게 날아간 것을 알고 아쉬워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뇌에 혀를 찼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인 것은 신경 다발이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저 뇌가 정신의 관에 잡혀 온 초인들의 뇌라는 사실이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설마 해더웨이의 뇌가 다섯 개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이었다.

뇌들은 허공중에 갑자기 나타난 음울한 기운이 닿자마자, 순식간에 영양분이 빨린 듯 쪼그라들어 껍데기만 남았다.

동시에 뇌가 있던 자리에는 귀가 아닌 영혼으로 전해지는 희미한 비명 소리가 길게 이어지다가 음울한 기운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 모습에 이드의 발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인체 실험에, 본인의 몸을 개조한 건 물론이고, 이젠 영혼을 제물로 한 흑마법까지. 부관주는 마법사의 금기란 금기는 모조리 어겨 볼 생각인가보오?”

“금기 이전에 내가 사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보기 좋지 않거든 이대로 물러나 주시면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이드가 콧방귀와 함께 검경을 쏟아 냈다.

“흥! 어디서 약을 팔아!”

흑마법, 그중에서도 현재 해더웨이가 사용한 소환 마법은 제물을 바친 시점에서는 취소 자체가 불가능하다.

해더웨이는 이드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법 지식만은 빵빵한 이드로서 오히려 화만 더 치솟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화살처럼 쏘아진 검경 앞에 검은 형체가 솟아올랐다.

그어어어억~

출렁.

놈의 몸에 닿은 검경이 늪에 빠진 듯 검은 형체 안으로 사라졌다. 그건 공격을 막았다기보다는 삼켰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공격을 삼킨 놈이 움직였다. 일그러진 입에서는 저주의 말이 쏟아졌고, 그 소리에 유령들이 달려들었다. 검은 몸체에선 음울한 살수가 쏟아져 나왔다.

이드는 그 앞에 광인멸혼류를 끌어모았다.

유령에게 평범한 공격은 잘 먹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의념이 담기면 얘기가 다르다.

광인멸혼류에 담긴 빛의 기운이 유령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고, 검은 녀석의 공격을 갈아 버렸다.

그게 끝이 아니다. 흩어지는 유령을 뚫고 금령원환지가 고스트 어벤져를 두드렸다. 금령원환지의 근본이 되는 금령단공은 본래 도가의 공부.

항마의 기운이 패시브로 깃들어 있는 공격에 검은 녀석이 기우뚱거린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지력이 두드린 자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이드가 말했다.

“고스트 어벤져인가?”

“역시 마법 지식이 깊으십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하면 힘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음도 아실 테지요.”

알려지기로 고스트 어벤져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보물 등급의 성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토벌대에 보물 등급의 성물이 없음은 확인이 끝난 상태. 설령 성물이 있다 해도 지금 당장 이드의 손에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퍼억!

그건 어디까지나 대륙에 무공이 알려지기 전까지의 이야기.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고스트 어벤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낯짝에 금빛 손 도장이 찍히자, 놈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피를 대신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놈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그 위로 금령단천과 금령참의 수공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던 고스트 어벤져의 얼굴을 완전히 짓뭉개 버린 것이다.

“그런……!”

“힘으로 상대하는 게 가능한 것 같군. 부관주가 익힌 흑마법이 아무래도 사이비인 모양이오.”

“…….”

하얀 이를 보이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는 이드다. 그 손 아래서 고스트 어벤져가 힘없이 일렁인다. 쉼 없이 두들겨 맞은 얼굴은 어깨 안으로 들어가서 이제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 모습은 해더웨이로 하여금 정말 자신이 익힌 흑마법이 사이비가 아닌가 의심하고 싶게 만들었다. 동시에 있지도 않은 몸에 한기가 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는 고스트 어벤져를 두드리는 저 손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할 것 같다. 해더웨이는 잠시 뒤로 물렸던 분신들을 움직여 고스트 어벤져를 지원했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여기 제물을 바칩니다!”

사이비라는 말이 뇌리에 남지만, 지금 기댈 수 있는 곳은 이뿐인 것을 어쩌겠나.

주문과 함께 머리통이 쩌억 갈라지며 회색 뇌가 미끄러져 나왔다. 그것도 서른 개나!

그 중심에 다시 음험한 기운이 기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빛살처럼 공간을 가른 일라이져가 기운에 박혀 들어 맑은 검명을 토했다.

우우우우웅!

빠지지직!

음험한 기운과 일라이져 사이에 요란한 불꽃이 튀었다.

가끔 잊어버려 문제지만, 일라이져는 누가 뭐래도 성검 출신이다. 그것도 보물보다 귀한 신물 등급의 성검.

당연히 악마와 관계된 흑마법과는 상극!

오랜만에 먹잇감을 만난 일라이져가 힘을 냈다. 힘차고 맑은 검명이 신성력으로 변해 상대편을 갈기갈기 쥐어뜯었다.

퍽!

그리고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음험한 기운이 폭발하며 사라졌다. 동시에 제물이 될 뻔한 서른 개의 회색 뇌도 신성력을 받아 파괴되었다.

뇌를 살려 두고 있던 마법이 신성력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

“명예 후작의 검이 성검이라고?”

“몰랐소? 난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일라이져가 섭섭하겠어.”

아연한 해더웨이의 말에 허공에 뜬 일라이져를 잡으며 이드가 나타났다.

그런 이드의 뒤로는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난 고스트 어벤져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구멍은 말할 것도 없이 이드가 던진 일라이져가 뚫어 놓은 것이다.

“그럼 이제 부관, 당신 뇌 구경도 좀 해 봅시다. 아까 언뜻 보니 이쯤 있는 것 같던데 말이오.”

이드의 손에서 일라이져가 거침없이 움직였다.

강력한 검강에 해더웨이의 커다란 머리통이 깎여 나갔다. 어차피 머리통 안에 든 것은 초인들의 뇌.

그들에겐 이대로 안식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기에 조심할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다. 어차피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인식할 사고 능력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에 반해 해더웨이는 공포에 떨었다.

이드의 검이 정확히 자신을 향해 차츰 범위를 좁혀 왔으니까.

제물도 사라지고, 초인 마법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급히 마법을 동원하지만 이드의 손짓 한 번에 힘없이 흩어진다.

“이게 당신이로군.”

그리고 잠시 후, 이드의 발아래 큼직한 살덩이가 드러났다. 그 살덩어리는 커다란 머리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만큼 크고, 붉었다. 그 중심에는 평범한 사이즈의 뇌가 거미줄 같은 혈관과 연결되어 살덩이 속에 파묻혀 있었다.

“보라고. 당신 뇌도 결국 초인의 뇌하고 다를 건 하나도 없지 않나.”

“추, 춥다.”

“……한심하군. 겨우 한다는 말이 그거야?”

이드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차라리 끔찍한 고통을 느끼거나 공포에 미쳤다면 희생당한 초인들에게 위안이라도 될 텐데. 고작 한다는 말이 ‘춥다’ 따위라니. 더 볼 것 없다 생각한 이드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우우우우-

희미한 발광과 꿈틀거리는 마나.

그리고 일라이져가 허공을 가른 자리에 남은 것은, 해더웨이의 뇌와 이어진 붉은 살덩이뿐.

정작 회색 뇌는 없다.

동시에 이드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빼 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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