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537화


973화

초인들에겐 어디 흑기사 정도로 그칠까. 생명의 은인, 그 이상일 것이다. 산 채로 연구 재료가 될 것을 구해 주는 거니까.

“그런데 지금 나서면 좀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등장 시점이 너무 절묘하잖아.”

발터부터 밀리고 밀려 조원들 바로 앞,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곳까지 다다른 상황이다.

“작위적이면 어때요? 오히려 상황이 극적일수록 더 고마워하겠죠.”

“세상 너무 순수하게 보는 거 아냐?”

진심이냐는 듯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누군가 자신을 깡패에게서 구해 주면 그 사람이 깡패와 짠 사기꾼이 아닌지 의심해야 하고, 반대로 누군가에게 위협당하는 여성을 구해 주기 전에도 한패가 아닌지 조심해야 하는 세상이다.

분명 초인들 중에서도 이드와 라미아의 등장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미아는 그게 뭐 어떠냐는 식으로 배짱을 부린다.

“그게 아니라, 의심해도 나올 게 없으니 당당한 거예요. 혹시라도 말이 나오면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몰아붙여도 되고.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오잖아요. 방금 전까지 이드가 부관주와 싸우고 있었다는 거.”

“그렇기는…… 하지?”

“그렇기는 하지, 가 아니라 당연한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가요. 발터 조장 목 떨어지기 전에.”

“알았어. 나간다고. 넌 어쩔 건데?”

“전 뒤에서 보조해야죠.”

적색 기사단의 일도 끝났으니 굳이 그쪽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라미아다. 그게 아니라도 커스 체이서 마법을 발동 중이라 이드 옆에 붙어 있는 편이 나았다.

본체를 찾아낸 즉시 쫓아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굳이 따로 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럼 하는 김에 잡혀 있는 초인들 챙기는 것도 맡길게.”

“알았어요.”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드의 모습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나 싶더니 피투성이가 된 석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런 이드가 가장 먼저 노린 것은 생포한 초인들 주변에 서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라미아가 쓰러진 초인들을 좀 쉽게 챙기도록 배려한 것이다.

“…….”

마침 위층에 있던 마법사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소리치려는 순간. 이드의 혈뇌지력이 그의 이마에 구멍을 뚫었다.

동시에 목표 지점에 도착한 이드가 마법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중앙, 쓰러진 초인들 위로 뛰어오르며 일라이져를 휘둘렀다.

사아아악!

화려한 검기도, 강력한 검강도 없었다. 그저 일라이져의 검신이 허공에 큰 원을 그렸을 뿐이다. 너무 깨끗해서 섬뜩할 정도로 완벽한 원을. 그렇게 이드의 신형이 멈춘 순간.

위층에 있던 마법사가 그를 발견했다. 마법사로서는 이드가 초인들 위에 있어 그저 초인인 줄 알았다.

그러다,

후두두둑!

주변에 서 있던 마법사들의 머리가 태풍에 떨어지는 사과처럼 흩날리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거기! 재료들 위에 적이다!”

앞서 어느 마법사가 외치지 못한 경고가 한발 늦게 터졌다.

털썩.

그제야 이마에 구멍이 뚫린 마법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마법사들은 ‘적’이란 소리와 함께 쓰러진 아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기운 전투의 흐름에 방심하고 있던 것이다.

그건 아래층에서 초인들을 상대하고 있던 적들 역시 마찬가지.

이드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짜릿함을 느끼며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히 그런 이드의 손에는 일라이져가 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인사 대신으로 받아 주라고.’

쩌저저적.

검영이 대붕의 날개처럼 석실을 가득 메울 듯 넓게 퍼지고, 그 아래로 번개처럼 뇌정화의 강편이 떨어진다.

“끄아아악!”

적들의 반응보다 한발 빠른 공격에 마법사, 기사, 인공 초인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쥐어짜는 비명과 함께 쓰러진 자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폭풍 같은 검초에도 정확히 요혈을 노렸음은 물론이고, 강편에 깃든 뇌정지기가 몸속에서 터지며 내부를 순식간에 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괴, 괴물 같은!”

한순간에 초인들을 공격하던 전력의 절반이 쓰러졌다.

“막아!”

“공격해!”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다. 이 전력으로 싸우지 않고 도망가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애초에 적이 놓아 줄지도 미지수.

그렇다면 결과는 둘째 치고, 일단 싸워야지 않겠는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소리쳤다. 어쩌면 감당 불가의 강자를 마주하고서 움츠러드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초인들을 버려! 저놈이 최우선이다! 삼검왕급이다!”

그중 누군가의 외침에 존 워스가 혀를 찼다.

“쯧, 삼검왕급이라. 하긴 명예 후작이라면 확실히 같은 급으로 쳐줄 수 있지.”

“…… 명예 후작이 와 준 건가?”

한순간도 존 워스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는 발터가 놀란다.

존 워스는 그런 발터의 반응을 무시하고 가까이 다가온 기사에게 투구를 받아 얼굴을 가린다. 발터에겐 정체를 드러내도 상관이 없었지만, 이드는 달랐으니까.

“전 기사들에게 알려라. 상대는 명예 후작이다. 무리를 상대한다 생각하고 검진을 짜서 상대해라. 따로 떨어져서는 답이 없다.”

“예, 알겠습니다.”

이드의 정체를 알게 된 기사가 입술을 깨물고는 짧게 대답했다. 믿기지 않는 화려한 무공에 강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그 정체가 명예 후작일 줄이야.

신나게 초인을 몰아붙이고 있던 기사로서는 심장이 조이는 듯한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기사가 앞으로 뛰쳐나가자, 존 워스가 이번엔 가까이 있던 마법사를 지목했다.

“이봐. 마법사 양반. 당장 날 치료하시오.”

“뭐요?”

“당장 내 부상을 치료하란 말이오!”

“다, 당신이 뭔데 내게 치료를 하라 말라 명령을 내리는 거요?”

“후후, 그럼 나 대신 당신이 저 명예 후작을 상대하든가.”

존 워스의 말에 힐끗 눈을 돌리는 마법사.

쉬리리릭. 쉬리리릭.

“마, 막을 수가 없어!”

“세상에 이런 무공이 어딨어!”

그곳에는 이드가 펼친 수라만마무의 강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기사들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당연히 그냥 실이 아니니, 강사에 감기는 순간 팔이든 몸통이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절단 났다.

기사들이 검기와 검강으로 대응해 보지만, 실처럼 얇고 흐느적거리는 강사 하나에 휘청휘청거리는 마치 모습이 연극인가 싶을 정도였다. 거기에 위층 마법사들의 공격도 그 너울거리는 실에 모조리 틀어막히고 있는 상태다. 저런 자를 도대체 뭐라고 하면 좋다는 말인가? 삼검왕급이라고? 미안하지만 눈앞에 있는 존 워스보다 더 무서워 보인다.

“로직! 로직은 어딨나! 당장 이자의 어깨를 치료해!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모조리 달라붙어!”

저런 자를 상대하라고? 절대 사양이다.

마법사는 자신이 아는 최고의 치료 마법사는 물론이고, 그 자신도 솔선해서 존 워스에게 달라붙어 큐어 마법을 사용했다.


“이거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군. 명예 후작은 부관주 쪽이 처리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연락해 볼까요?”

“아니, 당장은 상황 정리가 먼저지. 일단 잠시만 버티면, 철벽의 검왕이 명예 후작을 상대해 줄 테니.”

힐끗.

마법사의 시선이 아래에서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여 포션을 마시는 존 워스에게 머물렀다가, 이윽고 거북이처럼 웅크린 초인들을 향한다.

“우린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사냥감 정리부터 마무리하도록 하지.”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이드를 향해 마법을 쏟아내기 위해 준비하던 마법사의 절반이 그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그 마법을 발동하는 찰나.

공간 이동의 빛과 함께 라미아가 어느 초인이 들고 있는 방패 위에 나타났다.

“후, 후작 부인?”

“잠깐만 실례 좀 할게요.”

“예? 옙!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방패를 들고 있던 초인이 버럭 소리쳤다.

죽음을 각오하던 그의 눈에 강렬한 희망과 감사가 떠올라 있었다.

‘역시 내 말이 맞다니깐.

그 모습에 이드와 투닥거리던 것을 생각하던 라미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포스 쉴드 앤 리플렉션!”

이어 마법의 발동어가 낭랑한 목소리로 울리고, 라미아를 중심으로 두 가지 마법이 연계된 다중 마법진이 나타났다.

직후 마법사들의 마법이 마법진에 부딪히고, 그중 원소 계열의 마법들이 반사되고 나머지는 폭발했다.

“리플렉션이라고? 와이드 실드.”

그에 공격을 명령했던 마법사가 광역 보호 마법과 함께 지팡이를 내려찍자, 뻥 뚫렸던 벽에 다시 돌이 생겨났고, 그 위로 반사된 마법들이

폭발했다.

이로 인해 이드를 향하던 마법사들의 공격이 순간 끊어졌다. 이드는 짧은 미소를, 대치하던 기사들은 절망감에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결과는 예측과 다르게 나오지 않았다.

겨우겨우 마법에 기대어 버티고 있던 기사들에게 이드는 백화난무를 선물했다. 소드 팰러스 소속의 기사들에게 검후의 난화십이식만큼 적절한

선물이 없을 듯해서다.

그들의 잘못을 꾸짖고, 벌을 내리기엔 참으로 적절하지 않은가.

붉은 꽃잎이 석실을 가득 메웠다. 석실이 아니라 꽃밭이 된 듯, 진한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검향의 경지.

화산파의 매화검법과 함께 난화십이식이 절정에 이르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던 기사들 중 누구도 그 향을 맡은 기사는 없었다. 향에 취하기 전 붉은 검화에 숨과 함께 생각이 끊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사들뿐만은 아니었다. 남아 있던 인공 초인과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

“저것이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

“마, 마법도 아니고 무공으로 어떻게…………….”

그나마 존 워스를 치료하기 위해 모여 있던 마법사들은 마력을 모은 실드와 함께 존 워스의 철벽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들은 한 번도 저런 무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마법사들의 모습에 존 워스가 진한 미소를 보였다.

“틀렸소,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이 아니오.”

“아니라고?”

“난화십이식은 검후의 무공이오.”

본래 난화십이식도 이드가 검후에게 가르친 것이지만, 현재 난화십이식 하면 검후의 무공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

뿌드득.

말과 함께 어깨를 비트는 존 워스다. 뻐근하지만 통증은 없다. 다행히 마법사들의 치료가 잘 된 듯하다.

“이제부턴 내가 상대하도록 하지. 치료비 대신, 검후의 무공이 아닌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을 보여 주도록 하지.”

“…..”

치료비 따위 전혀 필요 없지만, 그런 걸 말할 시간은 없었다.

한쪽은 명예 후작이고, 한쪽은 존 워스, 삼검왕이다.

초강자들의 충돌이다.

“후, 후퇴. 모두 물러나!”

살기 위해서는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후작 부인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드에게 다가가는 존 워스 발터는 그 모습을 보다 입술을 물었다. 입술을 타고 주르륵 피가 흘렀다.

그가 언제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당장 돌아오라고 소리칠 수도 없다.

당장 존 워스가 달려들어도 상대할 힘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남자다.

발터는 돌아서 라미아에 감사했다.

“당연한 일인 걸요. 그보다 여러분들, 중앙에 잠시 공간을 좀 만들어 주겠어요?”

“넵!”

재빨리 움직이는 초인들이다. 발터가 있음에도 라미아의 말을 따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생명의 은인의 말인데, 어려운 일도 아니고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공간이 나자 라미아가 그 중앙에 마법으로 그물을 짜고, 생포된 초인들을 그 위로 이동시켰다.

“웃!”

“무겁지만 여러분들의 동료니까. 잘 들어 주세요.”

“맡겨 주십시오.”

“그럼 우리도 저 뒤로 좀 물러날까요? 아무래도 여긴 좀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