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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4화


491화

대장이 말한 시크릿룸은 지하에 있었다.

전형적이지만 그만큼 안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라는 뜻이었다. 입구도 나름대로 참신한 것이, 부엌의 아궁이 안이었다. 부엌을 사용 중일 때는 드나들 수 없게 되지만 대장의 말로는 그 정도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안가에 들이지 않는단다.

굴뚝 속에 숨어 있던 파이온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로는 잘 어울린다 싶기도 했다.

들어가기 쉬운 곳이라면 시크릿룸을 구경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아궁이 안이라니 일부러 옷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시크릿룸에는 파이온만 들어가게 되었다.

이드 일행은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여관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대외적으로는 이성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자작이만큼 무리하면서 밤에 불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드 님.”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용병길드 앞을 지날 때 일락이 기다렸다는 듯 불러 세웠다. 실제로 일락은 그들이 길드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용병거리에서 나가는 길은 길드 앞의 대로밖에 없기 때문에 분명히 지나갈 줄 알았단다.

거리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거친 용병들을 단속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옆에 같이 서 있는, 머리에 커다란 흉터를 가진 삼십 대의 대머리를 소개했다. 이드가 자근자근 밟아 주려던 용병들의 대장이라고 했다. 

“제리 용병대의 제리입니다.”

낮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고 보상을 전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이런 일은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거든요.”

일락은 낮과 같이 수완 좋게 웃어 보였다. 동시에 옆에 선 제리라는 사내를 슬쩍 바라보자, 그 시선을 받은 사내가 움푹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덤덤하다기보다는 간단한 사과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사과의 말과는 다르게 복잡했다. 특히 일리나를 확인하고서는 더욱 그랬다. 그의 얼굴에는 원망과 허탈함 등의 좋지 않은 감정들이 떠돌고 있었다. 다만 그 감정이 눈앞의 일리나와 이드들을 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엘프가 있는 일행을 경솔하게 건드린 부하들을 향한 것인 듯했다.

일락은 그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지만 일리나가 사과를 받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하나를 꺼내 에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것은 제리 용병대에서 귀인들께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한 사과의 표시입니다.”

일락은 일 처리처럼 사람 보는 눈도 정확했다. 이드나 일리나에게 건넸다면 쉽게 받지 않았을 돈이지만, 에단은 이드와 일리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냉큼 받아 챙겼다.

그리고 국경을 넘을 교통편도 제공받았다. 에단이 예전에 신청해 둔 일인데 이번 사건으로 빠르게 처리된 듯했다. 아나크렌 제국의 국경 영지를 향하는 상단에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두 사람과 헤어져 한산한 길을 걷던 에단이 주머니를 벌려 보며 낄낄거렸다.

[에이, 길에서 그렇게 웃으면 바본 줄 알아요. 그게 그렇게 좋아요?]

“아무렴, 좋지. 내가 낮에 사용한 액수의 두 배나 들었다고!”

에단은 흐흐흐 웃으며 들여다보던 주머니를 묶어 가슴에 넣고 쓰다듬었다. 사과의 의미라고 일락이 건네준 주머니를 이드는 일리나가 모욕을 받은 일이라며 일리나에게 넘겼고, 일리나는 다시 에단에게 넘긴 것이다.

주머니를 받아 든 에단은 그 속을 뒤적여 보고는 낮에 연락관에게 썼던 돈의 두 배나 된다며 좋아했다. 기사이면서도 상당히 세속적인 성격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낮에 에단이 사용한 돈을 따로 챙겨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에단이 주머니를 보며 늦어졌던 걸음을 빨리해서 이드 옆으로 붙어서며 물었다.

“마스터, 내일 영주성에 가는 일이야 이미 정하셨으니 그렇다 치고, 파이온이라는 놈은 그냥 저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말이야?

“산적이지 않습니까. 자작의 협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산적질에 자작이 잡아먹을 수 있도록 능력자까지 잡아 바쳤지요. 저는 마스터께서 곤란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자작을 처리하겠다고 하셔서, 그놈도 어떻게 처리하실 줄 알았습니다.”

에단은 자작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적이 없는 이드가 굳이 나서는 이유를 영웅심에서 찾았다. 초인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이유는 둘째고,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드의 나이와 정체를 생각하면 영웅심이라는 치기 어린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지만 에단은 그 말이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대륙을 거대한 전쟁의 늪에서 건져냈으며, 모든 기사들의 스승으로서 제국에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영웅을 영웅이라고 표현하는 데 유치할 이유가 없었다.

“음, 글쎄?”

“처리하실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푸흐, 내가 법관도 아닌데, 왜 사람을 내 맘대로 죽이겠어? 나는 그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두 여자의 남편으로 만족이야. 다른 포지션은 필요 없다고. 그렇죠? 일리나, 라미아.”

“호호. 전 당신이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좋아요.”

이드가 가볍게 윙크를 하며 일리나의 손을 잡자, 그녀가 이드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던 라미나는 ‘그럼, 그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간간히 보아 오던 모습에 묵직한 가슴의 주머니를 만지며 허전한 옆구리를 달랬다. 언제나 애정 표현이 자연스러운 이드와 일리나였다. 그 사이에 라미아가 끼어 이상해 보이기는 했다. 이드에게 물었을 때 그녀가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대답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아무리 높은 경지의 마법사라도 무생물로 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라미아는 어딜 봐도 생명체가 아니었다.

그저 셋 모두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모습에 이드의 수비 범위가 굉장하고 일리나의 마음이 넓다는 결론으로 에단의 마음에서 마무리 지어진 관계였다.

“큼, 하지만 하이탈 자작은 처리하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두 케이스의 차이 때문이야. 하이탈 자작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이지. 파이온의 말대로라면 벤이라는 산적은 잡아먹혔고, 너만 해도 지금 실시간으로 노려지고 있는 상황이지. 하지만 파이온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생각도 여유도 없잖아.”

“이미 끝난 일과 진행되고 있는 일의 차이인 겁니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렇지.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어. 일리나와 라미아,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노린 일이라면 언제 일어났던 일이라도 철저하게 처리할 거야. 그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아. 내 일이니까. 하지만 파이온은 다르지. 그는 우리와 크게 상관이 없어. 굳이 내가 나서서 피를 볼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 사람도 자작의 협박으로 움직이면서 마음고생 꽤나 한 것 같고 말이야.”

“그래도 산적질은 그렇게 넘어갈 가벼운 일이 아닌데요.”

그레센의 산적은 악독하다. 돈이 될 만한 것을 빼앗는 것은 기본이고, 살인과 강간은 옵션이다. 파이온은 어떠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투가 있었다면 죽는 사람이 나왔을 것이고 돈은 직접 빼앗았다고 말했다. 그레센에서 산적과 해적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난 그냥 넘어가자고 한 적 없는데? 나에게 그를 심판할 권한이 없다고 했을 뿐이야. 원래는 일이 끝나면 용병길드에라도 넘겨야 하나 생각했지. 여기저기서 전해 들었던 초인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면 진짜 사형을 시킬까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럼 지금은 길드에 넘길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씨익.

에단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노골적인 미소가 불편했던 에단이 슬쩍 움츠리며 물었다.

“그렇게 보시면 징그러운데요, 마스터.”

“…..대장이 왜 그렇게 구박을 하는지 알겠다.”

이드는 에단의 말에 순간 말을 잃었다. 일리나와 라미아가 작게 낄낄거렸다. 이대로 그냥 뒀다가는 에단 때문에 대장 꼴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에 날을 한번 잡아야 할까?’

이드가 에단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대장이 파이온을 스카우트할 생각인 모양이야. 자기 말로는 말을 지독하게 듣지 않지만 제법 유능했던 부하 놈이 튀어 버려서 새로 손발 맞는 놈을 키워 볼 생각이라던데?”

그놈이 바로 너야, 너. 이드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뭐… 대장이 잘 알아서 하겠네요. 커험.”

에단은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에 더 이상의 질문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 역시 수년간 전장에서 쌓은 정은 가볍지 않은 듯했다.


여관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주인이 큰일 났다면서 달려 나왔다.

영주성에서 연락관이 찾아와 방금 전까지 기다리다 돌아갔다는 것이다. 앞서 찾아왔던 연락관과는 다른 사람이었다면서, 연락관과 함께 성에 간 것이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중간에 사정이 있었다고 대답하자, 주인이 눈에 익은 주머니를 건네며 연락관이 떠날 때 이 주머니를 전하고 내일은 꼭 여관에 있을 것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이건 제 주머니군요. 낮에 연락관에게 찔러준 겁니다.”

방으로 올라와 주머니와 내용물을 살핀 에단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여관에서 얌전히 기다리라는 듯인 것 같네요.]

라미아가 주머니가 전해 주는 뜻을 해석하자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줬던 돈을 돌려준다는 것은 더 이상 허튼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밖의 기사들도 같은 생각으로 모여 있는 것 같아요.”

쫑긋쫑긋.

말을 하는 일리나의 귀 끝이 살짝살짝 떨렸다.

“밖에 기사들이 있습니까?”

에단이 일리나의 말에 놀란 표정으로 빼꼼히 창문을 열어 창밖의 동태를 살폈다.

“요소요소에 잘 숨어 있습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모두 상당한 수준의 기사인 모양입니다.”

말을 하는 에단의 눈 안에서 별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간파의 눈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널 꼭 잡아먹고 싶은 모양이다. 크큭.”

“아. 하. 하. 농담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서 무서운데요, 마스터.”

이드의 농담을 받는 에단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고맙잖아. 저렇게 지켜 주니, 최소한 강도나 도둑은 없을 거 아냐. 편하게 쉬자고.”

과연 편하게 쉴 수 있을까.

다른 때라면 몰라도 포식자가 자신을 노리는 지금만은 에단도 크게 자신이 없었다.


“연락관은 출발했느냐?”

“예. 성에 돌아올 시간까지 일러 두었습니다.”

하이탈 자작은 집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어쩌고 있더냐?”

“씻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언제나 명령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하이탈 자작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덜덜 떨어 대던 티티의 모습을 떠올리며 즐겁게 웃었다.

“좋군, 좋아. 모두에게 전해 두어라. 오늘은 제법 바쁘겠다고. 하하하.”


전날 밤의 분위기와 다르게 연락관은 생각보다 느긋하게 여관에 나타났다.

하지만 느긋한 시간과 다르게 그의 얼굴과 표정은 딱딱했다. 그는 말없이 이드들을 재촉하여 여관을 나섰다.

거리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보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며칠간 이어지는 모습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제법 나와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자작님께 안내하겠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영주성에 도착한 일행들을 가장 앞서 맞이한 것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한 인상의 집사였다. 그는 젊은 자작 부인을 병으로 잃은 자작성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작이 공공연히 가장 믿고 있는 수하라고 언급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행들을 보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말했다.

그가 일행들을 안내한 곳은 영주성의 중앙을 지나 성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내성의 중앙 정원 앞이었다.

정원의 중심에는 상당히 넓은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앉은 남자가 일행들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눈을 떼지 않고 그들을 부담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집사와 마찬가지로 석상처럼 딱딱하던 그의 얼굴은 천천히 일행들이 다가갈수록 조금씩 풀리며 느긋한 미소를 띤 얼굴로 바뀌어 갔다.

“주인님, 호출하신 자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인사드리도록 하십시오. 풍요롭고 부유한 하이탈의 지배자이신 래쉬 하이탈 자작님이십니다.”

“풍요로운 하이탈의 지배자이신 하이탈 자작님께 인사드립니다.”

‘과연………… 이자가!’

이드는 뱀처럼 번들거리는 자작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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