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41화
977화
화르르륵.
백염. 부서진 뇌를 삼매진화의 불길로 재도 남기지 않고 태우고 있으니, 라미아가 다가온다.
“확인 사살?”
“그렇지. 뇌 둥둥 상태로도 잘만 살아 있었으니,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중간에 날치기당한 것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뇌만 남은 상태에서 재생뿐 아니라 전력까지 충전해 온 인간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신중한 건 좋은 거지만,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부관주가 죽은 건 확실하니까요.’
“뭐,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미아의 말이니 확실할 것이다. 거기에 이제 태워야 할 부관주의 흔적도 더는 없다. 뜻하지 않게 완벽한 화장식이 되어 버렸지 않은가.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에요. 바이트 타블렛도 물어 오고.”
“그건 아니지. 우리가 바이트 타블렛을 얻은 건 미끼가 좋았다기보다 낚시꾼 능력이 강태공급이었던 거야.”
“이드요?”
“핫,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나 말고 라미아 말이야. 누가 공간 이동 마법을 외부에서 조작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그럴 가능성에 대해 상상이라도 했다면, 과연 부관주가 바이트 타블렛을 가지고 공간 이동을 시도했을까? 아니, 애초에 탑주가 부관주에게 바이트 타블렛을 맡기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드에게 빼앗겼던 바이트 타블렛을 돌려받기 위해서 얼마나 자존심 구겨 가며 손해를 봤는데. 그런 위험을 또 감수할까.
아마 이번에 다시 바이트 타블렛을 빼앗긴 걸 알게 되면 이미 죽어 지옥에 떨어진 부관주 멱살을 잡아 끄집어내서라도 다시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우후후. 제가 좀 대단하긴 하죠.”
이드의 칭찬에 콧대가 하늘로 향하는 라미아다. 마치 칭찬받은 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에 한발 물러서 있던 초인들이 급히 고개를 바닥으로 향했다. 딱딱한 가면에, 무서운 마법을 사용하는 후작 부인에게 저런 사랑스러운 모습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나. 무엇보다 후작 부인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주변 시선에 상관하지 않는 모습도 신선했다.
보통 고위 귀족쯤 되면 주변 시선에 민감하기 마련이니까.
더욱이 이드와 라미아의 경우, 평민에서 고위 귀족이 된 희귀 케이스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 오히려 급격한 변화에 더욱 조심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러나 초인들은 그 모습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역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는 다르다는 거겠지. 후작 부인도 마찬가지시고.’
‘무엇보다 일단 실력이 뛰어나잖아. 실력이 있으면 뭘 해도 되지.’
‘그나저나 두 분 다 보기 좋으시네.’
한없이 긍정적인, 호감 어린 시선, 그 이유가 두 사람이 ‘생명의 은인’이란 점 때문인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쭐한 라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한곳에 시선을 향한 이드가 혀를 찼다.
“저긴 처리가 늦네.”
다름 아닌 존 워스와 그 주변에 선 초인들이었다.
분명 아까 이드를 대신해서 존 워스를 처리하겠다고 했는데. 오르내리는 존 워스의 가슴을 봐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이드가 부관주를 너무 순식간에 처리해 버려서 그렇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미 걸레짝이 된 인간 숨 하나 끊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가 있나? 게다가 저렇게 몰려 있을 까닭은 또 뭐야.”
존 워스는 분명 이드에게 당하고, 마법에 당해서 작은 단검 하나만 밀어 넣어도 죽일 수 있을 만큼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였는데 말이다. 라미아를 따라붙은 초인 중 하나가 둘의 대화를 듣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원 중 정신계 초인이 있어서 죽이기 전에 정보를 빼내려 했습니다. 미처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랬군요. 부관주 때문에 미리 말할 기회가 없었으니 그건 괜찮습니다. 확실히 존 워스 정도의 인물이 가진 정보라면 중요하겠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쉽긴 하네요. 부관주도 처리했고, 그런 작업이 있으면 늦게라도 말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요. 획득한 정보에 대한 공유는 당연히 이뤄지는 거겠지요?”
“다, 당연합니다. 제 명예를 걸고 모든 정보는 숨김없이 전달될 것입니다.”
혹시 정보를 빼돌리려 한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에 급히 손을 저어 대는 초인 기사.
“경의 이름을 알고 싶군요.”
“밀튼·
“…..죄송합니다. 토벌대 오 조 소속 상급 초인 기사 시만드 포른입니다.”
“좋아요. 포른 경. 그럼 여태까지 얻은 정보가 있는지 알고 싶은데 말입니다. 물론 존 워스를 통해 얻어 낼 정보도 중요하지만, 내내 그거 하나만 바라보고 있기에 이곳이 안전한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수많은 마법사에, 이 조에 소속된 기사. 그리고 존 워스에, 방금 부관주까지 죽었다.
아무리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반응만 보인 정신의 관이라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호위로 나선 기사들은 이드의 말을 즉시 이해했다.
“즉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른은 짧게 외치고는 당장 존 워스를 둘러싼 초인들을 향해 달렸다. 물론 그 전에 또 다른 기사를 발터에게 보내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이드의 우려에 대해서는 발터도 알아야 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의 조장은 발터였으니까.
“가능할까요? 정보 추출.”
그 모습을 보던 라미아가 속삭인다.
그 역시 포른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생각했던 부분이었기에 이드는 즉시 답했다.
고개를 흔든 것.
“힘들지. 아무리 저 꼴이 되었어도 검왕은 검왕. 그 정신 방벽이 약할 리가 있나. 무엇보다 그렇게 싫어하던 초인들이잖아. 나라면 무슨 고집을 부려서라도 절대 저항할 것 같은데?”
무엇보다 초인들이 아직 존 워스에게 들러붙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말하는 걸 하나하나 받아쓰는 것도 아니고, 머리에 든 정보를 꺼내면 끝나는 일인데.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가 없다.
“그보다 아공간에 시체 들어갈 자리 하나 만들어 둬.’
“챙겨 가게요?”
“그래야지. 다름 아닌 존 워스의 시체잖아. 이번 사건에 존 워스의 죽음까지 더해지면 초인파와 소드 팰러스 간의 전쟁은 확정이라고.”
그저 틀어지는 정도를 넘어선, 전쟁의 시작. 그 싸움에 불을 붙이기에 존 워스의 시체만 한 게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존 워스를 저렇게 만든 건 이드잖아요.”
“아니지. 싸움이 붙은 건 존 워스와 초인파지. 난 그저 초인파를 구하기 위해 정체불명의 인물과 싸웠던 거고, 봐, 아직 얼굴 안 보이잖아.”
“……”
이 억지 변명을 받아줘, 말아? 라미아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은 결국 무시였다. 어차피 이 변명으로 납득시켜야 할 건 자신이 아니라 소드 팰러스였으니까.
‘이번 토벌이 끝나면 타국으로 나가든, 수도에 있든・・・・・・ 어떤 식으로든 당분간 소드 팰러스 근처는 피해야겠지?”
이후의 준비에 대해 이드 몰래 계획하고 있을 때, 호위에게 이야기를 들은 발터가 다가왔다.
엉망이었던 모습은 어느새 제법 깔끔하게 변해 있었다. 피딱지도 보이지 않고, 산발이던 머리도 정리되어 있다.
“명예 후작님. 후작 부인.”
“발터 조장님. 치료는 끝나신 겁니까?”
“당장 싸우는 데 문제없을 정도는 됩니다. 어차피 적진에서 완벽한 치료를 바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큰 불편은 없어 보이시는 걸 보면, 초인 기사의 치료 능력이 신관 못지않게 대단한 모양입니다.”
“이게 다 두 분덕 아니겠습니까.”
“같은 토벌대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이후 오 조의 계획은 있습니까?”
이드의 말에 발터가 무거운 한숨을 쉰다.
처음엔 의도적으로 일 조, 삼 조와 따로 떨어졌던 오 조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다.
설마 자신들의 정보가 이 조를 통해 마탑에 전달되고, 존 워스까지 붙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 예상치 못했던 공격으로 인해 오 조의 피해는 상당하다 못해 엄청나다. 조원만 절반이 넘게 죽었고, 남은 조원들 중에도 중상자가 꽤 있다.
최선을 다해 치료 중이긴 하지만, 당장 거동이 가능할지언정 싸울 수는 없는 초인들도 적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우선 현재 상황에서는 떨어졌던 일, 삼 조와 합류하는 것이 최선입니다만…… 두 분께서 이곳에 있으신 걸 보면 그것도 어려운 것이 아닐지…….”
“아,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조원들과 합류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라미아에게 방법이 있는 겁니다. 아무래도 황녀께서 조원으로 있으시다 보니…….”
“아, 과연 그런 점 때문이라면 이해했습니다.”
황녀를 언급한 이드의 말에 곧바로 납득한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에 대한 보호가 최우선 임무인 것을 생각하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모종의 장치를 해 두는 것은 필수일 테니까.
“그렇다면 저희 오 조도 두 분과 함께 본 조와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말입니다.”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요청이 아닌 허락.
아무래도 이후 오 조와 초인들을 부리는 일이 쉬워질 것 같다고 느끼는 이드다.
대화가 끝난 직후 발터는 명령을 내려 초인들을 정비시켰다. 초인들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 역시 이드와 발터 간에 오가는 이야기 전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도중, 포른이 다가왔다.
굳은 표정에 무거운 발걸음. 이드는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정보 추출에 실패했습니다.”
끄덕끄덕.
아니나 다를까. 이드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 중인 기사의 말로는 조금 더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만.”
예산과 시간. 맡겨진 일이 틀어졌을 경우 나오는 레퍼토리 중 넘버원이 아닐까.
그러나 반전은 이 변명이 전혀 쓸데없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충분한 예산과 시간이 있으면 실제로 대부분의 일은 해결이 되니까. 문제는 항상 예산과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 부족한 것은 시간이다.
“불가. 시간은 더 줄 수 없습니다.”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굳이 시간을 내려고 하면 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앞선 전투에서 이미 이드는 존 워스에게 정보를 얻어 내길 포기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무엇보다 꼭 존 워스가 아니라도, 남아 있는 검왕이 둘이나 있지 않은가.
존 워스에 대한 아쉬움은 남은 두 사람을 통해 채우면 된다.
“포른 경이 가서 존 워스의 숨을 끊고 그 시체를 가져오세요.”
“충!”
이드의 명령에 포른이 가슴을 두드리고 돌아섰다. 굳이 발터에게 허락을 받으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발터와 이드와 나눈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치가 빠른 기사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포른이 존 워스 앞에 도착하자 주변에 있던 초인들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 물러섰다. 직후 포른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전투 도끼의 예리한 쌍날이 번쩍거렸다.
초인기 때문인지, 평범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중병을 사용하는 포른이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힌 기사단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무기.
“흡!”
비록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 해도 검왕의 목을 벤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리는 듯, 짧은 기합 소리로 마음을 다잡은 포른이 도끼를 휘둘렀다. 아우우~!
쿠르르릉!
그와 동시였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폭음이 울리며, 바닥을 타고 진동이 전해진 것은.
그리고,
터텅!
“크흡! 이게 무슨.
갑자기 존 워스를 둘러싸고 나타난 은색 마나에, 힘껏 휘두른 도끼가 막혀 그 반탄력에 포른이 이를 악문 것은 말이다. 그리고,
우웅!
참으로 오랜만에 차원의 인이 반응한 것도 말이다.
“메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