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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42화


978화

메르시오.

이드가 계속 찾고 있던 존재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이런 타이밍에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웅웅!

하지만 차원의 인은 마치 방금 말한 그가 맞는다는 듯 점점 더 강하게 진동했다.

선명한 그 느낌에 이드의 눈빛이 깊어졌다.

“메르시오가 온다.”

아우우우~

순간 다시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 이드의 말에 답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소리가 좀 더 커진 것을 보아 분명히 아까보다 좀 더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하울링을 하며 뜨거운 열기를 내뱉었기 때문인지, 메르시오의 주둥이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그의 눈은 당장 눈앞의 검은 땅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이드를 향하고 있었다.

차원의 인이 메르시오의 존재를 안 것처럼, 메르시오 역시 차원의 인을 감지한 것.

“그르르릉!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멋진 인사를 나눠 보자고!”

분명 인간의 언어임에도 맹수의 울부짖음처럼 들리는 거친 목소리. 그와 함께 메르시오가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전신에서 뿜어진 은빛 마나가 더욱 강렬해지며, 그의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과자처럼 부숴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가르는 은빛 유성 같았다.

그 속에서 울려 오는 효후는 마치 전사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메르시오가 누굽니까?”

때맞춰 들린 울음소리에 흠칫한 발터는 경계심을 가지는 한편 의문을 표했지만,

“메르시오요? 우리가 아는 그 메르시오?”

곧 이어진 라미아의 황망한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존 워스의 정체를 알렸을 때의 밋밋한 반응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그 덕에 더욱 궁금해진 발터는 이어질 이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굳이 메르시오에 대해 하나하나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럼 그 메르시오 말고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메르시오가 있냐?”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딨냐는 듯한 이드의 말투에 라미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을 보아 그녀도 이곳에서 메르시오가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

“없죠. 그럼 저 보호막도? 아니, 그런데 메르시오가 존 워스를 왜 보호하는 건데요?”

돌연 머릿속에서 의문들이 폭발하는 라미아였다.

존 워스를 보호하는 이유도 궁금하거니와, 마법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메르시오가 어떻게 존 워스에게 보호막을 만들어 주는 게 가능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존 워스의 존재와 위치를 알았을까? 어떻게 촉매나 중계도 없이 보호막을 만들었을까?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왜 존 워스를?

무엇보다 그녀가 알고 있는 메르시오는 마법 쪽보다는 육체파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정밀한 작업에는 재주가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설마 수십 년간 마법 공부라도 한 것일까?

순간 두꺼운 안경을 쓴 채 마법 책을 펼쳐 든 근육질의 웨어울프를 떠올린 라미아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혼돈의 파편이 완벽히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고는 해도,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그런 호기심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다.

“그럼, 존 워스는 어떡해요?”

포른이 그의 목을 치려다 밀려난 상태가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포른을 포함한 초인들이 갑자기 생겨난 보호막에 잠시 당황하더니, 곧 그것을 향해 반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은색 보호막은 단단했다. 깨지긴커녕 작은 생채기도 생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드가 급히 소리쳤다.

“포른 경과 조원들은 뒤로 물러나시오!”

“예?”

갑작스러운 외침에 멍하니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다.

쩌억!

갑자기 은색 보호막에서 커다란 늑대 주둥이가 튀어나와 초인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그 속에 든 이빨이 어지간한 단도보다 크고 날카로워 보였다. 

“으헉! 이게 뭐야!”

난데없이 등장한 주둥이가 사방을 휘젓자 초인들이 급히 몸을 피했다.

하지만 정신계 능력을 가진 대신 신체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초인은 회피가 좀 더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송곳니가 번뜩였다. 당당한 초인 기사가 되어 설마 늑대 이빨에 씹혀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던 그가 비명과 함께 질끈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으아아…… 악?”

빠앙!

고막이 터질 듯한 소리와 함께 늑대 주둥이의 앞부분이 통째로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포른이 어리둥절해 있는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명예 후작님이시다. 우린 물러난다.”

그 말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심 ‘과연 명예 후작님! 두 번이나 살려 주시다니, 그 은혜가 크다!’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정작 입으로 나오는 말은 형편없다. 

“빠, 빨리 좀 옮겨 주십시오!”

스스로 말해 놓고도 쪽팔린다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붉어지고, 시야가 점멸했다.

“어? 눈이 왜 이러지?”

그리고 그의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한 괴성을 마지막으로 들은 뒤 말이다.

“그아아아!”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한 초인으로 인해 당황한 포른이 그를 잡았다.

“이봐! 왜 이래! 정신 차려!”

빨리 후퇴하자던 사람이 지금은 오히려 미친 듯 존 워스에게 달려가려 했다. 심지어 앞을 막아서는 포른을 향해 주먹을 들었다. 어차피 육체 강화 계열의 초인기를 가진 포른에게는 통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포른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주먹 때문이 아니었다.

날뛰는 초인의 어깨 너머로, 몸을 피하던 초인들이 갑자기 역방향으로 달려 나가며 괴성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 멈춰!”

포른이 소리쳤다.

명령 불복종은 둘째 치고라도, 저들로는 은색 보호막을 상대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이나 다를 바 없다.

봐라. 부서진 주둥이를 대신하는 듯, 어느새 보호막에서 새로운 늑대 대가리들이 솟아올라 곧 떨어질 감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둥이를 벌리고 있지 않은가.

포른이 급히 그들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들은 내가 해결할 테니, 포른 경은 그와 함께 뒤로 물러나세요.”

이드였다.

동시에 포른에게 잡힌 채 날뛰던 초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그런 그를 황급히 안아 드는 포른의 눈에, 미친 소처럼 달려가던 조원들이 축 늘어져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받아서 제압해 두도록!”

격공점혈로 혼혈을 찍은 뒤, 허공에 띄운 초인들을 도열해 있던 또 다른 초인들에게 던진 이드의 손가락이 곧 빠르게 움직였다.

퓨퓨퓨퓨퓩!

퍼퍼퍼퍼퍽!

혈뇌천강지가 흉하게 입을 벌린 늑대 대가리를 터트렸다.

이어 적색 검강이 은색 보호막을 가르자 도끼날에도 생채기 하나 없던 보호막이 갈라지며, 그 아래 있던 존 워스가 나타났다. 피떡이 된 모습은 여전했지만, 분명 달라진 점이 있었다.

“………….”

피를 흘리던 입으로는 희미한 비웃음을 흘렸고, 엉망진창으로 부어 터진 눈꺼풀 아래로는 황금빛 안광을 번뜩였다.

무엇보다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거기에, 죽어도 쓰지 않을 것 같던 초인력까지 온몸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 순간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이 정도면 확신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말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그에게 굳이 메르시오를 아느냐고 물어보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답할 것 같지도 않고.”

말과 함께 이드의 검이 허공에 붉은 십자를 그렸고,

크와앙!

직후 둘로 갈라진 보호막이 늑대로 변신해 달려들었다. 그 목표는 놀랍게도 이드가 아니라 붉은 십자였다.

쩌억.

찰나에 머리부터 꼬리까지 늑대의 몸이 갈라졌다.

마치 늑대가 자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후발선제의 극치.

이런 신기를 보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검법만 뛰어나서는 안 된다.

움직이기 이전에 보고 느낄 줄 알아야 했다.

시작이 바로 기감이고, 무극신기는 그런 기감을 극한까지 끌어낼 수 있는 공능이 있었다.

메르시오 본인도 아니고, 원거리에서 조작하는 마나의 흐름을 읽어 내는 것쯤은 이드에게 어항에 든 물고기를 살피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늑대를 가른 붉은 십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존 워스를 베어 갔다.

금세 새로 생긴 보호막이 그걸 막으려 했지만, 이드의 기술 앞에선 그마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쩌억!

우선 허리가 먼저 잘렸다. 이어 목과 심장을 단숨에 베어 버릴 검강이 갈비뼈를 잘라 낸 순간.

끼기기기긱!

붉은 검강은 무언가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그리고 강력한 열기와 살이 타는 듯한 노린내가 나더니, 피에 물든 웨어울프의 손이 돌연 존 워스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까지 존 워스는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고통에 온몸을 떨어 댔다.

푸스스스-

뒤이어 존 워스의 피를 빨아들인 바닥이 모래처럼 무너졌다.

덜렁거리던 존 워스의 하체가 뻥 뚫린 구멍으로 굴러떨어지고,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인형이 솟아올랐다.

날카롭게 솟은 귀와 비단처럼 빛나는 은색 털을 가진 존재.

바로 메르시오였다.

이드는 천천히 구멍 밖으로 올라오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일리나도 그렇지만, 90년이 지났음에도 메르시오는 기억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하긴, 나이를 먹었어도 저 늑대 얼굴에서 정확한 나이를 읽어 낼 자신은 없는 이드였다.

무엇보다 그는 생물로서의 웨어울프 이전에 혼돈의 파편이니, 나이를 먹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시간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물질계의 존재였다면 애초에 까마득한 세월 동안 봉인되어 있지도 못했을 테지.

어찌 되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90년 세월 동안 메르시오가 노망만 들지 않았다면, 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게다가 차원의 인을 완성하기 위해 꼭 받아 내야 할 것도 있었다.

물론 그 둘 중 어느 쪽도 이드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 주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자, 어떻게 구워삶아야 잘 삶았다고 소문이 나려나.’

이드는 내심 입맛을 다셨다.

필요에 의해 혼돈의 파편, 그 중에서도 카린과 메르시오를 찾기 위해 뛰어다니긴 했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구워삶을 방법이 걱정인 이드였다.

사실 이드는 혼돈의 파편과 개인적으로 깊은 원한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비록 서로 적이 되어 싸우고, 덕분에 일리나를 오랫동안 외롭게 만들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외의 직접적인 원한은 없는 관계였다.

무엇보다 차원의 인을 통해 혼돈의 파편이란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살의가 끓어오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드가 알게 된 혼돈의 파편은, 쉽게 말해 세계의 변혁이다. 좋은 식으로든 나쁜 식으로든 정체된 세상이 변하도록 만드는 촉매가 바로 혼돈의 파편인 것이다.

때론 그 촉매가 너무 강해서 세상이 망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과 함께 혼돈의 파편을 안배한 신의 뜻이라면, 신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야 하는데. 이 경우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능력이 없고, 심지어 나가서 갈 곳조차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메르시오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내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엔 혼돈의 파편이 죽음으로 몰아간 생명이

너무 많다.

대륙 시간으로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이드에겐 십 년 전의 일일 뿐이었다. 게다가 굳이 과거의 일을 들먹이지 않아도, 현재 메르시오와 혼돈의

파편이 딱히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디 정상적인 놈이 산 사람의 살을 뜯어 먹는 짓을 할까. 개인적인 원한은 없더라도, 분노하고 투지를 불태우기엔 충분한 이유다.

이리저리 재어 보던 이드는 결국 포기한 듯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개 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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