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43화
979화
수십 년 만의 재회 인사치고는 실로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 대가리라니.
이드가 아니면 누가 감히 메르시오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할까.
이 자리에 그를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당장 이드의 입을 틀어막겠다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백 년 전 대륙을 정복하고 절대 패권을 쥐기 위해 대륙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초 위험인물 중 하나가 바로 그였으니까. 거기에 그 개인이 가진 힘은 또 얼마나 무시무시했던가!
“으드득. 미친 인간 놈이 뭐라는 거냐.”
“개 대가리를 보고 개 대가리라고 하는데, 뭐가 문제야? 정체성에 혼란이라도 오냐? 모를까 해서 말해 준다만, 늑대도 개과야.”
하지만 메르시오가 아무리 대단해 봤자, 이드에겐 말 그대로 개 대가리일 뿐이었다.
저 초 위험인물의 계획을 파괴하고, 그와의 전투에서도 이긴 사람이 바로 이드다. 이미 한 번 이겼던 상대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장 메르시오가 뿜어내는, 일반인을 질식사시키고도 남을 만한 숨 막히는 기세도 이드에겐 산들바람만큼도 영향이 없다.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뾰족한 귀가 앞을 향해 기울어지는 메르시오다. 경계와 함께 공격 의사를 나타내는, 개 사이의 신호. 본인은 부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개과다.
이드가 그 모습에 히죽 웃자, 메르시오가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백 년이나 걸려서야 겨우 집을 찾아온 차원의 미아 놈이. 건방진 혓바닥은 여전하구나. 고생을 덜 했나 보군.”
잔뜩 비꼬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드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런데 내가 미아면, 너흰 차원의 찌꺼기나 하수구쯤 되는 거냐?”
“감히 우리를 두고 그딴 소리를 하는 놈은 네 녀석뿐이다.”
“아냐? 시궁쥐처럼 이리저리 숨어 다니는 꼴이 하수구하고 딱 어울리는데. 그거 다 드래곤들과의 일 때문 아니냐?”
“그런 너절한 도발이 통할・・・・・・ 그렇군. 너, 아직 모르는군. 크후후후.
이드는 흉악한 이빨을 번뜩이며 득의양양하게 웃는 메르시오에 내심 혀를 찼다.
‘쭛, 안 통하네.’
슬쩍 도발하는 척하며 정보를 캐 볼 요량이었는데, 그걸 알아차린 것이다. 늑대처럼 생겨서 눈치는 여우 뺨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여기서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웃기는? 피차 혓바닥 긴 건 마찬가진데. 그놈 살리려는 꿍꿍이를 모를 줄 알아?”
아닌 게 아니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의 존 워스는 오히려 메르시오의 손에서 회복되는 중이다. 가슴을 관통한 손은 어느새 등을 받치고 있고, 허리가 끊어지며 폭포수처럼 쏟아져야 할 피와 내장은 무언가에 막혀 있다.
뿐인가. 죽어야 할 혈관과 근육들은 오히려 생기를 주입받아 꿈틀거리는 게 눈에 보일 지경.
“그놈이 설마 천하의 혼돈의 파편이 모시러 올 정도로 대단한 놈이었는지는 몰랐네. 그런데 어쩌나? 나도 내 사냥감을 그냥 내줄 생각은 없는데.”
말과 함께 이드의 주먹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리곤 갑자기 검은 권형이 존 워스를 노리고 포탄처럼 쏘아졌다.
현묘한 묘수도 없이 그저 빠르고 강력할 뿐인 일격에 가볍게 손톱을 휘둘러 막아 낸 메르시오.
그의 손톱에 찍힌 권형이 마치 물풍선처럼 터지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떠텅!
“네 생각 따위 무슨 의미가 있지.”
“글쎄, 아마 있을걸?”
푸슉-
힐끗 하는 이드의 눈짓과 동시에 막아 놓은 존 워스의 허리 절단면과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 메르시오의 은색 털을 붉게 물들였다.
“・・・・・・ 설마, 방금 네놈의 그 멍청한 주먹질 때문에?”
메르시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건 내 주먹질이 아니라, 보는 눈 없는 네 머리겠지.”
이드는 멍청하다는 말에 기분이 나쁜 듯 삐딱하게 섰다.
보기엔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기맥을 끊어 내는 파옥수의 원리를 세심히 담은 일격이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하고 멍청하다고 말한 것은 기분 나빴지만, 결국 메르시오가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드의 기분은 조금 묘했다.
“어때, 이 정도면 내 생각이 제법 중요해 보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이드의 말에, 결과를 깔끔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메르시오다.
다시 존 워스의 출혈을 잡은 그는, 이젠 대놓고 존 워스의 하체를 땅속에서 끌어내 허리의 절단면에 가져다 붙였다.
“그럼 알고 있는 걸 꺼내 봐. 말하는 동안은 치료할 시간을 주지.”
그렇다고 놓아 준다는 건 아니지만, 이라고 이드가 속으로 얌체 같은 말을 할 때였다.
“필요 없다. 치료 시간 정도는 내가 직접 만들도록 하지.”
“무슨 개소리야?”
의외의 발언에 이드가 기감을 돋웠다. 메르시오 정도 되는 인물이, 아무 준비 없이 헛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해죽거리고 있는 저 늑대 주둥이가 결정적인 증거다.
자신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무언가 처지를 바꿀 만한 확실한 방법이 없고서야 저렇게 웃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드가 보는 중에 눈이 반달이 되도록 웃은 메르시오가 갑자기 목을 길게 빼고 소리를 냈다.
“아우우우우~”
멀리서 들을 때와 달리, 피부를 두드릴 듯 생생하고 강렬한 늑대 울음소리.
이드는 그 소리가 단순한 늑대의 하울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뜬금없이 발정기가 온 것도 아니고, 이유 없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진 않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도 울음소리에 진하게 담긴 메르시오 특유의 마나가 신경에 거슬렸다. 사자후 같은 음공은 아니었지만, 아무 의미 없이 마나를 소리에 담아 뿌려 대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런 이드의 의심은 정확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정신 차려요. 모두!”
당황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리고, 한데 모여 있던 오조 초인들이 돌연 초인력을 줄줄 흘리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보호막에 보호받던 존 워스를 앞에 두고 미쳐 버린 초인들처럼 말이다. 문제는 지금 그 증상을 모든 초인들이 보이고 있다는 것.
심지어 아까는 멀쩡하던 포른도, 지금은 도끼를 든 채 메르시오를 노려보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태였다. 이드는 당혹스러움을 숨기는 데 실패했다.
메르시오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지금 상황이 그로 인한 것이란 것은 알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 상황이 메르시오가 초인들을 조종한 것이라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공격하게 해야 할 텐데, 초인들은 한결같이 메르시오만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설마 발터 조장까지?”
혹시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이드.
다행히 발터는 다른 초인처럼 이상 행동을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은 듯 인상을 쓴 얼굴에 진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발터가 그 상태로 급히 외쳤다.
“명예 후작님, 폭주입니다! 저 웨어울프가 초인들을 폭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번 폭주한 초인은 죽을 때까지 적을 공격합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막는 자 역시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하아! 하아!”
급히 말을 쏟아 낸 발터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역시 폭주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최선을 다해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발터나 되니 폭주의 영향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지, 그가 만약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초인들과 함께 메르시오를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때. 이 정도면 치료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히죽거리는 늑대의 미소.
정말 보기 싫은 그 모습에 이드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런 수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발터의 말을 들어 보면 ‘폭주’라는 현상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원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원인도 모르는 것 같고. 그런데 메르시오는 정작 초인도 모르는 폭주를 어떻게 일으켰을까.
하지만 느긋하게 그런 궁금증이나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으아아아아!”
“죽여! 죽여! 죽여!”
“찾았다! 이 개자식아!”
씩씩거리며 메르시오를 노려만 보던 초인들이, 마치 누가 신호라도 한 듯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제정신들이 아닌 듯 소리들만 꽥꽥 질러 댔다. 그중 옳은 소리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 대상이 틀린 듯하니 그건 둘째로 두고. 이대로 그냥 두면 저들은 모두 메르시오의 손톱에 걸려 죽는다.
물론 메르시오도 느긋하게 존 워스를 치료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드의 방해를 받는 것보다는 여유로울 거라는 생각이 아닐까.
반대로 이드는 메르시오를 향해 미친개처럼 달려드는 초인들을 막으려면 정신없이 뛰어야 한다.
“그게 네 노림수겠지만, 누가 그대로 따라 준다냐?”
콰릉!
이드가 성난 마음으로 바닥을 찍자, 사방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이드는 거기서 나온 반탄력을 추진력 삼아 앞으로 쏘아지며, 뿜어진 반탄력을 흩뿌렸다.
그 반탄력은 순식간에 강력한 폭풍이 되어 눈이 뒤집힌 초인들을 휩쓸었다. 그리곤 마치 가을 낙엽처럼 왔던 곳으로 굴려 보냈다.
물론 초인들이 금방 다시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그땐 이미 이드가 메르시오의 지척에 도착한 상태.
“뭐냐! 초인들을 버릴 생각이냐?”
예상치 못한 이드의 대응에 놀란 메르시오가 은색 송곳니를 드러내며 외쳤다.
그러나 이드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일라이져를 휘둘렀다.
십여 개의 검 그림자가 메르시오의 주요 급소를 노렸고, 그는 번개처럼 손을 휘둘러 이드의 공격들을 막아 냈다.
그림 같은 일수의 공방.
그러나 이드의 진짜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검과 손이 부딪히는 폭풍과 같은 찰나.
마각철황격의 발그림자가 메르시오 뒤에 숨겨진 존 워스의 하체를 두드렸다.
퍼퍼퍼퍽!
진정 그림 같은 발길질이었다.
그에 근육의 일부가 다시 찢어진 존 워스의 하체가 축구공처럼 석실 구석으로 튕겨 나가 널브러졌다.
있을 수 없는 형태로 흐느적거리는 그 모습이 마치 문어 다리를 연상시켰다. 다리뼈가 가루처럼 잘게 부서진 게 확실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급격히 피로 물드는 가랑이다.
어쩌면 존 워스는 하체를 찾아 다시 걷고 뛸 수 있게 되더라도, 남자로서의 구실은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론, 당사자는 다시 피를 토하느라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근육에 이어 신경이 붙은 상태로 당했다면 피를 토하고 말고 할 정신도 없었을 테니까. 그가 아무리 검왕이라도 남자인 이상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드와 메르시오.
양측 모두 누군가를 돌보며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도 숨 한 번 쉬는 2초의 시간에 182번의 공방을 주고받은 뒤다.
‘강하다.’
이드는 그 공방을 통해 메르시오의 힘을 느꼈다. 심지어 과거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지구에서의 수련과 차원의 인을 발동시킨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밀렸을지 모른다. 이드에게 무진장한 내력을 전해 주는 그레이드론의 하트가 없었어도 마찬가지.
하지만 다행히 이드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메르시오에게 전혀 밀릴 이유가 없었다.
적과 은의 마나가 첨예한 힘 싸움을 하는 어느 순간.
이드의 주먹을 검게 물들인 검은 마나가 불쑥 끼어들어 은의 마나에 일격을 박아 넣었다.
쿠앙!
순간 격렬히 반발하던 마나가 극점에 이르러 소멸했다. 그 충격에 벽까지 날아간 존 워스는 그대로 떨어져 터진 자신의 가랑이에 처박혔으며, 마나가 소멸한 지점의 바닥은 어른 키 깊이로 움푹 파였다.
그 중심지 속에서 이드는 자신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메르시오에 말을 걸었다.
“왜, 뜻대로 되지 않아 불만인 모양이지?”
“네 녀석과 같은 토벌대가 아니었나? 아니면, 성격이 변했나?”
“둘 다 틀렸어. 그저 든든한 아내를 믿는 거지. 그렇지?”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 이미 정리 끝났다고요.”
이드의 말에 힘찬 라미아의 대답이 들려왔다.
두 손을 허리에 척 하고 올린 그녀의 발밑에는 어느새 정신을 잃은, 또는 마법에 묶인 초인들이 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