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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06화


1042화

옴질옴질.

문 앞에서 헤매던 이드의 손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머리를 긁적였다.

랜달의 상태를 보려고 왔지만, 어쩐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신음과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랜달도 살아 있는 것 같고…… 그냥 돌아갈까?”

혼잣말이지만 급격히 그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어쩐지 이 안으로 들어가면 흉한 꼴을 볼 것 같은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드는 왜인지 쉽게 발을 돌리지 못했다.

들어갈까.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던 이드는 쩝 입맛을 다시고는, 결국 싫은 내색 그대로 문을 밀었다. 끼이익 하는 마찰음이 들리며 열린 문 사이로 밝은 빛이 가장 먼저 쏟아져 나왔다.

비올라가 손을 보기라도 했는지, 방의 천장 전체가 등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던 것. 의외로 피 냄새를 비롯한 악취 같은 건 없었다.

피가 낭자한 음침한 연구실을 예상하던 이드는 얼굴을 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며 안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좀 이른 생각이었다.

방안에 들어선 순간 보이기 시작한 온갖 잡동사니들. 마치 저택의 연구실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미친놈이 외부에 다닐 때마다 이걸 다 가지고 다니는 거였어?”

어떻게 봐도 병이다. 그게 아니면 언제든 도망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거나. 물론 바이트 타블렛과 라미아가 있는데 도망갈 염려는 없겠지만… 그렇다면 역시 한번 시간을 내서 신전에 데려가야 하려나.

방은 넓었다. 잡동사니조차 없는 방의 가장 안쪽에는 바이트 타블렛이 공중에 세워진 상태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의 주인, 비올라는 그 앞에 등을 돌리고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이드는 비올라 앞으로 보이는 기묘한 그림자 쪽에 다가갔다.

그러자 보이기 시작한 건 이드로선 상상도 하지 못한 기물이었다.

마치 거미가 다리를 벌리고 있는 것 같은 형태.

랜달은 그런 기물의 다리에서 나온 실과 연결되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당연히 극진한 치료 같은 게 없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모습을 예상한 것도 아니기에 이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어이없는 감정이 그대로 담긴 이드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정신없이 낄낄거리던 비올라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졌냐?”

“어, 언제 오셨습니까? 문에 락 마법을 걸어 뒀는데.”

“당연히 부수고 들어왔지.”

말과 함께 활짝 열린 문을 가리키는 이드의 손짓. 그를 따라 눈을 돌린 비올라가 남몰래 인상을 썼다. 부서진 락 마법을 다시 설치하려니 귀찮은 것이다.

“노크는 기본예절입니다만?”

“했는데, 대답이 없잖아. 죽은 게 아닌가 걱정이 되더라고.”

‘불만 있으면 죽인다’로 들리는 건 착각일까? 비올라가 마지못해 얼굴을 펴며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오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앞으로 나서서 실에 매달린 랜달을 살폈다. 그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실이었다. 자세히 보면 진짜 실이 아니라 마법을 꼬아 만든 특수 물질임을 알 수 있는데, 그건 각각 랜달의 척추와 가슴뼈에 박혀 있었다.

거기에 부서진 두 다리와 한쪽 팔은 잘라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절단면과 가슴의 상처에는 불투명한 점액질이 붙어 있었다.

언뜻 보면 마치 슬라임이 랜달을 잡아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기운이 없는지 이드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모습에 심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비올라를 보는 이드다.

“이거 어떻게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데, 벌써 맹세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거냐?”

“아니, 마법사의 맹세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럼 이 꼴은 뭔데?”

“우선 이건 제가 쓰던 실험대를 개조한 겁니다. 제압과 동시에 마나를 봉인하고, 생체 반응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 자랑 중 하나죠. 팔다리를 잘라 버린 건 치료하기도 까다롭고, 굳이 할 이유도 없어서 그런 거고. 그래도 상태가 나빠지지는 않도록 베놈 플렘을 붙여 둔 겁니다. 절대 정신적, 육체적으로 치명적인 일은 안 했다고요.”

비올라는 자신의 맹세가 의심받은 것이 억울하다는 듯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과연 듣고 보니 그의 조치 중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애초에 라미아가 엉망이 된 랜달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던가.

하지만 의심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다.

“그럼 아까 미친놈이라는 건 뭐고, 낄낄거린 이유는 뭔데?”

“별로 대단한 건 아닌데…….”

슬쩍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이드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무언가를 꺼내 놓는 비올라다.

그걸 확인한 이드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건 몸뚱이를 잃은 신체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거・・・・・・ 고블린과 오크의 팔다리잖아. 이걸로 뭘 하려고?”

그나마 인간의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비올라가 맨들맨들한 제 머리를 슥슥 쓰다듬더니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잘라 버린 팔과 다리 대신 달아 주려고 했죠.”

“……뭐?”

“그냥 놀린 겁니다. 제가 진짜로 그러겠습니까?”

이드는 그런 비올라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치료가 복잡해서 잘라 버렸다고 할 때는 언제고.

생명의 관에서 보았던 키메라 기술을 생각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치료보다 그쪽이 더 복잡하리라는 건 굳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과연 랜달이 미친놈이라고 치를 떨 만하다 싶었다. 누가 몬스터의 팔다리를 몸에 붙이고 싶을까.

더구나 오크는 몰라도 고블린이라니. 일단 길이부터 다른데, 그걸 붙이면 얼마나 꼴이 우습겠는가. 

“아, 장난이었다니까요. 장난!”

이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가늘어진 이드에 비올라가 소리까지 지르며 부정했다.

“좋아. 일단 장난이라고 해 두자. 그런데 장난도 정도가 심하면 돌아 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만 명심해!”

“쳇, 어차피 미친놈인데, 거기서 좀 더 돈다고 달라지는 거 있나요.”

투덜거리는 말에 ‘있다’라고 대답한 준 이드가 랜달을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기절해 있었다.

쉼 없이 괴롭히던 비올라를 이드가 상대하고 있으니, 좀 편했나 보다.

“그사이 뭐 좀 알아낸 건 있어?”

“어…… 아직 안 물어봤는데요.”

“그럴 줄 알았다.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별말은 안 하겠는데, 신경 좀 쓰자. 응?”

쯧쯧, 혀를 차는 이드에 본인이 생각해도 면목이 없는지 번쩍이는 머리가 붉어지는 비올라다. 그런 상태에서 문득 비올라가 물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다는 건, 이놈을 다른 곳에 넘기지 않으신다는 거죠?”

그 질문에 생포한 정신의 관의 두 장로에게서 정보를 얻어 낼 기회가 없다고 징징거리던 비올라의 모습이 떠오른 이드다. 하지만 그들과 랜달은 그 성질이 달랐다.

“그땐 토벌 작전 중이었으니 얘기가 다르지만, 지금은 굳이 다른 곳에 넘길 이유가 없지.”

오히려 그렇게 되면 문제가 크다.

지원을 위해 접촉한 다양한 귀족들이 있을 테고, 그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자들은 랜달의 목을 노릴 것이다. 어쩌면 심문하기 전에 랜달의 목이 먼저 떨어질지도 모른다.

당연히 넘기라고 해도 거절할 상황인 것이다.

거기에 아무리 세관 중 가장 작은 생명의 관이라고 해도 명색이 부관주다. 장로들보다야 양질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물론 정보를 얻기 이전에 악마의 계약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장로급이 아닌 만큼 어쩌면 계약에서 자유로울지도 모르지 않는가.

“으흐흐흐흐흐흐~ 그럼 이 인간은 온전히 제 차지라는 거네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잘못하면 바로 압수다.’

“흐흐흐. 맹세를 믿어 주세요. 정보도 착실하게 빼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여기서 너무 벌려 두지 마라. 곧 이동할 테니까.”

아무래도 이런 큰 사건이 있었는데, 마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상황에 굳이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좋지 않다.

무엇보다 검후를 위해서라도 아나크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비록 그 땅에 배신자가 있더라도 아나크렌은 그녀의 고향이며, 그녀를 기다리는 핏줄이 있는 땅이니까.

“전혀 문제없습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한 시간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순간 주변을 둘러본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세상에 얼마나 짐을 풀고 싸고를 자주 했으면 이 많은 잡동사니가 한 시간만에 정리가 되는지 감탄할 일이었다.

이드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방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철컥하고 방문이 닫혔다.

비올라가 문을 닫고 다시 락 마법을 건 것이다. 동시에 들리지 않지만 랜달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났다.

지하실에서 나온 이드는 저택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투명하게 밝아져 오는 새벽하늘이 보였다.

작은 풀벌레 소리와 함께 저택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숨어 있는 검은 돌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만 제외하면 너무나 고요한 새벽이다.

이드는 잠시 홀로 서서 메르시오와의 전투를 떠 올렸다. 큰 싸움이었지만, 그리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 메르시오가 혼자가 아니었다면? 만약 존 워스가 혼돈의 파편 중 하나로서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지금과 같은 결과를 내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남은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려면 시르피가 아니라 우선 나부터 갈고 닦아야겠어.’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차원의 인으로 인해서 혼돈의 파편이 가진 불사성이라는 이점이 사라졌다는 거다. 뿐인가. 신체의 일부가 차원의 인에 흡수될 경우 전력에 손실까지 발생한다.

이드는 이 두 가지 특이 사항을 머리에 두고 메르시오와의 싸움을 되새겼다. 그리고 혼돈의 파편을 상대로 이 두 가지 특징을 어떻게 써야 최고의 효과를 뽑아낼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그렇게 푹 빠진 덕분인가. 시간을 빠르게 흘러 어느새 붉은 태양이 삐죽이 솟아오르며 이드의 눈을 두드렸다.

이드는 잠시 태양을 마주 보다 저택으로 들어갔다. 곧 일리나와 라미아가 일어날 시간이다. 자신이 없으면 찾을 것이다. 뭐, 이미 나갈 때부터 알고 있을 확률이 더 높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밤을 새는 건 좋지 않아요.”

이드가 방에 들어오는 순간, 이미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일리나와 라미아가 마주 앉아 있다가 반겨 준다.

이드는 두 사람이 내어 주는 빈자리에 앉았다.

“검후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 줘서 말이야. 하는 김에 비올라도 확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라면 뭔가요?”

“랜달은 살아 있어요?”

두 사람의 질문에 이드는 밤 사이 있었던 일을 말해 줬다.

그러는 사이 해는 완전히 떠오르고, 동시에 에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마스가 움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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