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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07화


1043화

저녁 시간을 한참 지난 늦은 밤.

평소라면 텅 비어 있을 왕궁 회의실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그 아래로 마스의 주요 대신들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현재 이들은 마법사가 가지고 들어온 통신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거기에서는 타란 백작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듣고 있는 목소리는 녹음해 둔 것으로, 이 자리에서만 벌써 두 번째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타란 백작의 음성이 끝난 후엔 폐허가 된 쉐어 가든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상이 이어졌다.

당연히 이 역시 두 번째다.

“…….”

길지 않은 영상이 끝이 났지만,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던 쉐어 가든의 전력.

검후 확보의 실패.

거대 늑대로 변신하는 웨어울프의 출현,

그와 싸운 정체불명의 강자.

폐허가 된 쉐어 가든과 영지민들.

마지막으로 수도 기사단과 타란 기사단의 괴멸에 가까운 피해까지.

어느 것 하나 가벼이 넘길 사안이 없었다.

‘타란 백작을 보낼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

‘검후의 문제다. 처음부터 좀 더 신중하게, 좀 더 무겁게 다루어야 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과 준비 부족에 대한 반성, 그리고 실패에 대한 책임 등. 대신들은 각자 성향에 따른 고민에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런 중에 세르베트 백작이 물꼬를 트듯 말문을 열었다.

“전하께 아룁니다.”

특유의 우렁우렁한 목소리. 하지만 대신들의 고개는 그가 아닌 회의실의 상석을 향했다.

그곳엔 전날 회의와 달리 마스의 국왕 크라이 반 마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턱을 괴고 그 손에 얼굴의 반이 가려진 탓에 표정은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국왕의 기분이 좋지 못함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 

“말하라. 백작.”

“이번 사태는 실로 무엇 하나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장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전하, 우선 아나크렌과의 국경을 봉쇄하소서.”

갑자기 튀어나온 국경 봉쇄 요청.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짐작이 있기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국왕이 고저 변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국경 봉쇄를 주장하는 이유가 은색 기사단 때문이냐.”

“검후 확보 작전의 변수 중 가장 큰 문제는 웨어 울프, 그리고 그와 싸운 강자입니다. 그중 타란 백작이 전한 웨어 울프의 형상은 아나크렌 제국에서 있었던 흑마법사의 토벌전 도중 출현했던 존재와 같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혼돈의 파편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 존재와 싸울 만한 강자가 그날, 그 자리에 나타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저는 그 강자가 이드 명예 후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쉐어 가든에 나타난 은색 기사단이 그 증거입니다.”

설득력 있는 세르베트 백작의 주장에 국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이드와 은색 기사단의 사이가 유독 가깝다는 사실은 이미 보고를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니까 백작은 명예 후작과 은색 기사단이 검후를 훔쳐 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검후를 데리고 국경을 넘기 전에 전하께서 국경 봉쇄를 명령하여 주십시오. 그런 후 쉐어 가든이 보유한 전력을 숨겨 왕국에 큰 피해를 끼친 파라켈 후작의 죄를 물어야 합니다.”

드르르륵.

콰당!

“백작! 말을 조심하시오. 지금 상황에 그런 헛소리를 하고 싶은 거요?!”

버럭 성을 낸 이는 폐허가 된 쉐어 가든의 모습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파라켈 후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픈 중에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향하자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그에 뒤로 밀려난 의자가 뒹굴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그걸 보곤 급히 의자를 바로 세웠다. 그런 중에도 언쟁은 멈추지 않았다.

세르베트 백작이 파라켈 후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귀하야말로 말을 조심하시오. 헛소리라니! 귀하가 제공한 정보와 쉐어 가든의 전력이 다르다는 보고를 듣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이걸 지금 따지지 않으면 대체 언제 따진단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큰 목소리를 가진 세르베트 백작이 작정하고 고함을 지르자 회의실의 창문이 찰랑찰랑 흔들릴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말에 힘을 더한 것은 타란 백작의 보고다. 파라켈 후작도 그건 어쩔 수 없었는지 국왕을 향해 말했다.

“전하, 진정 억울하옵니다. 저는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밝혔사옵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미 바벨에 등을 돌린 시점에, 국왕까지 외면하게 되면 그 뒤는 없다. 파라켈 후작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국왕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기사단의 피해는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쉐어 가든에서 일어난 일 중 그건 가장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그보다 우선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나 많았다.

“글쎄. 그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지. 급한 건 아니니까. 백작?”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하면 국경 봉쇄는 어찌하지?”

그 물음에 국왕이 턱에서 손을 떼고는 가장 가까이 자리한 안데르를 향했다.

그는 오늘도 담배를 물고 있었다. 과연 국왕 앞에서 담배를 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건 그만이 유일하게 허락받은 특권이었다.

“재상 생각은 어때?”

“후우~ 전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흥, 흰소리 말고 말해 봐.”

코웃음을 치는 국왕에 슬쩍 고개를 숙인 안데르가 힐끗 대신들을 살폈다. 세르베트 백작의 말에 동조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그렇지 않은 인물은 소수.

쯧쯧, 싸움을 좋아하는 성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멀리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을.’

내심 혀를 차고는 담배를 깊이 빨아 당기는 안데르였다.

“스으~ 그럼 소소하게나마 말을 해 보겠습니다. 일단 국경 봉쇄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으니, 저는 반대하겠습니다.”

“이유는?”

“명분이 없습니다. 뭐라고 하고 국경을 닫아야 합니까? 은색 기사단을 막기 위해서? 아니면 검후를 잡기 위해서 국경을 막았다고 하시겠습니까?” “과연. 명분인가.”

“특히 검후가 언급되는 순간 각국으로부터 마스가 받아야 할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부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알다시피 저희 마스는 힘을 숭상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검후는 비록 제국의 인물이나, 그런 점에서 수많은 마스인의 존경을 받던 인물입니다. 이런 인물을 감금해 둔다? 그것도 황족을요? 아니, 그 전에 검후가 은색 기사단과 함께 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확인이나 된 겁니까?”

“그렇군. 확실한 건 은색 기사단이 쉐어 가든에 있었다는 사실 뿐이지. 쭛.”

국왕이 혀를 찼다. 안데르의 말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건 곧 국경 봉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 그에 세르베트 백작이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실일 확률이 높습니다. 거기에 검후가 제국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알려질 사실이 아닙니까. 오히려 지금 검후와 은색 기사단을 잡아야 이후 있을지 모를 제국과의 다툼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툼을 피해? 누가? 설마 마스가?”

순간 스산해지는 국왕의 눈을 마주한 세르베트 백작은 아차 싶었다.

마스 왕국의 호전성은 핏줄에 새겨진 본능 수준이다. 그들은 왕국이나 레이논 산맥의 몬스터뿐 아니라,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물러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닌 마스의 국왕 앞에서 제국과의 다툼을 피할 수 있다는 약한 소리를 한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백작은 제국이 두려운 모양이지? 혹시 제국이 두려운 다른 대신들은 없나? 우리 마스에 언제 이렇게 겁쟁이들이 늘었는지 모르겠어. 이거 아무래도 국경 봉쇄는 해야겠군. 그렇게 명분을 쌓아 제국과의 사이에 피를 좀 흘려야 그 피에 겁쟁이들이 씻겨 나갈 게 아닌가!”

화를 참기 어렵다는 듯 팔걸이를 탕탕 내리치는 국왕의 모습에 대신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접었다.

“시, 신이 실언을 했나이다. 부디 용서하소서. 전하.”

“용서하소서. 전하!”

하지만 그 중 허리를 굽히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안데르였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전쟁은 전하의 뜻이오나, 황송하게도 신이 나이가 많아 더 이상 보좌해 드릴 수 없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대가 보좌하지 않으면 재미없으니까. 전쟁은 그대의 몸이 회복될 때를 노리지. 대신들도 자리에 앉으라.”

“황공하옵니다.”

나이 때문에 약해진 몸이다. 과연 그런 때가 올까? 안데르가 허허거리며 웃음을 짓자 그제야 대신들도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지만 한 사람. 말 한마디로 회의실을 들었다 놓은 세르베트 백작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이 마주 앉은 파라켈 후작과 꼭 닮아 있었다. 회의는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사고가 있었기 때문인가.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그에 국왕이 다시 한번 으르렁거렸다.

“왜 갑자기 말이 없는 것이냐. 설마 내 호통을 들을까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분명 겁쟁이는 피에 흘려보낼 것이라 말하지 않았더냐.”

“재, 재상께 묻겠습니다. 하, 하면 저희는 검후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까.”

마치 맹수에 쫓기듯 황급히 두서없이 꺼내놓은 말에 안데르는 안쓰럽다는 양 입을 열었다.

“놓친 물고기를 잡자고 바다로 뛰어드는 일은 어리석지 않소.”

“하면 재상께서는 당장 무엇이 가장 급하다 보십니까?”

“당연한 걸 묻는구려. 쉐어 가든이 무너지고, 영지민들이 다쳤으니. 그들을 구하는 것이 먼저요. 둘째는 원인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 말에 다른 귀족 하나가 이상하다는 듯 반발했다.

“아니, 방금 전엔 미련도 갖지 말고, 국경 봉쇄도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허허허. 이보게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들이 왜 필요하겠소. 그리고 쉐어 가든이 무너진 이 큰일을 다른 나라에서 과연 끝까지 모를까? 과연 그들은 우리 대응에 납득하고?”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괜찮소. 그리고 이 조치에는 운을 바란 점도 있소이다. 운이 좋으면 백작의 말처럼 은색 기사단이나 검후의 꼬리를 잡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을 때 이야기. 우리가 진짜 집중해야 할 일은 다른 물고기요.”

다른 물고기. 검후를 물고기에 비유한 안데르다.

그가 말하는 물고기라면 최소한 검후급은 된다는 말이 아닌가. 관심이 떨어졌다는 듯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국왕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재상. 다른 물고기가 있나?”

“이미 한 마리는 잡지 않았습니까. 미완의 마탑.”

“어허~ 헛소리말고!”

“허허허. 혼돈의 파편. 명예 후작이 그 존재를 밝힌 후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오래전 기록에 짧은 흔적이 나오더군요. 혼돈의 파편이란 자들이 모두 여섯이라고 말입니다.”

순간 국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의 눈빛이 소리 없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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