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08화
1044화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진 회의는 새벽까지 계속됐다.
주도하는 사람은 안데르였다. 국왕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부터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정해진 바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대신들도 편히 논 것은 아니었다.
국왕이 네놈들은 인간이냐, 밥버러지냐며 매섭게 노려보는데, 억지로라도 반론을 쥐어짜야 하지 않겠나.
덕분에 하도 진땀을 흘려 회의가 끝났을 때쯤엔 녹초가 되어야 했다.
그런 힘든 회의의 결과는 그날 새벽에 바로 나타났다.
수도의 성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왕실 기사단을 선두로 제2 수도 기사단과 정예 병사들이 말을 달려 나간 것이다.
그들이 향한 곳은 북동쪽. 쉐어 가든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드는 아침 식사 자리에 검후와 쉴라 일행을 불렀다.
며칠간은 은색 기사단과 검후를 배려해 그들만의 시간을 주려 했었는데, 아침 일찍 찾아온 에린의 보고 때문에 그러긴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이드와 일행들의 식사 자리에 함께하게 된 에린이었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고생하는 중이었다.
‘검후와 함께 아침을 먹게 될 줄이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녀도 검은 돌로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쉽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훈련했지만, 이 순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암살자 나부랭이라지만, 그녀도 엄연히 무공을 익히고 있는 한 사람의 무인.
크든 작든 검후에 대한 동경과 존경심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검은 돌에서 받는 훈련으로도 지워 버리지 못한 감정이었다.
‘멀리서 볼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대장한테 보고를 넘겨 버릴 걸 그랬어.’
에린은 적극적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싶어 하던 스톤을 떠올리며 바짝바짝 타는 입술을 적셨다.
하필 그때 이드가 그런 그녀를 불렀다.
“에린, 아까 내게 했던 내용을 다시 말해 줘.”
“콜록, 콜록. 네, 넵!”
깜짝 놀라 물이 목에 걸린 에린이 가슴을 두드리고는 준비해 둔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언급한 사안은 성문이 열리자마자 수도에서 뛰쳐나온 기사와 병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현재 이 병력이 향하는 곳은 수도에서 북동쪽. 쉐어 가든인 것으로 예측되며, 전날 왕궁에서 새벽까지 이어진 회의의 결과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쉐어 가든이 그 꼴이 됐으니, 불벼락 맞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아침부터 와인 잔을 든 스폴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농담에 함께 웃지 못한 에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들어온 정보가 더 있습니다.”
즉, 이드도 아직 듣지 못한 보고라는 것이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여 말해 보라는 신호를 보내자 에린이 말을 이었다.
“기가이, 숀, 콜튼, 쉐어 가든과 이웃한 삼 개 영지에서도 영주들이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움직였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목적지가 쉐어 가든이란 사실을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외는 없고?”
“있습니다. 국경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에린의 대답에 말없이 식사에 집중하던 쉴라가 포크를 멈췄다. 그리고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스에서 국경 봉쇄를 한 건 아니겠죠?”
“다행히도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에린은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을 탁자 중앙에 펼쳤다. 거기에는 마스와 제국의 국경 지역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국경을 지나는 주요 길목입니다. 아직 모든 길목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확인된 길목마다 병력이 배치되어 출입을 확인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주요 길목 몇 곳에 붉은색 점이 찍혀 있었다.
수도와 쉐어 가든 주변 세 개 영지의 병력 이동에, 국경으로 이어지는 주요 길목에 대한 검문.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스에서 우리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군요.’
일리나가 말했다.
그러자 물로 입안을 정리하고 입술을 닦은 검후가 고개를 흔들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틀려요, 일리나. 우리가 아니라 나를, 검후를 잡으려는 거예요.”
까드득.
쉴라가 섬뜩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검후 본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다.
다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검후가 마치 남의 일인 양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진정하렴. 그러다 주름 생기고, 이도 상할라.”
“그렇죠! 그러잖아도 시집이 늦어지고 있는 우리 단장, 주름에 이까지 빠지면 누가 데려가겠어요.”
거기에 한술 더 뜨는 스폴까지.
특히 평소 은밀히 신경 쓰고 있던 약점을 찌르는 스폴의 악담에는 천하의 쉴라도 잠시 정신 줄을 놓고 나이프를 휘두를 정도다.
쩌엉!
순간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왜 죽여 달라는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는 거니?”
“으아~ 진심으로 목을 노렸어! 진정해요, 단장. 검후님이 보고 계신다고요!”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낸 스폴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쉴라도 검후라는 말에 순간 날아갔던 정신을 회복하고는 면목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크윽~ 또 이런 꼴을 보여 드리다니. 죄송합니다.”
“괜찮아. 한두번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은 검후의 모습에 오히려 더 괴로운 쉴라였다.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던 이드가 에린을 보았다.
그녀는 연신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상황이 믿기지 않는 거다.
쉴라와 스폴이 티격태격해 대는 모습이야 익숙하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검후도 같이 끼어서 저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다. 그나저나, 마스의 움직임이 굉장히 적극적이다.
소극적으로 대처할 거라던 예상이 틀린 걸까?
“마스의 움직임에 대해서 뭔가 짚이는 거 없습니까? 제국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걸까요?”
“마스라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마 이번엔 아닐 겁니다.”
“저도 전쟁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쉴라에 이어 에린까지 고개를 저으며 그건 아니라며 부정했다.
“왜 아니라고만 하지? 나는 마스의 전쟁광 놈들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에 반해 스폴은 머리가 떨어지기 직전의 포크를 빙글빙글 돌리며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곧 합리적인 두 사람의 의견에 밀렸다. 그리고 이드 역시 둘의 생각과 같았다.
“그럼 두 사람은 현재 마스의 움직임이 예측 범위 안이라는 거군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은색 기사단과 검후님을 막을 생각이었다면 국경 봉쇄와 함께 바로 군대를 움직였을 겁니다.”
예상보다는 반응이 빠르지만, 그 규모가 작다고 주장하는 에린이다.
이드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검후가 에린을 칭찬하고 나섰다.
“좋은 부하를 두셨네요, 이드 님. 에린이라고 했던가? 정확한 분석이란다.”
“화, 황공합니다.”
검후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줬다는 사실에 에린은 감격해 버렸다.
잠시지만 그 모습을 본 이드가 이대로 유능한 부하를 검후에 빼앗기는 거 아닌가 하고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검후의 말이 이어졌다.
“아마 이번 마스의 움직임은 안데르 재상이 뒤에서 조종한 걸 거예요.’
“아, 확실히 그렇습니다.”
검후의 말에 이드 일가를 제외한 사람들이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 재상이라는 사람이 제법 머리 좋고 유능한 사람인 모양・・・・・・ 크흠. 입니다.”
순간 실수를 할 뻔했던 이드는 에린을 돌아보고는 정중히 물었다.
“마스의 왕이 가장 신뢰하는 꾀주머니죠. 무엇보다 마스가 적당한 선을 지킬 수 있도록 조정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적당히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검후를 탈취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아무렴 재상인데 검후 탈취 시도를 몰랐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드였다. 그러자 검후가 조금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적당한 선이 마스 기준이라서요. 호호호.”
그것도 농담이라고 잘도 웃음이 나오나 보다. 이드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도 모두가 마스의 반응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하니, 안심은 되었다.
어차피 라미아의 공간 이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국경 봉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그 후다.
마스가 미친 척하고 검후와 은색 기사단의 문제를 대대적으로 꺼내 들고 나서기라도 하는 날에는 온 나라가 시끄러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회복할 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하는 검후의 의도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장이 날 테니 말이다.
“쯧, 그런데 좀 아깝네요. 전쟁광답게 화끈하게 나왔으면 마스를 가로질러 말이라도 달려 주려고 했는데.”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면서 무서운 말을 하는 스폴이었다.
무엇보다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무서운 점이랄까.
그 모습에 이드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 깔깔거리고 장난치는 모습은 위장일 뿐이고, 누구보다 마스에 가장 크게 분노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폴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럼 정했던 대로, 오늘 안으로 여길 떠나도록 하죠.”
자신보다 마스에 대해서 잘 아는 에린, 쉴라, 검후의 세 사람이 마스는 문제없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은 이상 망설이며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급하게 움직인다는 건 아니다.
“우선은 남은 식사를 즐겨 볼까요?”
검후의 말대로 아직 식탁 위에는 절반이나 요리가 남아 있었다.
일행은 여태 심각한 얘길 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천천히 그 맛을 음미했다.
식사를 마친 후 스폴이 은색 기사단의 이동을 준비시켰다. 그와 함께 스톤도 검은 돌 요원들을 모아 제국으로의 복귀 명령을 내렸다.
은색 기사단과 달리 애써 모습을 감출 이유가 없는 그들은 정상적으로 국경을 넘으면 되었다.
게다가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검은 돌에 소속된 요원들의 전원 철수를 결정했기 때문에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마나가 많아도 그 많은 숫자를 굳이 공간 이동으로 옮기는 건 여러모로 낭비였다.
해서 그렇게 요원들이 모여 저택을 떠난 후, 이드의 일행과 은색 기사단은 저택 지하에 모였다.
“그럼 또 실력 발휘를 해 보겠습니다.”
먼저 내려와 마법진의 설치를 마친 라미아가 지하실 중앙에 모여 선 사람들을 보며 주문과 두 팔을 펼치자 지하실 전체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스로 이동할 때보다 열 명 이상 늘어난 대규모 공간 이동. 당연히 그에 소모되는 마나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철저히 준비한 라미아에 의해 단 하나의 마나 파동도 지하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마법진의 빛이 절정에 이른 순간.
파아아앗!
작은 불티처럼 부서지는 마법진이 사라진 저택의 지하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스에 큰 근심과 함께 쉐어 가든을 폐허로 만든 이드와 검후, 그리고 은색 기사단이 마스도 모르게 왔다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