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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15화


1050화

봉인 해제라는 중요한 일을 마친 이드는 느긋해졌다.

그는 일행들과 함께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검후를 지켜보느라 저택에 있는 모두의 식사 시간이 밀려 버린 탓이다. 그렇다고 불만인 사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은색 기사단의 경우 검후의 완전한 복귀에 축배를 들기도 했다.

조금 문제라면 축배가 과해서 점심을 먹다 말고 중간에 술자리로 변해 버렸다는 걸까.

단장인 쉴라가 있었다면 자중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검후가 돌아온 후 그 곁에서 껌딱지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축배를 꺼내 든 것이 스폴인 것을 보면, 과연 쉴라가 있었어도 막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아무튼 술을 좋아하는 것은 정말이지 여타 기사들 못지않았다.

이드는 그런 스폴의 마수를 피해 일리나와 함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라면 라미아도 함께해야겠지만, 현재 그녀는 비올라의 애절한 부탁에 그를 따라간 상태였다.

서재에는 책을 읽기 편하도록 큰 창이 나 있었다. 그 창을 열자 따뜻한 햇볕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돌아선 이드는 긴 소파에 앉아 눈을 가볍게 감은 채 햇살을 즐기는 일리나의 모습에서 문득 고양이를 떠올렸다. 엘프와 고양이라니. 다른 부분도 많지만, 지금 당장은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들어 이드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어느새 눈을 뜬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그냥・・・좋아해요?”

일리나가 볕을 쬐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고양이가 생각났거든요. 그러고 보면 숲에서 고양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고양이

“산 고양이 친구들이 있어요. 조심성이 많아서 낯가림이 심하지만요.”

낯가림이 심하다니. 그간 산에서 고양이를 보지 못했던 건 자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돌아가면 그 친구들, 꼭 소개해 줘요.”

“후후, 그럴게요.”

일리나 옆에 앉은 이드는 이후에도 그녀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느긋한 시간을 최대한 즐길 생각이었다.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로드가 남겼다는 물건만 해도 거기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숨겨 둔 게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때 천천히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박박 이를 갈던 발터를 봐서는 결코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사태 수습에 정신없을 삼검왕은 이드가 정문을 통해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그러니 지금은 당장의 여유에 충실한 것이 좋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드는 어느새 일리나의 무릎을 베고 누웠고, 일리나는 낡은 제목의 책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읽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

이런 아름다운 순간에 방해꾼이 찾아든 것은 갑자기였다.

온몸에 힘을 빼고 누워 있던 이드가 갑자기 한쪽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 오랜만의 여유인데.”

“이드님!”

그 말과 함께 서재의 문을 왈칵 열어젖히며 케마란이 나타났다.

그 뒤로는 그녀에게 팔목이 잡힌 네리베르가 힘없이 끌려오고 있었다.

가만 보면 둘 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도는 데다 희미한 술 냄새도 나는 것이, 살짝 취한 듯 보였다.

스폴의 주도로 1층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있으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특히 두 사람은 모든 기사들에게 귀여움받고 있는 막내들이 아닌가. 아마 장난으로라도 여기저기서 술잔을 권했을 거다.

그 결과, 두 사람이 뜬금없이 자신을 찾은 것이고. 그래도 말이다.

“저 녀석들, 술에 취했다고 갑자기 날 찾아오는 건 너무 맥락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보통 은색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은 이드에게 감사하는 만큼이나 그를 어려워한다.

누가 뭐래도 이드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이며, 제국의 명예 후작이다. 상징성으로도 작위로도 일개 기사가 쉽게 접근할 위치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이드의 싸움을 가까이서 목격하며 동경하는 마음까지 생겼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에 비하면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이드 일가를 참 편하게 여기는 편이다.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은색 기사단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건 아마도 재미있었던 첫 만남과 그 후 스승과 제자로서 수련을 받으며 쌓은 끈끈한 정 덕분이리라.

“대신 그만큼 두 사람이 이드를 믿고 있다는 거잖아요.”

좋게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까. 이드는 일리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힌 두 사람은 어느새 이드 앞으로 달려왔다.

“취했으면 잠이라도 자지, 무슨 일이야?”

“저희 놀러 가요! 일리나 님도 같이! 축제라고요! 축제!”

사방으로 손을 흔들며 몸을 흔드는 케마란은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다. 술의 영향도 있겠지만, 저 ‘축제’라는 단어가 그녀의 텐션을 더더욱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리라.

이드는 고민했다.

술부터 깨워서 상황을 들어 볼까 하고. 하지만 곧 그만뒀다.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모습이 제법 재미있지 않은가.

라미아가 없어 바로 영상으로 남기지 못함이 아쉬울 정도다.

“축제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저택 밖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건 알았지만.

“진짜 축제는 아니고, 토벌대 환영 행사를 준비하는 중인데요. 워낙 규모가 커서 벌써 축제처럼 즐기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확실히 토벌대 규모가 크긴 했지. 그런데, 넌 괜찮아?”

“전혀 문제없습니다.”

눈을 부릅뜨고서 어떻게든 정신을 잡고 있으려는 건 대견한데, 그러면서도 취한 듯 휘청거리는 몸을 보면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어쩌겠나. 그러고 보면 ‘괜찮다, 문제없다’가 원래 술 취한 사람의 단골 멘트였던가.

“그런데 갑자기 축제는 왜 가려는 건데? 우리가 여기 있는 건 비밀이라는 거 몰라?”

“그래도! 수도에서 하는 이런 대형 축제는 언제 또 있을지 모른단 말이에요. 거기다…… 언니 기사들이 내일부터 지옥을 볼 거라고, 최후의 휴식을 즐기라고 했다고요.”

과연. 최후의 휴식이라. 그게 갑자기 찾아온 이유인가. 이드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언니 기사들이면 몰라도, 저희 얼굴을 아는 사람은 수도에 없을 거라고요. 그렇지~?”

끄덕끄덕.

케마란이 돌아보자 네리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술에 취한 것 치고는 횡설수설하지 않고 말을 제법 잘하고 있었다. 대신 예의를 비롯한 다양한 브레이크가 고장 난 듯하긴 했지만. 이어 질척거리며 매달리는 두 사람을 무시한 이드가 일리나의 생각을 물었다.

“일리나는 어때요? 두 사람이 말하는 축제에 흥미 있어요?”

“음~ 궁금하긴 해요.”

잠시 창밖으로 귀를 기울이던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어쩐지 마법으로 가려진 그녀의 긴 귀가 저택 밖의 소리에 움찔거리는 모습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구경하러 가죠.”

“얏호! 뭐야, 네리베르. 너도 어서 손들어!”

“야, 얏호.”

일리나에게 말했는데 왜 두 사람이 환호성을 내지르는지. 뭐, 어차피 간다면 같이 갈 생각이긴 했지만.

‘우선 그 전에 술부터 깨울까. 취한 모습이 재미있기는 해도, 이 상태로 밖으로 나갔다가 사고를 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니.’

이드는 곧바로 두 사람의 손목을 잡았다 놓았다.

한두 호흡 정도에 불과한 짧은 접촉. 술을 깨우기는커녕 내부를 살피기도 모자란 시간이었지만, 이드의 내공 운용과 무극신기의 공은은 그런 한계를 비웃을 만큼 뛰어났다.

곧 술 냄새가 조금 진해진다 싶더니, 두 사람의 몸에서 주기가 뽑혀 나왔다.

그와 함께 술이 깬 케마란과 네르베르가 자신들이 어떤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인식하곤 허둥거렸다.

비록 애송이 기사지만 자신들이 한 것이 술주정이라는 것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드가 편히 대해 준다고 해도 그렇지. 술주정이라니.

두 사람은 술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붉어진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서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저희는 돌아가서 반성하고 있겠습니다.”

그와 함께 후다닥 자리를 뜨려는 두 사람을 이드가 막았다.

“술 때문에 한 실수니까 반성은 그만하면 됐고, 나갈 준비 해야지, 어딜 가?”

“그렇지만 지금 밖에 나가는 건 좀.

“네. 저희야 그렇다 쳐도, 이드 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겉으론 발각될 위험을 우려하는 두 사람이지만, 이드가 보기엔 어쩐지 그보다는 외출 후 선배 기사들의 추궁을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 문제라면 다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 말고, 먼저 축제 이야기를 꺼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하지만 사실 저희도 하인들 이야기를 몇 가지 들었을 뿐이지, 잘 모르는걸요.”

“그럼 거기부터 가 보자. 이제 와서 빼 봤자 안 봐준다.”

두 사람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일리나가 보고 싶다 하지 않는가. 겸사겸사 안내인을 두고 데이트라도 하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든 이드였다. 마침 라미아도 못 빠져나올 것 같단다. 어지간해서는 이런 축제 구경에 빠질 리가 없는데.

‘비올라가 엄청나게 질척거리나 보네.”

아무래도 바이트 타블렛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실을 만드는 일인 만큼, 대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는 김에 랜달도 같이 보관해야 하고 말이다. 검은 돌에서 랜달을 맡겨 달라는 요청도 있었지만, 허락할 수는 없었다. 비록 지금은 처지가 바닥까지 떨어졌지만, 기회만 되면 어떤 수단이든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일부터 지옥이라는 건 무슨 말이지?” 

이드는 두 사람이 오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네 사람이 저택을 나섰다.

기분 전환 겸 구경하는 건데 굳이 번거롭게 챙길 것까지도 없고, 또 그게 아니라도 이드에겐 웬만한 영지는 사 버릴 수 있는 ‘바닥이 없는 지갑’이 있지 않은가.

축제 구경에 있어 그보다 중요한 준비물이 또 있을까.

와글와글

저택이 있는 고급 주택가를 벗어나자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방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길가에 늘어놓은 좌판에, 한쪽에선 고기를 굽고, 다른 한쪽에선 재주를 넘고, 또 저쪽에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길을 두고 마주한 집에 색색의 천을 끼운 줄을 걸어 꽃잎이 날리는 연출을 해 둔 곳도 있었다.

무엇보다 압권은 광장에 설치되고 있는 조형물과 그림들이었다. 수백의 사람들이 달라붙어 커다란 목재를 옮기고, 망치질을 하고, 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쇼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서인지 광장 주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리나 님. 이드 님. 저쪽이에요! 저쪽으로 가요!”

저택을 나설 때까지도 머뭇거리던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그런 분위기를 탄 것인지, 금세 적극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저쪽에 뭐가 있는데?”

“유명한 극단에서 공연 중이래요! 그것도 그냥 연극이 아니라, 토벌대의 활약을 연기로 만들었대요.”

그녀의 말에 이드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아직 토벌대가 도착도 안 했는데, 무슨 활약을 했는지 어떻게 알고 연극으로 만들어?”

“저희도 모르죠. 그래서 빨리 가 보려고요.”

확실히 궁금하긴 하다.

일리나의 손을 잡은 이드가 두 사람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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