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18화
1053화
간질간질.
라미아의 정신이 접촉해 온다. 마치 고양이가 고르릉거리며 머리를 비비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드는 익숙하게 그녀와 마음을 연결하고는 기억 속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직후 마법을 발동하는 라미아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미러 이미지.”
손끝에서 뻗어 나간 한 줄기 빛은 탁자 위에서 하나의 영상으로 완성되었다.
그건 이드의 기억 속에 있던 두 남자의 움직임을 담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저택 앞에서 발견해서 잡으려다 간발의 차로 아깝게 놓쳐 버린 이들이었다.
“혹시 이 두 사람 중에 아는 얼굴 있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을 확인한 이드의 말에 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어느 쪽?”
“둘 다요.”
손가락 두 개를 펼쳐 영상 속 라울과 그 옆의 남자를 가리키는 검후였다.
이드는 라울과 그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
라미아도 일대를 감싸는 마법진과 함께 달려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만능은 아니다. 마법도 아니고 초인기를 이용해 공간을 넘어 버린 자를 잡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드와 라미아가 느린 것이 아니라 라울의 대처가 너무나 빠르고 신속했다.
남은 거라고는 뜯어낸 옷자락과 그에 묻은 라울의 피뿐.
당장은 오히려 갑자기 나타난 화려한 마법에 사람들이 몰려들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급한 상황 중에도 라미아가 여러 마법을 동시에 펼쳤기 때문이다. 무려 공간 이동을 막는 마법, 저택 일대에 대한 인식 저해 마법 그리고 일루젼 이미지 마법 세 가지였다.
덕분에 내부에 일어나는 일들을 효율적으로 가릴 수 있었다.
라미아는 라울이 수도 밖으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마법과 초인기의 성격은 달라도, 공간을 넘는 과정은 동일하기에 잔류 마나를 측정해 나온 결과였다.
에린은 그래도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혹시 모를 사태 예방을 위해 검은 돌로 복귀했다.
그 후 이드와 일행들은 저택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 안에서는 밖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이드는 아공간에 챙겨 온 음식들을 케마란과 네리베르에게 맡기고 검후와 쉴라를 방으로 불러 얼굴을 확인시키는 중이었다.
그런데 설마 두 사람 다 안면이 있는 인물들일 줄이야.
“누군지 말해 줄 수 있어?”
“물론이죠. 그런데, 제가 지하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별건 아니고.”
이드는 저택 앞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간단히 말해 주었다.
검후와 쉴라는 자신들이 지하실에서 수련하는 사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워했다.
특히 라울 옆에 선 남자를 노려보는 검후의 시선은 아무래도 개인적인 감정이 실린 듯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한 검후가 말했다.
“이드 님은 이자들에 대해서 아시나요?”
“자세한 정보는 없어. 대충 이 남자의 이름이 라울이라는 것? 본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발터 백작과 말을 트고 있을 정도로 친분이 깊지. 그런 점을 볼 때 바벨에서도 중요 인물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어.”
이드가 줄줄 쏟아 내는 말에 검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예상보다 라울에 대한 정보가 많아서다.
“거의 정확하세요. 이름은 라울 비욘 팽. 본명인 것 같아요. 제가 잡혀 있으면서 가장 많이 마주한 인물이죠. 바벨에서의 서열은 3위. 실력도 그렇지만 대내외적인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그 중요도는 2순위 정도라고 해요.”
아깝다.
최소 발터급으로 중요한 인물일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사실은 그보다 더하지 않은가. 어떻게든 이번에 잡아야 했었다.
이드는 내심 혀를 차는 한편, 기가 막혔다.
그만한 인간이 당시 파티에 직접 참석했을 뿐 아니라, 오늘은 심지어 저택 앞에 직접 나타나기까지.
성격이 급한 건지 대범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본인이 그래?”
“아니요. 이 개자식에게 들었죠.”
“검후님?”
노골적인 욕설에 쉴라가 화들짝 놀랐지만, 어차피 검후의 체통 같은 걸 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개자식이 누군데?”
“아아…… 라미아 님까지.”
“이름은 시사이판. 제 내공을 봉인한 놈으로, 제가 풀 때마다 나타나서 다시 막아 놓기도 했죠. 그때마다 하는 소리가 얼마나 복장을 뒤집어 놓는지. 딱 생긴 만큼 성격도 쓰레기인 놈이에요.”
그러면서 뿌뿌득 이빨을 가는 것이, 어지간히도 감정이 쌓인 것 같았다.
얼마나 싫으면 개자식에 쓰레기라고까지 말할까.
이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사이판이라는 남자를 살폈다.
“이 남자가 그 봉인을 만들었단 말이지.”
“그런데 여길 어떻게 알고 정확히 찾아온 것일까요? 혹시..”
쉴라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검후가 여기 머물고 있다는 것은 저택에 있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그런데도 바벨에서 정확히 알고 찾아 왔다? 이런 상황에 정보가 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정보가 새거나 한 건 아니고. 내가 볼 땐 저 시사이판이라는 남자 때문일 겁니다.”
“어떤 점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이드가 걱정을 일축하는 말을 하자 쉴라가 물었다.
“시사이판의 초인기는 봉인. 검후를 고생시킬 만큼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전투에 쓸 수 있는 능력은 아니죠. 자, 그럼 라울은 이런 시사이판을 왜 이곳까지 데려왔을까요?”
“그러니까 이드 님은 시사이판이 단순히 봉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봉인한 상대의 위치까지도 추적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아무렴. 설마 심심해서 이야기 상대로 데려왔을까.
“아닌 것 같아요?”
“아니요. 듣고 보니 그럴 확률이 무척 높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사이판을 바라보는 쉴라. 그런 그녀의 시선이 어느새 검후의 그것만큼이나 사나워져 있었다.
한때 봉인으로 검후를 괴롭히고, 이젠 검후의 휴식까지 방해하고 있는 놈이다. 그런 녀석을 보는 쉴라의 눈빛이 고울 리 없었다.
“계속 꼬리를 달고 다닐 순 없는 일인데.”
검후 역시 속이 편치 않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드의 말대로라면 어딜 가든 시사이판에게 위치가 알려진다는 말이니까. 이는 상당한 위협이었다.
특히 바벨의 경우 이미 검후에 대한 공격, 납치, 감금을 실행한 전적이 있지 않던가.
이드는 그런 검후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아쉽게 이 저택은 알려졌지만, 봉인을 소멸시킨 이상 더 이상 추적은 힘들 거야.”
“하지만 저들이 저택까지 찾아왔잖아요.”
“그거야 봉인을 가진 상태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렇지. 아마 마지막 위치를 더듬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 네 몸속은 깨끗해. 봉인은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아. 즉, 시사이판도 추적할 표식을 잃은 거지.”
만약 시사이판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가슴이 서늘했을 것이다.
그저 스치듯 지나쳤을 뿐인 그의 능력을 이드가 정확하게 읽어 냈으니 말이다.
검후 역시 이드의 말을 되새기더니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사이판의 초인기에 대해 알고, 그럴싸한 의견을 꺼낸 건 이드였다. 그걸 믿는다면 지금의 주장 역시 믿는 것이 옳았다. 또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이드의 말에 허점이 없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이 저택이 발각된 건 괜찮을까요?”
더 이상 시사이판의 추적이 없을 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는 이드도 이렇다 할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당장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못할 것 같긴 한데 말이지.”
아무리 바벨이라도 제국의 수도에서 검후를 공격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지금 검후는 혼자가 아니다.
이곳까지 추적해 왔고, 이드와도 마주쳤다. 당연히 검후 옆에 이드와 은색 기사단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검후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은색 기사단에 이드라니. 차라리 깔끔하게 검후를 포기하는 걸 고려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바벨에서도 검후님이 다시 전면에 나서는 건 부담스러울 테니,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검후가 자신이 공격당한 일과 감금된 사실을 밝히는 것은 바벨에서도 원하지 않은 사태일 테니까.
“같은 이유로 당장 어떠한 행동도 못 하죠. 수도에서 검후를, 그것도 저와 은색 기사단이 있는데 공격한다? 검후를 납치, 감금한 것 이상의 대사건이 될 겁니다. 그리고 저들 입장에서는 최대한 조용히 사건을 묻어 버리고 싶겠죠.”
하지만 이런 이드의 말에 쉴라가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검후가 일 년 동안이나 감금당했다. 어떻게 묻고 넘어간단 말인가.
이드는 격렬한 반응에 즉시 말을 취소했다.
“자자, 진정해요. 그냥 바벨의 입장이 그렇다는 거니까. 내가 묻어 두고 넘어가자고 하는 게 아니라고요.”
“헉헉. 죄송합니다. 갑자기 흥분해 버려서.”
“나야말로 새롭네요. 쉴라 경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넌 어쩌고 싶은데?”
최근 자주 얼굴을 붉히는 쉴라지만, 그렇다고 그런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충동은 있지만,
일단 애써 그런 감정을 무시하고 넘긴 이드가 검후에게 물었다.
어차피 자신이나 주변의 사람은 의견을 내놓을 뿐이다.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오로지 검후가 결정할 일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검후가 눈을 떴다.
“일단 이곳에서 기다려 보죠.
“그리고?”
“바벨에서 찾아온다면 만나 봐야죠. 아아~ 네 생각은 알고 있으니까 지금은 내 말을 들으렴.”
검후는 중간에 반발하려는 쉴라를 조용히 시킨 다음 말을 이었다.
“바벨이 제게 했던 짓을 용서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바벨의 간절함도 알 수 있었고.”
“간절함? 그게 바벨이 널 감금하고 있던 이유야?”
이드의 말에 검후는 라울의 협조 요청과 함께 초인의 폭주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이드와 라미아는 잠시 서로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초인의 폭주라니.
그 말에 정신의 관에서 초인들이 보였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검후의 납치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자신이라도 그런 문제가 있다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방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지만.
문제로 인해서 고통받는 자가 개인이 아닌 거대한 단체라는 점이 오히려 이런 사태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체란 때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이건 조용할 때 이야기해 볼 문제야. 개연성 없는 폭주가 혼돈의 파편 때문이라면, 이후 혼돈의 파편을 찾아내는 단서가 될 수도 있겠어.’
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검후의 주장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는가 싶을 때였다.
검후가 갑자기 새초롬한 눈을 하고는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어쩐지 라미아가 떠오르는 눈빛에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괜히 뜨끔한 이드가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뭐? 왜?”
“축제요. 막내들만 그렇게 귀여워하시면 곤란해요. 다른 아이들이 질투할 거라고요.”
“그건 그냥 겸사겸사…….”
“그리고・・・・・・ 축제는 저도 좋아하는데.”
그게 본심이냐!”
이드는 한심한 눈으로 검후를 보았다. 갑자기 그녀가 돌아온 후 쉴라가 푼수가 된 이유를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째서인지.
“……”
순간 알 수 없는 침묵이 방을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