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619화


1054화

“헙?”

시사이판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경계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갑자기 마주친 명예 후작, 그리고 그를 보고 놀란 라울의 모습까지였다. 직후 명예 후작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곧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저택 앞이 아닌, 알지 못하는 곳에 와 있다. 갑자기 사라진 명예 후작이 어떤 수를 쓴 것은 아닐까.

바짝 긴장한 그의 손에는 어느새 어디서 나왔는지도 알 수 없는 두 자루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기형의 날에 와이번의 이빨 같은 흉악한 돌기가 달린 형태였다.

“후…… 긴장 풀어. 안전한 곳이니까.”

그때 들린 라울의 목소리.

시사이판은 솔직히 안도했다. 순간 그의 손에서 단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라울의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린 건 왜일까?

“휴~ 놀랐지 않습니.. 이런 괜찮으십니까?”

라울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시사이판은 반쯤 주저앉은 라울을 보고는 급히 그를 부축했다.

그러다 찢긴 라울의 옷과 왼쪽 어깨 부근의 할퀸 듯한 상처에 인상을 썼다.

“갑자기 이게 웬 상첩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주십시오.”

적당한 곳에 라울을 앉힌 시사이판은 곧 물과 포션, 붕대를 준비해 상처를 치료하며 물었다.

“뭐긴 뭐겠어? 우릴 잡으려는 명예 후작의 손아귀에서 간발의 차로 도망친 거지.”

“역시 그 빛은 라울 님의 것이었군요.”

시사이판은 다시 한번 안심했다. 그리곤 상처를 물로 씻으며 혀를 찼다.

“이거 흉악한데요. 마치 그리핀이 할퀸 것 같습니다. 이게 명예 후작의 솜씨란 거군요?”

“그렇지. 상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깨를 뜯길 뻔했다고. 진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어.”

라울은 본인의 어깨를 살펴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깨에서 상박 중간까지 다섯 개의 고랑이 깊게 파였다.

정말 그리핀이 할퀸 것 같이 속 근육 깊숙이까지 드러나 보였다. 한데 흥분 때문인가. 의외로 고통은 적다.

대신 소름이 돋았다. 찰나라고 해도 좋은 짧은 순간에 그 멀리서 날아와 이런 공격을 하다니. 진심으로 ‘아슬아슬’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였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괴물이야.”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닙니까.”

라울은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몇 번의 충돌을 통해 이드의 힘은 확인했다. 거기에 최근엔 토벌의 끝에서 그가 메르시오와 싸웠던 일에 대한 보고도 들었다.

하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확인하는 이드와 직접적으로 마주한 이드에 대한 인상은 너무도 달랐다.

특히, 파티에서 인사를 나눴던 라울로서는 그간 가지고 있던 이드에 대한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자넨 이해 못 할 거야.”

“어차피 명예 후작은 라울 님이 상대할 거니까 저는 이해 못 해도 상관없습니다.”

“……상관 있게 해 줄까?”

“그럼 바벨에서 나갈 겁니다. 그나저나 라울 님이 다치셨으니, 돌아가면 하렘 비서 군단이 절 죽일 듯 들들 볶아 댈 겁니다.”

“하렘은 뭐냐?”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저희끼리는 라울 님 비서들을 그렇게 부른지 제법 됩니다.”

“…..”

처음엔 부러움이 섞인 장난이었지만, 비서들이 부정하지 않으면서 묘하게 초인들 사이에 고착화되어 버렸다.

그런 얘길 하는 사이 시사이판이 붕대를 묶고 그 위에 남은 포션을 부어 흡수시키는 것으로 처치를 끝냈다.

“그런데, 이젠 어쩌실 겁니까? 돌아갑니까?”

“아니. 아직 할 일이 있다.”

“검후에 대한 추적에서 명예 후작이 튀어나왔지 않습니까. 이정도면 은색 기사단만 제외하고, 의심하던 게 모두 풀린 거 아닙니까?”

“아니. 은색 기사단도 거기 있다. 명예 후작 옆에 있던 여성 중 두 명은 그에게 무공을 배우다가 최근에 은색 기사단에 입단했거든.” 과연 바벨의 정보통.

중요 인물이라고 하기는 애매한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얼굴까지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는 라울이다.

“그럼 더더욱 돌아가셔야죠. 라울 님과 저 단둘이 검후와 명예 후작, 거기에 은색 기사단까지 상대하는 건 미친 짓입니다. 전 은색 기사 하나 상대하기도 벅차다고요.”

무려 직속 상관을 앞에 두고 있는 대로 약한 소리를 해대는 시사이판이지만, 라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나도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얼굴만 볼 거야. 얼굴만.”

“어이쿠. 어디 헤어진 연인이라도 만나십니까? 그쪽에서 잘도 보자고 하겠습니다. 아니다. 당장 저희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시 수도에 발이라도 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여기 안티로스 밖은 맞죠?”

그와 함께 보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시사이판.

하지만 라울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다. 그제야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안 시사이판도 조금 굳은 표정이 되었다.

“진짜 검후를 만나려고 하시는 겁니까?”

“존 워스가 우릴 쳤어. 소드 팰러스에서는 그의 돌출 행동이라고 주장하지만 흥! 그 속을 누가 알까. 당한 이상 갚아 줄 뿐이지. 마침 발터가 돌아오면 적당한 자리가 마련될 테니 말이야. 하지만 검후가 나서는 순간, 이 흐름은 망가지고 우리까지 논란의 중심으로 끌려가게 될 거야. 거기에 일검왕이 손을 쓰면 오히려 흐름이 우리 쪽으로 역행할 가능성도 있고, 그건 막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요? 이 상황에 얼굴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검후도 검후지만, 황제는요? 황제도 사실을 알았을 거 아닙니까?”

라울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무시해. 내 짐작이 맞는다면 황제는 검후가 수도에 들어와 있는 것도 모른다. 둘이 만났다면 검후는 지금 황궁에 머물고 있었겠지.”

“그거 설마, 황제와 검후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게 사실인 겁니까? 그래서 일 년 전에 그…..”

“대충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짐작은 가는데. 그거 헛소문이야. 현 황제는 지독할 정도로 안정을 지키려는 인간이거든.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인물이지.”

대륙 최강국의 황제를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나.

하지만 비웃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린 라울에 시사이판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의 측근으로서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라울의 말에 모두 납득했다는 얘긴 아니다. 그냥 넘길 뿐.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래도 검후를 만나는 건 여전히 쉬울 것 같지 않은데요. 저희가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명예 후작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격해서잖습니까.”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시사이판에 라울이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냐? 뭐가 불만이야?”

“사지로 끌려갈 것 같아서 답답해서 그럽니다. 라울 님이 검후의 입장이면 만나자고 한다고 만나 주시겠습니까?”

시사이판은 자신들이 검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잊은 것 같은 라울을 잡고 설명했다.

검후에게 자신들은 배신자들과 손잡고 기습해 본인을 납치, 감금하고 협박한 죽일 놈들인 것이다.

특히 전신이 무기나 다름없는 검후의 기습을 우려해 드레스 대신 입혔던 민망한 옷차림은 당사자 입장에서 모욕감이 대단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저라면 보는 순간 검을 빼 들고 죽이려고 달려들 겁니다.”

“네가 찔리는 게 많아서 그런 건 아니고?”

순간 명치를 후려 맞은 듯 고개를 푹 숙이는 시사이판에 라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그랬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다른 사람 시키시고 돌아가시자고요.”

“불가. 네 말대로 고생한 검후야. 그러니 최소 나 정도는 나서야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지 않겠어? 서로 제법 얼굴도 익혔고, 무엇보다 만나려는 이유를 들으면 검후도 잠시 분노를 잊어 줄 거야.”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응. 소드 팰러스, 그리고 영혼의 관에 대한 정보.”

그 말에 시사이판의 눈이 번뜩였다. 소드 팰러스가 공공의 적이 된 건 아는 바지만, 라울이 영혼의 관에 대한 정보까지 거래 재료로 내놓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던 탓이다.

“미완의 마탑을 버리시는 겁니까?”

제국이 영혼의 관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어떻게 처리할지는 뻔한 일이다. 마탑에서 항복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정신의 관처럼 토벌당한다.

“버려야지. 벌써 두 번이나 주인을 문 개야. 멍청하게 세 번이나 물려 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러면 그간 투자한 게 너무 아깝잖습니까.”

“자네도 위로 올라오고 싶으면 잘 들어 둬. 아무리 아까워도, 또 손해가 커도. 상한 건 과감하게 잘라야 해. 그게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야.”

뭔가 섬뜩함이 느껴지는 라울의 말에 시사이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라울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것은 곧 마탑을 버리는 결정이 라울 혼자 내린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쉐어 가든이 무너지고, 검후를 빼앗긴 순간 바벨에서는 여기까지 내다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울이 나선 것이고.

시사이판은 다시 한번 자신이 조직의 말단 중 하나일 뿐임을 자각하며 내심 이를 갈았다.

‘이런 멍청한 꼴이 분해서라도 내가 성공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이런 다짐을 모르는 라울은 시사이판의 침묵을 다르게 여긴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자네도 당장 죽을 것처럼 긴장할 것 없어. 나도 무리해서까지 검후를 만나려는 건 아니니까. 우리가 먼저 만날 사람은 곧 수도에 도착할 발터다.”

“알겠습니다. 발터 님을 메신저로 쓰시려는 거군요.

“그래. 발터가 본격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검후와 조율해 두면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거기에 발터 님이 터트릴 폭탄에 대해서는 명예 후작도 알고 있을 테고 말입니다.”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군. 그럼 이제 움직이자. 안전하긴 해도, 여기서 먹고 잘 순 없으니까.”

“제가 길을 트겠습니다.”

라울의 말에 넣어 두었던 단검을 꺼내 수풀을 헤치기 시작한 시사이판이다. 그런 두 사람이 있던 곳은 이름 없는 작은 숲의 토굴이었다. 야생 동물이 잠자리로 사용하던 토굴 말이다.


이드가 사 온 음식 덕분에 축제를 즐기지 못한 저택 안의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이나마 즐길 수 있었다.

문제라면 그 기분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검후의 소녀 같은 투정을 넘긴 후, 저택 앞까지 찾아온 라울과 시사이판에 대해 쉴라가 직접 기사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그에 봄날 강아지처럼 기분이 좋아 방긋거리던 기사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냥감을 찾아 눈을 번뜩이는 맹수의 그것으로 변해 버렸다. 당연히 그에 휩쓸린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바짝 긴장해서 완전 무장 상태로 땀을 흘리게 됐다.

이드가 보기엔 헛고생을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런 가운데 검은 돌의 본부로 복귀했던 에린이 돌아왔다.

“일단 검은 돌의 모든 인원을 풀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이 몰려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적당히. 이 시기에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것도 없으니까.”

이드는 당부와 함께 마법으로 옮겨 놓은 라울과 시사이판의 초상화를 에린에게 넘겼다.

“그보다 에린은 토벌대의 도착과 소드 팰러스에 집중해 줘. 바벨에서 움직인 이상, 그쪽에서도 뭔가 움직임이 있을 수 있으니까.”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