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21화
1056화
술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본인과 페시딘의 잔이 비워지기 무섭게 술을 채우는 마르텔은 마치 폭주하는 말 같았다. 덕분에 그 큰 술병 속 내용물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르텔도 그때서야 술병을 손에서 놓았다.
“크하~ 이제야 좀 속이 뚫리는 것 같아. 그렇잖나?”
“뚫리긴 개뿔. 내 볼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자넨 술 마시는 방법이 잘못됐어!”
“흥, 그딴 소리는 마시기 전에 하라고. 좋은 술을 먹여 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꿍얼거리는 마르텔이 남은 술을 마저 비우고 잔을 내려놓자, 페시딘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래, 인정하지. 가끔은 자네와 이렇게 마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말과 함께 술이 남은 잔을 흔들자 진득한 향이 솟아올랐다. 마르텔이 좋아하는 독주 특유의 향이다. 분명히 말해 그의 취향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갑갑한 마음이 풀리고,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을 뺄 수 있어 좋았다. 물론 독주의 효과는 아니다.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마르텔 때문이다. 언제나와 같이 익숙한 모습. 과연 이래서 친구가 좋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페시딘은 곧 머리를 휘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자신이 잠시 미쳤던 거다. 심심하면 사고를 치는 데다가, 술을 물처럼 마시는 친구가 뭐가 좋을까? 거기에 지금 자신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원인도 바로 그 친구라는 놈 중 하나가 제공한 게 아니던가.
‘존~ 이 빌어먹을 놈! 친구라고 남은 것들이 어째 다 이 모양인지 불행하다, 불행해.’
지금 자신의 고생이 누구 때문인지 떠오른 페시딘이 부르르 주먹을 떨었다.
쪼르르륵.
술잔을 채우던 마르텔이 그 모습을 보곤 입을 쩍 벌리며 웃었다.
“클클클. 아직 술이 모자란 모양인데, 더 마셔. 아. 그리고 그 잔, 내가 아끼는 거다. 힘 주다 깨 먹지 마라.”
“그럼 가져오질 말든가. 젠장…… 머리가 복잡해. 언제나처럼 자네가 친 사고였으면 차라리 해결이 쉬웠을 텐데. 이게 다 자네가 조용히 처박혀 있었기 때문일세.”
“뭐, 좋아. 내 탓이라고 해 주지. 그런데, 잊은 건 아니지? 내가 자잘한 것들을 많이 벌려 놔서 그렇지, 진짜 골치 아픈 사고는 모두 존의 몫이었다고.”
본인의 말처럼 마르텔과 관련된 사고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터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크게 복잡할 것도 없었다.
그에 반해 존 워스와 관련된 사고는 대부분이 그가 가진 초인 혐오에서 일어났다. 감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마르텔의 사고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은 존 워스가 검왕 중 일인이라는 점과 소드 팰러스의 힘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사고는 그렇게 조용히 덮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에 존이 벌인 사건은 심각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
“크으~ 그렇긴 하지.”
단숨에 술잔을 비운 마르텔도 인정했다.
평소 복잡한 문제를 싫어하는 그가 보기에도 이 일은 여간 꼬인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초인파, 토벌대, 마탑, 바벨 등등, 어이쿠, 다 세지도 못하겠네. 엮인 곳들만 해도 그 규모가 역대급이야. 만만한 곳이 하나도 없어. 그래도 자네라면 뭔가 방법이 있겠지? 괜히 끙끙거리고 있던 건 아닐 거 아닌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마르텔이 술병을 들이밀자, 페시딘이 불퉁한 얼굴이 되어서는 입을 열었다.
“사건을 틀어막는 건 어렵지 않아.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사건 자체를 정치적으로 끌고 가서 흐지부지되게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다만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면 이후에도 계속 걸리적거릴 거란 거네.”
이드나 검후가 알았다면 꽤 놀랐으리라.
소드 팰러스를 곤경에 빠트릴 것이라 예상한 존 워스의 사건을 이렇게 쉽게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을 테니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시딘은 그 복잡하고 골치 아픈 과정을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곤 꿀떡꿀떡 술 넘어가는 소리에 마르텔을 노려봤다.
어지르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다고, 누구는 생고생을 하게 생겼는데, 자기는 세상 편한 낯짝으로 술이나 마신다고?
“이번 일, 자네가 해결해 보는 건 어때?”
“갑자기? 뭐, 못할 건 없지. 정치는 자신 없지만. 흐흐흐.”
흉흉하게 웃는 마르텔.
순간 그 뒤로 커다란 회의장의 테이블을 뒤집어엎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착각일까?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던 페시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차라리 앓느니 죽지. 그 꼴을 어떻게 보나.
“하아~ 없던 걸로 하세.”
“자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블러디 혼은 개뿔. 뱀같이 능글맞은 놈. 술이나 부어라.”
그 말과 함께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한 두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술병을 완전히 비워 냈다.
적지 않은 독주지만 두 사람은 취한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서로 아는 것이다. 아직 나눠야 할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 꺼낼 주제가 앞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마르텔이었다.
“존이 했던 말에 대해서는 좀 찾아봤나?”
페시딘이 고개를 저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알아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야.”
“하긴. 초인 마법의 완성, 초인의 몰락. 어느 것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은 안다. 언뜻 관련 없어 보이는 그 둘은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만약 초인 마법의 완성에 성공한다면, 그건 세상이 뒤집힐 일대 사건이 될 것이다.
페시딘은 그제 밤, 말없이 돌아온 존과의 만남을 회상했다.
엄청나게 골치 아픈 일을 벌여 놓은 것에 비해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
굳이 특이한 점을 들자면 기묘하게 인상이나 기척이 흐려졌다는 정도?
하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십 년 알아 온 친구의 얼굴을 누가 그렇게 자세히 볼까.
그런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사과였다.
문제라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정확한 대답을 회피했다는 것이다.
“그간 쌓은 우리 우정을 봐서 더 이상 묻지 말아 주게. 대신 나 때문에 고생할 자네와 우리의 소드 팰러스에 도움이 될 소식이 있네.”
“약은 놈. 그걸로 봐 달라는 거냐?”
조용히 분노 중인 페시딘 때문일까. 마르텔이 과장해서 화난 얼굴을 했다.
“그런 의미는 없어. 하지만, 자넨 사고 친 후에 이런 걸 가져온 적도 없잖아?”
“여기서 내 이야기가 왜 나와!”
갑자기 자신에게 튀려는 불똥에 마르텔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는 중에도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페시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무슨 이야기인지부터 듣지.”
“좋은 판단이야. 가장 중요한 건, 곧 초인 마법이 완성될 거라는 거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초인들의 시대는 몰락하게 되겠지. 지금 당장이야 내가 벌인 일로 시끄러울 테지만, 그것도 잠시일세. 초인 놈들은 곧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할 처지가 될 거야.”
“……그 말의 근거는? 자네 설마, 그런 뜬소문을 듣고 마탑과 같이 일을 벌인 건가?”
“설마, 내가 마르텔도 아니고, 마법사 놈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순진하게 그대로 믿을까. 내 눈으로 직접 봤네.”
“무엇을?”
“자네들도 들었을 거네. 정신의 관에 나타난, 혼돈의 파편이라는 괴물. 나는 마법사 놈들이 그 괴물과 손을 잡은 것을 봤네. 알아보니 그 괴물도 초인들을 지독히 싫어한다던가. 그래서 초인 마법의 완성에 핵심이 될 요소를 넘겼다고 하더군.”
설마 존 워스가 가져온 소식이 이런 것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에 페시딘의 얼굴에 어려 있던 분노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질끈 입술을 문 페시딘이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우리 셋이 쌓아 온 세월에 걸고서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진실이네. 자네들도 들었으니 알 테지? 초인 마법이 완성되면
“ᆞᆞᆞᆞ초인의 초인기를 관리할 길이 열리게 된다.”
미완의 마탑의 탑주가 후원을 부탁하며 했던 말이었다.
“역시 기억하는군. 그럼 슬슬 대비하는 것이 좋을 거네. 그런 의미에서, 당장은 고생스럽더라도 강하게 대처하게.”
“자네 말이 진실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리고 그때가 바로 우리가 제국의 그림자에서 나와 세상에 우뚝 설 절호의 기회가 될 거야.”
“그 문제는 자네 좋을 대로 하게. 나는 어차피 자네를 지지하고 따르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러더니 할 말 다 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존 워스.
“뭐야? 갑자기 왜 일어나는데?”
그에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눈만 껌뻑거리던 마르텔이 급히 따라 일어났지만, 페시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들었다.
“빠져 있을 건가?”
“그래야지. 자네도 내가 없는 쪽이 일을 수습하는 데 편하잖아.”
“그렇기는 하지. 대신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그것만은 꼭 지켜 주게.”
“그러도록 하지. 내가 빠지려는 건 따로 하려는 일이 있어서야. 아, 자네들은 아직 이 일에 대해서도 모르겠군. 바벨이 검후를 빼앗겼네.”
벌떡.
순간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페시딘이 벌떡 일어났다. 너무 놀란 탓이었다. 마르텔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지간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는지 두 사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병신 같은 놈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애초에 검후를 살려서 가둬 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언제, 어떻게 일어난 일인가?!”
동시에 쏟아 내는 화와 의문이 시끄럽게 방 안을 울렸다. 방음이 되지 않는 방이었다면 당장 성안에 있는 기사들 전부가 달려올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럼에도 존 워스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이틀 전이네. 나는 어제 알았고, 지금 돌아온 것도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야.”
“자세한 설명을 해 주게.”
“글쎄. 나도 대략적인 정보만 얻은지라. 그나마도 혼돈의 파편에 대해 추적하다 알았네.”
존 워스는 마탑에서 검후를 노렸다는 사실만을 제외하고서 검후의 구출 과정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그러는 중에도 은색 기사단과 이드의 존재에 대해서는 분명히 했다. 그들이 검후를 구출해 갔음을 말이다.
“음…….”
“음……”
뜨드드득.
희미한 신음과 함께 틀어쥔 페시딘의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색 기사단과 이드라니. 그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래서야 존 워스의 사고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때 존 워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일단 지금은 검후와 명예 후작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네. 다만 확실한 건, 아직 황제와 접촉한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야. 아마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저 그렇다는 거야. 어쨌든, 나는 이제부터 그들을 쫓을 거네. 자네가 날 위해 움직이는 만큼, 나도 우릴 위해 움직여야지. 혼돈의 파편과 명예 후작의 관계가 좋아 보이지는 않더라고.”
“자네…….”
“그러니 걱정 말게. 검후는 절대 황제를 만나지도, 세상에 공식적으로 나서는 일도 없을 테니까.”
존 워스는 그 말을 끝으로 페시딘과 마르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렇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