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25화
1060화
문을 닫은 후,
이드는 발터의 기척을 쫓아 기감을 확장했다.
발터는 빠르고 은밀하게 저택 거리를 벗어나 거의 직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안티로스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드는 어쩐지 발터의 목적지를 알 것 같았다. 그건 어쩌면 이미 그곳에 가 본 적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발터가 본인의 저택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이드는 기감을 거둔 뒤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발터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어.”
“그럼 라울도 그곳에 있겠군요.”
검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발터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기운을 놓치지 않은 이드의 기감에 대해서는 검후를 포함한 모두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 정도 실력엔 익숙해져 새삼 놀랍지도 않은 것이다.
“에린이 알면 충격 좀 받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끼는 라미아다. 그에 가슴이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온다.
단단한 골렘의 몸으로 저런 세심한 부분까지 컨트롤 하는 걸 보면 새삼 신기할 뿐이다.
“별로. 저번에 보니 각오하고 있는 것 같더라. 상대가 무려 바벨의 헤드 중 하나잖아.”
검은 돌의 실력은 분명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실력이 라울에 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드가 미리 검은 돌을 깔아 뒀던 것도 잡겠다는 마음보다는 경고의 의미가 더 강했고.
“그래도 아쉽네요.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이드 역시 검후만큼이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둘째 치더라도 검후의 체면이 있지, 상대가 정중히 청한 만남을 허락해 놓고 갑자기 공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만남이 끝난 후에도 별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다.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시 발터의 저택으로 돌아가진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두 시간 후 있을 만남의 결과에 따라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검후와 짧은 이야기를 나눈 이드가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쉴라를 비롯한 은색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은 둘이 대화하는 동안 조심스럽게 검후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라울이 찾아오면 만나겠다고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쉴라가 대표로 말했다.
“굳이 검후님께서 그런 자를 직접 만나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몇 번을 말하지만, 괜찮대도 그러는구나. 나보다, 너희들이야말로 그렇게 멍하게 괜찮은 거니?”
“네?”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검을 들고 돌진하지 않는 것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싫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스폴의 말에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당장 달려가 목을 쳐도 모자를 놈들을, 정중히 맞이할 준비까지 해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복장이 터질 것 같다.
그런 기사들의 반응에 검후의 눈이 샐쭉해졌다.
마침 그 모습을 본 이드는 걱정스러운 한편, 궁금증이 일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간 그가 본 검후는 익히 알려진 것과 달리 장난기 있고, 뒤끝에 고집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검후는 마치 악마가 속삭이듯 스폴을 비롯한 기사들을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그 말도 이해해. 하지만 생각해 보렴. 단순히 그렇게 넘기면 너희들의 기분이 풀릴까?”
“네?”
“기사면 기사답게, 기사다운 방식으로 너희들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아니니? 분노를 꼭 전투로만 보여 줘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지 않니?”
옆에서 무슨 말을 하나 듣고 있던 이드는 그런 방식이 뭔가 하고 눈을 굴렸다.
마침 눈이 마주친 일리나도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엘프인 그녀도 인간 세상의 시스템을 잘 모르긴 마찬가지일 테지.
반대로 당사자인 스폴은 바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지 작은 환호와 함께 눈을 반짝였다.
“당연하죠. 당연히 그래야죠! 온 힘을 다해서 우리 은색 기사단의 힘과 분노를 보여 주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가서 준비하렴.”
“기대해 주세요. 케마란, 네리베르. 너희들도 따라와!”
“네? 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 달려 나가는 스폴에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어리둥절하면서도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검후와 스폴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딱 한 가지. 곧 찾아올 빌어먹을 놈들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생겼다는 건 확실하게 눈치챘기 때문이다.
곧이어 기사들을 집합시키는 스폴의 고함이 들려왔다.
이드는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는 검후에게 말했다.
“너, 일부러 그랬지. 이 밤에 소란이 커지면 사람들이 몰린다고.”
“괜찮아요. 큰 소리가 나는 손님맞이는 아닐 테니까요. 무엇보다 그간 제 아이들의 가슴에 쌓인 울분을 조금이라도 풀어 줘야 하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아무렴 저쪽에서 먼저 요청한 만남이다.
칼을 빼 들기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라울 측에서 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이쪽은 때리고 저쪽은 맞기만 해야 하는 상황. 그야말로 좋은 기회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은색 기사단을 얕보지 말라는 솔직한 위협이기도 하고요.”
“…..그런 뜻을 전할 것 같으면 너야말로 옷이나 갈아입고 나서지 그랬어? 먼지에, 땀투성이잖아.”
이드와 마찬가지로 대련하던 모습 그대로인 검후는 그의 말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단순히 땀과 먼지뿐이 아니었다. 옷이 흐트러지다 못해 찢어진 곳도 있었으며, 머리도 미친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산발이었다.
그에 쉴라도 답답했는지 하소연하듯 말했다.
“저도 말렸지만, 이 모습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뭐야. 일부러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거였어?”
이드가 묻자 그제야 머리를 쓸어 넘기던 검후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했다.
“대놓고 내가 기분이 나쁘다.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다. 각오해라. 이럴 순 없으니까요. 이런 모습을 보여 줘서 간접적으로 내 분노와 수치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일종의 제스처예요. 그리고 제 경우엔 한 가지 더해지기도 하죠. 이만큼 이를 악물고 힘을 비축하고 있으니, 각오하라는.”
“그건 네가 검후이기 때문에?”
“그렇죠. 같은 제스처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속에 든 의미는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이드는 새삼 검후가 황족임을 실감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마냥 철없는 말괄량이 같은 모습만 기억에 남았었는데, 지금 이 짧은 순간엔 달랐다. 정치가 생활, 그 자체나 마찬가지인 황족으로의 태가 보인달까.
갑작스러운 발터의 방문에 차림새까지 신경 써서 의미를 담을 생각을 하다니. 이드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라울하고도 그 모습으로 만나는 거야?”
“그건 아니죠. 그와는 이미 갇혀 있는 상태에서 너무 거친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 이번엔 오히려 철저하게 준비해서 검후이자 어엿한 황실 어른의 면모를 보여 줄 거예요.”
그 말에 쉴라가 마음이 퍽 놓인 얼굴로 한숨을 쉰다.
내심 그 문제로 전전긍긍 중이었던 것이리라.
어째 검후가 실종되어 있을 때보다 더 고생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그의 착각일까.
이드는 내심 그녀를 응원하고는 지나가듯 물었다.
“그럼 어서 준비해. 두 시간이 긴 건 아니잖아. 도와줄 것 있으면 말하고.”
“그럼 라미아와 일리나 님을 좀 빌려주세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검후에 이드가 영문을 몰라 듯 눈을 끔뻑거렸다.
두 사람이야 별거 아니라는 양 고개를 끄덕이지만, 은색 기사단이 있는데 왜 굳이 두 사람이 필요하단 말인가?
“두 사람은 왜?”
“쉴라가 이것저것 준비해 두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기합이 많이 부족하거든요. 하지만 라미아가 가지고 있는 보석들과 일리나의 도움을 받으면 최고로 화려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라미아가 가끔 자랑하면서 보여 주는 보석들을 사용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어쩐지 후반에 나온 말이 진심인 것 같은 건 착각일까?
하긴 진심이면 또 어떤가. 달라는 것도 아니고, 빌려 달라는 건데. 게다가 어차피 그런 관리는 라미아의 소관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여자로서의 준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어 이드는 더 이상 깊이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난 모르겠으니까, 그런 문제는 알아서들 상의해 봐. 난 스폴 쪽으로 가 볼 테니까.”
“고마워요!”
이드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며, 뒤에서 들려오는 검후의 목소리에 대충 손을 흔들었다.
적과의 동맹이 결정될지도 모를 만남을 앞에 두고, 심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이 난 것 같은 목소리.
어쩐지 당장이라도 귓가에 근심 가득한 쉴라의 한숨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그렇게 요란한 두 시간이 지났다.
기사들, 혹은 검후의 준비.
그 어느 쪽에도 필요가 없어 일찌감치 접객실에 들어와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이드는 저택 대문 앞에 나타난 세 명의 남자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네. 시간 약속은 정확하네.”
까딱.
말과 함께 이드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저택의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열렸네요.”
“저쪽에서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지. 자, 들어가자.”
긴장했는지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 시사이판의 말에, 당연한 말을 하냐는 투의 핀잔과 함께 라울이 앞장섰다. 시사이판이 그런 그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저기, 라울 님. 아무리 생각해도 전 딱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내가 볼 때도 그가 꼭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데.”
“감사합니다. 보세요. 발터 님도 저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시사이판은 두려운 듯, 저택을 연신 돌아보며 애원 조로 말했다. 그러나 라울의 마음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응, 안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와 넌 있어야지. 검후와 가장 많이 얼굴을 마주했잖아. 묵은 감정을 풀어야 대화가 매끄러워지는 법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라. 설마 내가 널 죽이겠니, 아니면 죽게 두겠니.”
“하아…… 젠장. 알았습니다.”
무정하게 반짝이는 라울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시사이판은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잡고 있던 라울의 소매를 놓았다. 여기서 더 반발을 했다가는 검후가 아니라 라울에게 내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라울은 그런 시사이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 순간부터 세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런데 정원을 절반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마치 바람이 지나간 듯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그러자 세 사람의 걸음이 묘하게 느려졌다.
동시에 시사이판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라울과 발터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발터였다.
“굉장한 살기군.”
“그러게. 이거 살아 돌아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마치 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기운.
그러나 그 한 올 한 올은 청량한 밤바람이 아니라, 차갑게 정련된 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