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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42화


1077화

네리베르는 몸을 추스르는 한편, 황녀와의 대련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패하긴 했지만, 무척이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제 난화십이식에 입문한 입장에서 보면 한발 앞선 황녀의 검에 배울 점이 많았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익숙한 기척과 함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그걸 지냐? 그간 수련한 게 아깝다.”

“갑자기 왜 시비야?”

네리베르가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이미 케마란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잘 보고 있어. 이 언니가 이번에야말로 이겨서 바보의 원수를 갚아 줄 테니까.”

“이 멍청이가 뭐라는 거니?”

“갔다 올게.”

“내 말 듣고 있니?”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케마란의 모습에 기가 막힌 네리베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붙어 다닌 시간이 얼마인데 퉁명스럽고 바보 같은 말 속에 담긴 뜻을 모를까.

“이겨 버려. 멍청아.”

네르베르는 본인에게만 들릴 듯 작은 목소리로 응원했다.


황녀에게 충분히 숨을 돌릴 시간을 준 검후가 대련의 주인공들을 불러 세우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승부는 내 신호가 아니라 어느 한쪽이 승패를 인정할 때까지. 시작!”

“기사도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사도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검후의 신호가 떨어지고, 두 사람은 다시금 자신들의 무기를 상대에게 겨눴다.

다만 앞선 대련과 달리 곧장 서로를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드의 응원에 힘을 낸 케마란이지만 아직 부담스러운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녀는 처음 접하는 링스피어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살피고자 했다.

그러나 탐색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분명 대련 상대 무기로서의 링스피어는 낯선 병기지만, 토벌 당시 가까이서 사용하는 모습을 수차례 보았기 때문이었다.

‘찌를 때는 창. 휘두를 때는 리치가 긴 대검. 두 요소를 변칙적으로 운용하기도 하지만 저 병기의 근본적인 운용 형태는 결국 창이다.’

싸움의 기본은 적을 아는 것이다. 또 그중에서도 무기에 대해 파악하는 게 절반이라고 했다.

링스피어에 대한 나름의 정리가 끝나자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길이 보였다. 황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충분히 쉬었음에도 아직 네리베르와의 대련으로 인한 열기가 남아 있던 것이다.

사아악.

황녀의 검이 바람결을 가르며 유려하게 날았다. 목표는 차례대로 창날과 창봉, 그리고 케마란의 손이었다.

이렇게 순서를 정한 이유가 있었다.

링스피어의 날이 회전하며 계곡을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황녀의 가슴을 향해 날아올랐다.

휘리릭.

이와 같은 케마란의 대응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쩌렁!

“크흡. 무…… 거워!”

예상한 공격이기에 막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탄력을 이용해 안으로 뛰어들려 했다. 창을 상대할 때는 거리 조절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의 충돌로 발이 멈춰 버렸다.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링스피어가 중병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무게감과 충격은 마치 커다란 철벽을 두드린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황녀는 그런 상황 속에서 진짜 문제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반짝이는 케마란의 눈.

‘보여요. 황녀님!’

황녀로서는 두 수 앞을 내다본 공격이지만, 케마란에겐 그 의도가 훤히 보였다. 같은 난화십이식을 익히고 있다는 까닭이 컸다.

거기에 더해 최근 들어 매일같이 보는 것이 검후의 수련이었다.

완벽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듯한 검후의 난화십이식에 비하면 황녀의 검법은 그림자 수준. 진체를 보았으니 그림자의 형태를 짐작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케마란은 난화십이식을 링스피어에 맞게 고친 이력이 있다. 그것이 재능이든 노력에 의해서든, 초식에 대한 이해가 있지 않고는 힘든 일. 다시 말해 초식의 이해도에 있어서는 케마란이 황녀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네르베르와 케마란의 가장 큰 차이였다.

“흐압!”

방어에 성공한 순간, 부담감에 굳었던 몸이 풀렸다.

케마란이 힘차게 링스피어를 휘둘렀다. 창처럼 찔러 황녀의 발을 가두고, 그 추진력을 동력 삼아 조이듯이 베었다.

타탕!

황녀가 급히 검을 막지만, 다시 허공을 찍고 돌아오는 공격은 오히려 더욱 강맹해져 있었다.

타타타탕!

“꺄아악!”

막거나 피할 때마다 강해지는 공격.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튕겨 나가고 마는 황녀다. 

“놓치지 않습니다! 대비하세요!”

이드는 그런 황녀를 향해 경고를 날리며 따라붙는 케마란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첩첩산중이 능숙해졌네.”

지금 황녀를 날려 버린 공격은 풍운십팔봉법 상의 첩첩산중이라는 초식이었다. 케마란은 그 초식은 매끄러운 솜씨로 펼쳐 낸 것이다.

특히 이드가 기뻐하는 이유는 난화십이식이라는 무공을 익히면서도 풍운십팔봉에 대한 수련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처럼 매끄러울 수가 없다.

풍운십팔봉법이 좋은 무공이기는 하나 결국 개방의 삼결 거지들이 사용하는 무공.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순식간에 난화십이식의 흐름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한데 저처럼 확실한 선명한 흐름을 가진다는 것은 두 무공에 같은 공을 들이고 있다는 증거.

무공을 가르친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끝에 가서는 난화십이식도 풍운십팔봉법도 링스피어 안에서 하나로 녹아 새로운 형태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건 아직 한참 미래의 일.

지금은 그저 풍운십팔봉과 난화십이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공존하는 모습을 구경할 뿐이다.

풍화. 견마지로, 난화, 상류풍운. 흑월운무, 혈화.

링스피어에 맞춘 풍운십팔봉법과 난화십이식이 어지럽게 황녀를 휘몰아쳤다.

베는가 하면 다리를 걸고, 찌르는가 하면 빈틈을 두드리는 예측 불허의 흐름에 황녀는 하염없이 뒤로 물러서기 급급했다.

특히 그녀의 눈을 어지럽히는 건 풍운십팔봉법이었다. 그 위력은 난화십이식에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려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개방의 무공이다. 특유의 천방지축 초식들은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다.

바로 지금의 황녀처럼 말이다.

‘이 상태로는 몰리다 쓰러질 뿐이야.’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황녀가 짧은 순간 냉정함을 찾았다.

이미 혼란에 빠진 검은 난화십이식이 아닌, 알 수 없는 검로를 그리고 있었다. 토벌전에서 다수를 상대할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하나하나의 검로를 따로 놓고 본다면 난화십이식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은 다행이랄까.

그런 부분까지 무너졌다면 검후를 볼 낯이 안 섰을 것이다.

‘할마마마가 지켜보시는데 이렇게 질 수는 없어. 일단 재정비가 필요해.’

생각과 동시에 분영화로 허공에 벽을 세운 황녀가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케마란은 거기까지 따라붙지 않았다.

“후우~ 후우~’

그걸 확인한 황녀가 그제야 숨을 골랐다.

마주한 케마란 역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모양새가 아무래도 힘이 부족해 쫓지 않은 것이 아니라, 큰 공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잘됐어.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니까.’

지금의 흐름이 이어지면 앞선 대련처럼 자신이 진다. 네리베르는 무난하게 패배했다면, 자신은 좀 과격하게 쓰러지는 것이 다를까. 예측불허의 링스피어는 지금으로서는 대응 불능이었다. 옆에서 보던 것과 직접 상대하는 것은 너무 달랐다.

어쭙잖은 지식으로 링스피어의 근본적인 운영 방식이 창술이라고 쉽게 정의 내렸던 좀 전의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았다.

동시에 검후가 원망스러웠다. 과연 그녀가 이 차이를 몰랐을까.

‘할마마마는 무공을 가르쳐 주실 땐 너무 엄하신 게 문제야. 이건 내게 지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쉽게 지진 않을 거다.

황녀는 케마란의 준비가 끝난 것을 보고는 숨을 배꼽까지 끌어 내렸다. 그에 자극된 내공이 전신으로 뻗어 나가며 단번에 공명했다. 내공의 흐름을 따라 검까진 전해진 공명은 아지랑이처럼 검에서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마찬가지로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던 케마란이 링스피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겼다.’

제대로 정제되지 못한 황녀의 검기에 비해 링스피어에 맺힌 검기는 투명하고 날카롭다. 초식 이전에 내공에서 이쪽이 이기고 있다.

‘아니지. 괜히 설레발 치다 지면 네리베르가 죽을 때까지 놀릴 거야.’

바보라고 놀리고 원수를 갚아 주겠다고 하고 나온 이상, 그런 결과는 죽어도 싫었다. 그에 승기를 잡았으면서도 더욱 긴장을 놓지 않던 어느 순간. 케마란과 황녀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화살처럼 달려 나갔다.

치지지직.

아직 융화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검법의 난화와 봉법의 풍운일로가 동시에 펼쳐졌다. 그에 따라 링스피어의 창날이 둘로 갈라지고. 짜자자작.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던 검이 허공에서 떨어지더니, 번개를 닮은 궤적을 그려 내며 충돌했다.

퍼어엉!

충돌의 여파는 작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영향이 길지도 않았다. 각자 최선을 다한 마지막 공격이었기에 결과는 오히려 금방 났다. 투둑. 투둑.

검을 놓치고 털썩 주저앉은 황녀의 코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도 양쪽에서 모두.

‘저 정도 피면 혹시라도 문제는 없겠지?’

케마란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달이요~ 배달이요~”

“그거 말고 저거 주세요. 뻔히 신선한 거 두고 왜 그걸 주는 거예요? 누군 눈이 없는 줄 알아요?”

시끌시끌하지만 활기차다.

며칠 만에 밖으로 나온 이드는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에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과연 구경할 것들이 많았다.

축제의 영향이 아직 이어지는 듯했다. 현재도 그와 다른 의미로 황궁이 소란스러웠다.

그 까닭에 안티로스에 모여든 사람 중 많은 수가 돌아가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그중에 여기저기 구경하는 이드는 딱 수도에 올라온 촌놈의 모습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를 노리는 좀도둑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 가득한 거리를 걷는데도 누구 하나 이드를 인식하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이드는 꼬치 하나를 들고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황녀와 케마란의 대련이 있은 지도 이틀이 지났다. 쌍코피가 터진 황녀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고, 다음의 승리를 다짐했다. 검후가 바라는 형태로 잘 마무리가 되었다고 할까? 그 후 충분히 쉬고 회복한 황녀를 이드가 다시 황궁으로 데려다주었다. 다행히 다시 황녀를 마중 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직은.

‘은근히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드는 꼬치를 우물거리며 눈치를 보던 검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가 부탁하면 거절하기도 힘들기는 했다. 좌우간 그렇게 조용한 중에 어제 에단과 에린이 황궁을 침입하려던 자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가지고 찾아왔었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어요.”

이드를 만난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고개를 숙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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