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46화
1081화
자신들이 초인이 된 이유를 알았다. 과연 어떤 기분일까?
이드는 라울의 속이 궁금했다.
운이 좋아서, 혹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었다. 그저 혼돈의 파편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어찌 보면 용사처럼 마왕과 싸우기 위해 선택받았으니 영광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삐딱하게 보면 결국 싸움의 도구가 된 셈이었다.
그런 기분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요소가 당자사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버서커 현상이다. 눈깔이 뒤집혀서 아무나 공격해 대는 통에 친인 중에 사상자가 나오기까지 하니, 어떻게 영광이라고만 여길까.
아무렴 신적 존재가 아니면 초인을 탄생시킬 수 없다지만, 부작용이 이래서야.
차라리 초인이 혼돈의 파편을 막기 위한 용사들이라고 정확히 못 박아 주는 계시라도 있었다면 기쁘게 싸웠을 것이다.
초인 발생 초기의 혼란도 없었을 테고.
그러나 어쩌겠는가. 신관과 신전이 있는 신과 달리 별은 계시를 내리지 못하는 것을. 초인들에겐 불행하게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인의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새롭게 인식 중이었다.
‘당장 검후만 해도………….’
검후는 누가 뭐래도 라울이나 바벨과 가장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금이야 필요에 의해 협력 관계가 되었지만, 그만큼 쌓인 감정도 깊다. 제국의 황족으로서, 또 존경받는 검후로서 억압당하고 있던 때의 분노를 쉽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털털한 모습으로 티를 내지 않아도 그 속을 어찌 짐작하지 못할까.
한데 그런 그녀가 초인의 발생 이유를 알고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바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건 대의를 위해 개인의 분노를 삭이는 거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리 분노가 커도 그녀가 당한 일은 개인의 사정, 좀 더 넓게 보더라도 제국의 일이다. 그에 반해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초인은 대륙 전체가 달린 문제다.
꼭 단체가 개인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경우라는 게 있다. 그러니 당연히 검후도 개인적인 분노만으로 초인을 몰아붙이는 일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검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다.
겨우 놀란 감정을 수습한 듯 라울이 두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들었다.
“증거는・・・・・・ 없겠군요?”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다만 조만간 증언해 줄 존재가 돌아올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렴 세레니아의 반지를 증거로 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사념이 사라진 이상 증거가 되지도 못할 것이고.
어차피 그게 아니라도 드래곤들이 돌아오면 쉽게 해결될 이야기였다. 감히 드래곤이 직접 증언하는 일을 거짓이라며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휴우. 저희 초인들의 발생 이유가 그런 것이었다니. 궁금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허탈하군요. 그럼 저희를 초인으로 만든 존재는 신입니까?”
“혼돈의 파편에 대한 자료를 보셨다면 알겠지만. 그들 역시 창조주의 자식. 신들은 안타깝고 가여워할지는 몰라도, 혼돈의 파편 자체를 막지는 않습니다.”
“……바벨 차원에서 신전에 기부하는 건 그만둬야겠군요.”
아마 이유도 모른 채 거액의 기부금이 줄어든 각 종단으로서는 어리둥절할 터다.
“그런데, 그럼 신도 아니면서 신만이 가능한 일을 대체 누가 했다는 겁니까?”
“별입니다. 초인은 정령과 같이 별에 속해 있는 거지요.”
“별이라. 훗,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마음에 듭니다. 차라리 신보다 낫군요.”
비꼬는 듯하지만 라울이 지은 미소에는 진심이 보였다. 함께 발버둥 친다는 게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럼 정보에 대한 가치를 계산해 보죠.”
“기대하겠습니다.”
종이와 펜을 꺼내 드는 라울에 이드가 기대와 관심을 가졌다. 정말 궁금했다.
과연 라울은 이 정보의 가치를 얼마로 보고 있을까? 그게 곧 그가 받은 충격의 값인 셈이었다.
잠시 후, 한참 뭔가를 적어 나가던 라울이 종이를 내밀었다.
“읽어 보고 이상이 없다면 서명하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계산과 동시에, 앞서 말했던 계약서를 작성한 모양이다. 이드는 받아든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본래 이런 계약은 라미아가 주로 살피지만, 이번 건은 굳이 라미아를 부를 필요도 없을 만큼 간단했다.
어차피 이드와 라울이 했던 이야기를 글로 옮겼을 뿐이니까. 중요한 것은 정보의 가치를 산정한 부분이었다.
“・・・・・・ 이와 같은 조건에 따라 바벨은・・・・・・・”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던 이드의 두 눈에 놀라움이 차올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계약서를 읽다 말고 라울을 돌아볼 정도다.
마침 동일한 계약서의 작성을 마친 라울이 그걸 이드에게 넘기며 말했다.
“계약 내용은 만족하십니까?”
“솔직히 놀랐습니다. 정말 이대로 좋은 겁니까?”
“정보에 대한 가치는 제대로 계산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불만이 있으십니까?”
“아니, 불만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조건이 너무 좋습니다.”
이드는 계약서에 적힌 요구 조건을 다시 읽었다.
계약 내용에 따라 이드는 바벨에 10억 골덴을 요구하거나, 바벨을 적대하지 않는 조건에서 5위에서 50위 내의 초인을 2회 용병으로 요청할 수 있다.
실로 무시무시한 조건이었다.
어느 쪽이든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왕국 하나는 충분히 뒤집어엎을 수 있는 규모였다. 막말로 욕심만 있다면 왕좌를 노려볼 법하다고 할까? 다시 말해 라울이 받은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아마 당장 확인이 가능한 증거가 있었다면 값은 두 배로 올랐을 겁니다. 겸사겸사 검후께 잘 말씀드려 달라는 부탁의 의미도 숨어 있고요.”
“하하하. 그런가요.”
“사실 이 정보를 이드 님이 가져오지 않으셨다면, 이런 값을 책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폐기했겠지요.’
별이 혼돈의 파편을 막기 위해 초인을 만들었다니. 확실히 바로 믿기에 어려운 소리기는 했다.
이드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신기하군요. 바벨에서 날 그 정도로 신뢰하다니.”
다른 사건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당장 쉐어 가든을 무너트리고 검후를 빼내는 것만으로도 바벨이 입은 피해는 실로 크다.
이드의 행동 하나하나에 원망을 하는 게 당연할진대, 오히려 신뢰라니.
그러고 보면 라울도 이드에게 적의를 비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굳이 저희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으시죠. 이드 님에 대해서는 저희도 철저히 분석했습니다.”
“신기하네요. 감정적으로 그렇게 딱 떨어질 상황이 아닐 텐데.”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됩니다. 저희의 싸움이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니까요.”
이드는 차근차근 설명하는 라울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감정의 통제가 뛰어난 건지, 얼굴 가죽이 두꺼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저만큼 감정을 통제한다는 자체로 조심해야 할 인물이라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럼 계약서도 받았으니, 오늘은 돌아가도록 하죠.”
“그러시죠. 이후에 침입자에 대해서는 결과가 나오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보도 같이 부탁하죠.”
이드가 어느 쪽이 중요한지 잊지 말라는 듯 말하자 라울이 당연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라울의 배웅을 거절하고는 방을 나섰다.
혼자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곧 퍼블이 나타나 문 앞까지 안내했다.
“오늘은 고마웠습니다.”
“다음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퍼블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이드가 저택을 나섰다. 그러자 캄캄한 밤하늘과 조용한 정원이 그를 반겼다.
“훗.”
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정원의 모습에 내심 웃음을 흘리는 이드였다. 살기까지는 아니지만, 선명한 적의
아마도 교대 없는 밤샘 근무에 대한 원한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손님이 이상 공격은 하지 않을 테지만, 아무래도 골탕을 먹이고 싶은 모양이다. 그에 이드는 모른 척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반쯤 왔을까. 아니나 다를까, 식물의 줄기가 독사처럼 뻗어 와 이드의 다리를 휘감으려 했고,
휘이잉~
위로는 갑자기 일어난 강풍이 이드의 등을 밀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이드가 넘어지면 얼굴이 닿을 곳에 꼴꼴꼴 솟아나는 물웅덩이까지. 다치지는 않겠지만, 망신을 주겠다는 의지가 절절하게 스며 있는 배치다.
“쯧쯧. 실력이 안 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짧게 혀를 찬 이드의 대응은 간단했다.
투두두둑.
딱히 각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힘을 준 것만으로 다리를 휘감은 나무줄기가 힘없이 끊어졌다.
씨이이잉!
그 모습에 바람이 강해졌지만 그래 봤자 이드의 머리카락 한 올 흔들지 못했다.
이드는 그대로 걸어 물웅덩이를 밟았다.
참방.
순간 발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솟아오른 물줄기는 그대로 하나의 화살이 되어 목표를 향해 날았다.
퍼퍼퍼퍽!
“큭.”
“우와!”
“우웩~입에 들어왔어!”
그에 얼굴에 물 화살을 맞은 초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특히 그중 재수 없는 일인은 입에 들어온 흙탕물을 뱉어 내려고 구역질까지 해댔다.
“다음엔 좀 더 참신한 방법을 기대하지.”
그 모습을 보던 이드는 곧 부운귀령보를 밟아 담 너머로 사라졌다. 이후 뒷수습은 아마 퍼블이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기대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교대 없이 경계 근무 삼 일!”
“아악! 차라리 싸우러 가라고 해요!”
“삼 일을 어떻게 견디라고요!”
“한 번만 봐주세요!”
물론 아무리 사정해도 봐주는 일은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간 이드는 곧장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 라울과 나눴던 이야기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내놓은 계약서에 다들 입을 떡 벌렸다.
“10억이라니. 바벨의 규모가 큰 줄은 알았지만, 10억을 턱턱 내놓을 정도로 부자였을 줄은 몰랐습니다.”
새삼 바벨의 규모를 경계하는 쉴라와 달리, 스폴은 계약서를 탐난다는 듯 보았다.
“이 종이 쪼가리에 십억이라니.”
“가지고 싶으니?”
쉬지 않고 군침을 흘리는 모습에 검후가 계약서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계약서를 따라 흔들리는 눈이 한둘이 아니다.
“당연히 가지고 싶죠. 하지만 거기에 이드 님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제가 가지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오호~ 우리 스폴, 똑똑하기도 하지. 호호호.”
“…… “
그에 웃으며 볼을 꼬집는 검후에 스폴의 입술이 오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스폴을 놀리는 데 사용된 계약서는 잠시 후 라미아의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당장은 아니라도 조만간에 크게 써먹을 일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틀이라니. 짐작했던 것보다 바벨으 ㅣ정보력은 무섭네요.”
조용히 입술을 깨무는 에린이었지만, 이런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이틀이 아니라 만 하루가 지나기 전 침입자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