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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5화


502화

워낙 긴 상행이다 보니 하이탈을 빠져나가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자작이 죽는 일이 있었던 탓에 경비들이 형식적으로나마 모든 마차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더욱 느려진 면이 있었다.

그리고 하이탈을 떠나는 것이 이드가 함께하고 있는 상행뿐만이 아니었다. 하이탈을 떠나는 상단과 여행객들이 한꺼번에 입구로 몰리면서 하이탈의 양 출입문은 설날의 고속도로 출입구 이상의 혼잡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상행은 몇 시간의 산고 끝에 모두 문을 빠져나와 하이탈에서 멀어져 갔다.


“가는군.”

멀어져 가는 상행을 지켜보던 노마법사가 말했다.

마법사를 뜻하는 로브를 입고 긴 지팡이를 한쪽 어깨에 기대어 놓은 채 햇살 드는 한적한 길가에 앉은 그는 누가 봐도 마법사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상행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땅이 의자처럼 솟아 있었다.

툭툭!

마법사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두드리자 솟아 있던 땅이 울렁이며 햇살에 녹는 눈처럼 땅속으로 녹아서 사라졌다. 앉은 자리를 깨끗하게 치운 마법사가 곧 몸을 돌렸다.

그때 그 앞으로 이십 명에 이르는 용병들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비켜! 비켜! 우린 바쁘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비켜!”

용병들의 제일 선두에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대머리 용병이 손을 휘두르며 소리치고 있었다.

“어이쿠. 이놈들 사람도 많은데 조심 좀 할 것이지.”

워낙 빠르게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에 마법사가 급히 옆으로 물러서며 한 소리를 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달리던 용병들이 그의 앞을 지나며 무서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말 함부로 하지 마쇼. 영감.”

“늙은이가 왜 나와서 알짱거려!”

용병들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입만 떠들 뿐이었다. 바쁘기도 했지만 상대가 힘없는 노인이 아니라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 본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좀 더 치료를 빨리 해줬으면 집합 시간에 늦지 않았을 텐데.”

“설마 오늘 갑자기 문이 열릴 줄 알았습니까.”

“잔말 말고 달려 이 새끼들아. 빨리 따라잡아야 할 거 아냐. 빈손으로 돌아갈래!”

마법사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용병들의 대화를 들으며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 다른 때라면 혼구멍을 내주겠다만, 오늘은 내 바빠서 참는다.”

마법사는 욕을 하고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용병들의 모습에 기분이 상한 듯 투덜거렸다.

“그래도 약간의 교훈은 필요한 법이지.”

퉁!

용병들을 한 번 더 돌아본 마법사가 용병과는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들고 있던 지팡이로 가볍게 땅을 찍었다.

번쩍!

순간, 지팡이에서 뻗어 나온 마나가 땅 밑에서 하나의 법칙을 형성하고는 완성의 빛을 뿜었다. 그 빛은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완성된 법칙은 특유의 마법진 형태를 이루고는 그 마법진에 새겨진 법칙에 따라 공간을 뛰어넘어 마법사가 원한 위치에서 부여받은 법칙의 힘을 해방시켰다.

바로 그에게 욕을 하고 지나간 세 용병의 발밑이었다.

그리스.

쭐떡!

“어이쿠!”

마법이 발현되고 세 용병의 발이 허공을 걷어차는 것처럼 지면에 미끄러지면서 뒤집어졌다. 그러자 급하게 뒤따라오고 있던 용병들이 그들에게 걸려서 넘어지고, 그들이 엎어지면서 선두에서 뛰고 있던 용병들을 잡고 늘어지며 용병들이 한 덩이가 되어 바닥을 굴렀다.

“어어!”

“야, 이 새꺄아아악!”

“뭐, 뭐약!”

한 뭉테기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용병들이 끙끙거리며 소리를 쳤다.

이 황당한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다 곧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낄낄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선두에서 달리고 있다가 제일 밑에 깔려 버린 대머리 사내가 그렇지 않아도 붉던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에이, 씨벌! 이 재수 없는 하이탈! 내 다시는 오나 봐라! 이 개새들아, 언제까지 자빠져 있을 거야. 빨리 일어나서 비키란 말이다!!”

마법사는 등 뒤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피시식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헐헐헐헐!”

그는 하이탈의 일반 주택가로 들어가 그중 한 집에 들어갔다. 집 안에 편하게 앉아 있던 사내가 마법사를 보고는 급하게 일어나 코가 바닥에 닿을 듯 허리를 굽혔다. 마법사는 대충 인사를 받아주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있었고, 진의 중앙에는 통신을 위한 수정구가 놓여 있었다.

마법사가 잠든 사람을 깨우듯 지팡이로 수정구를 가볍게 두드리자 수정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그가 가진 고유의 주문이 흘러나왔다.

“깨어나라! 승천하라! 타오르라!”

휘이이이

세 음절로 이루어진 약속의 언어가 수정구의 마법을 발현하고 강화시켰다. 수정구에서 나온 빛이 지하를 환하게 밝힐 정도가 되었지만 그것은 시야를 가리고 눈을 아프게 하는 빛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그 빛의 크기에 만족한 듯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기다렸다.

그렇게 십 분 정도가 지난 순간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리토 남작인가?”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하이탈 자작이 이드의 일로 대화를 나누던 목소리와 같았다.

“그렇습니다. 백작님. 자리토입니다.”

자리토라고 불린 마법사는 자세를 바로 하고는 대답했다.

“자네가 연락한 걸 보면 그가 아나크렌으로 출발을 한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백작님. 후계자는 오늘 아나크렌으로 출발하는 상행에 끼어서 마차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오늘 새벽에 일리나스와 아나크렌에서 관리가 도착해 문이 열린 때문입니다.”

“새벽의 일까지 지켜보고 있었나? 노구에 고생했네.”

“헐헐헐. 그저 나이가 들어 새벽잠이 없어진 덕분에 눈에 띈 것일 뿐이지요. 그런데 보내드렸던 영상은 잘 전송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흐흐흐. 아주 깨끗한 영상이더군. 내가 직접 가지 못한 게 아쉽지 않을 정도였어.”

백작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원래 그는 자작의 마지막 통신을 듣고 직접 하이탈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불러들인 자리토가 절대 불가를 외치며 하이탈로의 외유를 반대했다.

자리토는 이대로 움직였다가는 88%의 확률로 시공의 미아가 되어 버릴 거라고 점잖은 얼굴로 입에 거품을 물었다.

대신 그가 직접 가겠다고 했다. 자리토는 하이탈에 파견되어 있는 요원을 통해서 비밀이 보장된 마법사를 고용하고, 그와 통신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나눠서 임시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가진바 실력으로 그 마법진과 자신의 마법진을 동기화시켜 공간을 넘어 날아온 것이다. 그렇게 하기까지 단 3시간이 걸렸다. 참, 불같은 실행능력이라고 할 만했다.

덕분에 자리토는 먼 거리에서나마 자작과 이드의 전투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켜본 내용들을 그대로 수정구에 넣어 백작에게 보냈다. 거기에 더해서 매일 저녁 통신을 통해 그날의 일을 보고했다.

자리토의 그런 정성이 통했는지 백작도 더 이상 직접 하이탈로 향하겠다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자리토는 이드가 떠나는 것까지 지켜본 후에 백작에게 그 보고를 하고 있었다. 자리토는 이것이 하이탈에서 하는 마지막 보고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그런 생각이 맞았는지 만족스럽게 웃던 백작이 말했다.

“이제 하이탈에 더 볼일은 없을 것 같아. 그만 자네도 돌아오게.”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에 사용할 수 있는 이동 마법진을 만들어 둔 후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백작님?”

“왜, 뭐 궁금한 거라도 있나?”

“저 후계는 더 이상 쫓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들은 이미 상대가 시온에 있던 후계라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더구나 후계를 쫓기 위해 시온으로 향했다가 하이탈로 길을 튼 요원들도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후계의 뒤를 계속 쫓을 수 있는 인원이라고는 하이탈에 박아둔 이 집의 주인과 자리토 정도였다. 그런데 백작에게서 다른 명령이 없었다.

“내 일은 여기까지야. 후계자가 상행에 섞여서 마차를 탄 이상 곧 아나크렌으로 들어가지 않겠나. 일리나스야 아직 네트워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서 내가 나섰지만, 아나크렌은 아니잖아. 서로의 영역은 잘 지켜줘야지.”

자리토는 백작의 말을 들으며 전 대륙에 걸쳐 있는 초인 네트워크를 떠올렸다. 그들은 전 대륙의 초인을 아우르는 거대한 연결점이지만, 초인들이 그 연결점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 국의 초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조직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무엇보다 조국에 가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초인 네트워크는 초인의 발생 초기 때 핍박받고, 납치당해서 연구 재료로 전락하는 초인들을 자체적으로 돕기 위해 형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네트워크는 부당한 일에 대한 초인의 권익을 보하는 것이 목적이지, 네트워크 자체의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백작의 말대로 상대를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나기에는 후계자가 가진 힘이 너무 아쉽다.

“아래도……… 아깝지 않으십니까.”

초인의 공익을 위한 정보라면 공유가 가능하겠지만, 단순히 전력을 높일 정보라면 아나크렌이 독점하게 될 것이다. 자리토는 이틀의 여유 시간이 있을 때 접촉을 허락하지 않은 백작의 명령이 아쉬웠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생각을 알았는지 백작이 딱하다는 투로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쯔쯔, 늙으면 그저 쓸데없는 걱정만 는다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리토 남작에게는 확실히 맞는 말인 모양이야. 그 이틀 사이에 접촉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불리한 상황에서 접근해봤자 경계심만 높아질 뿐이지. 더구나 상황 정리를 아나크렌에 모두 의지하고 있던 상황에 말이야. 그런 건 여유가 있을 때 천천히, 조용하게 진행하는 거요. 무엇보다 안타로스에 아나크렌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 않소.”

안타로스는 아나크렌 제국의 수도 이름이다. 그리고 제국의 수도인 만큼 각국에서 여행과 상행을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기도 했다. 자리토는 마법사답게 백작이 하는 말뜻을 빠르게 알아들었다.

“헐헐헐. 그렇겠군요. 백작님 말씀대로 나이가 들어 쓸데없는 걱정만 는 듯합니다.”

“내가 어련히 자리토 남작이 연구할 새로운 마인드 로드를 구해다 주지 않을까 봐 안달이시오. 남은 이야기는 돌아와서 합시다. 돌아오면 우선 이 통신구부터 고쳐놓으시오. 뚝뚝 끊기는 게 여간 쓰는 데 짜증 나는 게 아니니까!”

백작의 짜증 난 목소리에 뒤이어 수정구의 빛이 툭 끊어졌다. 상대편에서 통신을 끊은 것이다.

“헐헐헐.”

수정구를 보며 웃던 자리토는 곧 마법진 외곽에 놓여 있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마법진을 그릴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약품과 마법 물질들이 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제자 놈들 없이 이런 일을 직접 하려니,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지라토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다시 헐헐거리고 웃었다.


마차 여행은 지루했다.

하이탈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다른 마차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가 그나마 들을 만했다.

그들은 하이탈에 일어난 일차 영주성 공격과 영주가 죽고 영주성이 주저앉은 이차 영주성 공격에 대해서 각자가 가진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말도 되지 않는 의견과 억측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억측과 추측이 섞여 있을수록 재미있는 법이다.

이드들은 사건의 당사자이면서도 벽 너머로 들려오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 이어지자 곧 흥미가 떨어지고, 그들의 이야기는 소음이 되었다.

소음은 라미아가 마법으로 막았지만 지루함은 어쩔 수 없었다.

라미아는 곧 준비해 온 책들을 꺼내놓았다. 에단의 요청에 주사위 게임도 같이 꺼내 놓았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다가온 점심시간이 먼저였다. 급한 상행을 위해 며칠간 점심은 마차에서 달리면서 해결한다고 전해 왔다. 그에 따라 도시락을 팔기 위해서 상인들이 달려왔지만 그다지 맛깔나 보이지 않는 요리에 이드는 그들을 그냥 보내고 라미아가 저장해 두고 있던 요리로 점심을 해결했다.

식사를 마친 이드가 가볍게 적신 수건으로 자신과 일리나의 손을 닦은 후 수건을 한 번 털었다.

팡!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물에 젖어 있던 수건이 뽀송뽀송하게 마르고 그 주변으로 부연 물안개가 어리다 사라졌을 때였다.

“마, 마스터! 그건 뭡니까?”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에단이 신기한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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