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화
444화
[흥!]
라미아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리나와 재회한 지 이틀. 오랜만에 마을을 찾은 손님으로서 일행은 꽤나 바쁘고 알찬 이틀을 보냈다. 특히 마을을 찾은 그날 저녁에 있었던 마을 사람들과의 대면과 이어진 일리나 어머니와의 만남은 이드와 라미아에게 특히나 의미 깊은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은 채이나의 말대로 이드와 만난 후 처음으로 각방을 썼다. 라미아는 그 밤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날밤을 지새웠다. 그래도 그렇게 대인배의 배포를 보여 준 덕분인지 이튿날 이드에게서 나름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대접받을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전날 소개받지 못한 엘프들과 인사하고, 하루 종일 쫓아다니는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서 하루 더 자리를 피해
줬더랬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드가 일어날 시간에 맞춰서 일리나의 집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도 문이 닫혀 있어서 창문을 열어 비집고 들어왔다. 실은 그녀가 바로 이드를 잠깐이지만 눈 뜨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눈을 뜬 이드가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창문이 열린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온 것도 알지 못하고 말이다.
자신이 이렇게 일찍 찾아왔는데 그 노력을 모르고 이렇게 자고 있다니 괘씸했다.
‘그리고 부럽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일리나의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인간은 고사하고 생명체조차 아닌 모습이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드의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닌가.
침대 옆 탁자 위에서 이드로 짐작되는 이불 뭉치를 냉기가 감도는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라미아가 등을 돌렸다. 그래도 뭔가 미련이 남았는지 슬쩍 한 번 더 돌아본 라미아의 부리가 움직였다.
[그랬단 말이죠. 그 레벨에 잠이 와요? 제가 당신의 위치를 재확인시켜 드리죠.]
말을 마치며 내심 스스로가 전문직에 종사하는 카리스마 있는 여사장처럼 멋있게 보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라미아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둘째로 치더라도 반짝이는 은빛 새의 몸으로는 카리스마도 뭣도 없었다. 스스로 그런 사실을 인식한 라미아의 어깨가 한층 더 내려앉았다. 까득!
괜히 기분만 더 나빠졌는지 라미아의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새의 부리에 이빨이 있는지는 둘째 문제였다.
숲 속의 통나무집이라고 하면 보통 어떤 이미지를 생각할까.
아마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가구와 생필품이 모두 나무로 되어 있는 집을 상상하지 않을까 싶다. 엘프가 지은 통나무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서 사용하는 집보다 더 순수하다. 하지만 이 순수하다는 말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순수한 만큼 인공적인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 말이다. 당연히 일반 가정보다 생활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 부분에서는
일리나의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드가 일리나에 이은 이 집의 세컨드 오너가 되기 전에 먼저 찾아왔던 손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손을 써 준 듯했다. 실종되었다는 세레니아가 말이다. 그녀가 숲에 오면 늘 자신의 집에 머물렀다고 일리나가 말했다. 그렇게 며칠간 머물면서 본인의 편의를 위해서 여기저기 마법적인 조치를 취해 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녀의 뒤를 이어 이 집에 들어오게 된 이드 역시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가령 별다른 수고 없이도 따뜻한 물이 나온다거나, 마법적인 편리한 불이라거나, 청결 마법 등등 말이다. 사소한 곳에서부터 눈에 띄는 곳까지 갖가지 마법이 걸려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화장실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지.’
뒤처리를 마법으로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퍽!
“크억!”
멍하니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이드는 갑자기 복부에 느껴지는 묵직한 펀치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원상 복귀한 정신과 눈에, 돌돌 말린 날개를 건들거리는 은빛의 작은 새 한 마리가 보였다.
“라, 라미아?”
[이드, 방금 제 말 안 듣고 뭔가 지저분한 생각 했죠.]
‘귀신이냐.’
이드는 라미아가 자신에게 펀치를 날렸다는 것보다 화장실까지 뻗치고 있던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낸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아, 아니야.”
[중요한 이야기 중인데 다른 데 정신을 팔아요?]
“아니, 딱히 심각하다기보다는………… 이미 하고 있는 일이고………….”
이드는 갈수록 기세가 죽어 드는 목소리로 말을 하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분명 침대에서 일어날 때까지는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거실에서 한껏 분위기를 잡고서 어두운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기압의 라미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침 준비를 위해 일리나를 주방으로 보낸 그녀는 이드를 앞에 두고 뭔가 내용을 알 수 없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분명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핵심이 없어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거기에 길기까지 했다. 이제 막 20분을 넘어가는 시점이다 보니 어느새 잡생각이 끼어들었다. 그나마 파악한 내용이라고는 열심히 수련을 하라는 내용인데, 그건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다. 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숨 쉬듯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이드 다음으로 가장 잘 알고 있는 라미아였다. 그런 그녀가 새삼 수련을 강조한다면.
[이렇게 긴장감 없이 정신이 늘어져서 제가 언제 인간의 모습으로까지 레벨을 올리겠어요! 지금 이드 레벨에 잠이 와요? 그렇게 태평하게 늦잠을 잘 레벨이냐구요!]
‘역시 그거냐!’
내심 수련 이야기가 나올 때 짐작 가는 게 있었다. 현재 라미아가 저기압일 이유는 그것뿐이다. 아침에 거실에 들어와 있었던 걸 생각하면 분명 침실을 들여다보고 부러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미아가 이드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만큼이나 그녀의 속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드였다.
‘긴장감이 없다는 말은 조금 인정하지만 말이야.’
사실 이 부분은 그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레센 대륙으로 돌아와 세운 일차 목표인 일리나를 찾으면서,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레센에 가족과 내 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돌아갈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중요한 부분이 충족되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자연스럽게 늘어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평생을 긴장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쁠 것은 없었다. 다른 말로 재충전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늘어졌다고 해 봤자 이제 겨우 이틀이다. 절대 긴 시간이 아니다. 불만에 쭈욱 밀려 나오려는 입술을 겨우 붙잡은 이드였다. 못 잡았으면 라미아에게 한 대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알았어. 지금도 신경 쓰고 있지만 좀 더 열심히 할게. 나도 최대한 빠르게 네가 인간의 모습을 찾기를 바란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 재주는 언제부터 가능해진 거야?”
이드는 일단 라미아를 달래고는 그녀의 날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현재 라미아의 날개는 끝에서부터 쪼르륵 말려 올라가서 주먹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그 끝에 있는 뭉치는 주먹이라기보다는 해머에 좀 더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해머를 이용해서 길게 늘어난 날개로 이드에게 리버 블로, 일명 간장 치기를 박아 넣은 것이다.
[지금부터예요. 제 분노의 힘으로 가능해진 겁니다. 이드도 좀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제 분노를 맛보게 될 거예요. 알았죠?]
새로 변한 첫날은 질투고 오늘은 분노다. 다음엔 뭐가 나올지 심히 걱정되는 이드였다. 그나저나 고정된 형태에서의 부분 변형이라니. 이전이라면, 아니 이틀 전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그거 어떻게 봐도 내게 여유가 생겨서 가능하게 된 것 같은데 말이지. 네 말대로 레벨이 조금 오른 것 같다만?”
[아니에요. 제 분노의 힘이에요.]
“네가 분노라고 한다고 실제로 그런 건 아니지. 그리고 인정할 건 인정해라. 레벨이 오른 게 맞다니까.”
[아니라니까요.]
아침부터 유치한 말싸움을 시작하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뒤이어 간단한 식사거리를 가지고 등장한 일리나에 의해서 라미아의 판정승으로 결론이 났다. 이드는 두 사람의 말에 따라 좀 더 수련에 신경 쓰기로 했다. 정확히는 라미아의 인간화에 대해서 말이다.
이드도 라미아의 투정은 염두에 두고 있던 부분이었다. 전날 라미아가 일리나를 부러운 듯 바라보는 모습을 몇 번 봤기 때문에 지금 이상으로 그녀의 변화에 신경을 쓰며 마음을 잘 달래 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단지 이 마음을 밖으로 내어 놓을 생각은 없었는데, 뜻하지 않은 라미아의 투정으로 일부가 공식화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감정적인 일은 차라리 바로바로 풀어 주는 것이 쌓아 두는 것보다 좋은 일이니까 말이다. 쌓아 두면 병이 되고, 불화만 일어날 뿐인 것이다.
“그럼 오늘은 어제 약속한 대로 윌을 찾아가면 되는 건가요?”
“네. 오늘은 윌이 수련장을 담당하고 있을 테니까요.”
일리나가 덩굴로 만들어 엮은 바구니에 준비물을 챙겨 담으며 대답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오후에는 이드가 원하는 곳을 둘러볼 수 있을 거예요.”
어제 마을을 돌아보는 중에 조금 눈여겨봐 둔 곳이 있었다. 인사가 바빠 자세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그곳에 다시 한 번 가 볼 계획이었다. “아니,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요. 당장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이드는 첫날 소개받지 못한 엘프들과 어제 인사를 나눴다. 윌이라는 엘프도 문지기로서 결계를 지키고 경계하느라 그날 저녁 때 모이지 못한 엘프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드와 인사를 하면서 오늘 수련장에 한번 들러 달라고 했고 이드는 알았다고 승낙했다.
“준비 다 했어요.”
“내가 들게요. 이리 줘요.”
이드는 바구니를 받아 들고는 라미아를 머리 위로 올린 채 일리나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 시간도 아닌데 마을은 조용했다. 작고 평온한 오솔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햇볕을 받으며 집 앞에 앉은 엘프가 간혹 보이기는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도 살지 않는 비어 있는 유령 마을처럼 보일 정도였다.
“조용하네요.”
참다못한 이드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조용한 숲 속이라 크게 들렸다.
“모두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까요.”
[엘프는 혼자만의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요. 긴 수명만큼 홀로 살아가야 할 시간도 길거든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제각각이라고 했다. 숲과 교감하기도 하고, 정령과 소통하며 뛰노는가 하면, 자기 계발이나 휴식에 빠지기도 한다. 그 장소는 집 안일 수도 있고, 자기 집 앞마당일 수도 있으며, 숲 속 어떤 나무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형성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에 의해서 공유되는 마을은 보통 비어 있기가 쉽다.
[그래도 유난히 조용하긴 하죠. 새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없으니까요.]
분명 마을 안인데 아무도 없는 숲 속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이 정도는 아닌데, 오늘은 정령수에서 노는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일리나의 말대로 평소 정령수에 올라서 정령과 놀던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늦게 나왔으니까, 먼저 나온 마오와 채이나를 따라다니고 있겠지. 어제처럼.”
이드들이 마을에 들어온 날도 그랬지만, 일리나의 안내로 마을을 돌아보는 그 이튿날도 아이들은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행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전 좋아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멀리 가서 오늘 밤에나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숲이 넓어도 마을이 그렇게 큰 건 아니거든? 그렇게 하루 종일 나가 있을 곳이 어디 있냐?”
[그래두요. 그 꼬맹이들 정말 싫어요.]
라미아가 질색을 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첫날 아이들에게 얼마나 시달린 건가 싶은 이드였다. 하기야 어제도 장난이 아니기는 했다. 일행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매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라미아를 노리고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이드의 머리와 어깨 위는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기 일쑤였다. 과연 정령수 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순발력은 대단했다. 그나마 라미아를 살린 것은 그녀의 마법 실력이었다.
그 모양을 보고 이드는 그저 장난이려니 하고 허허 웃었지만 라미아는 소악마들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꼬맹이들이라 차마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이젠 달라요.]
그렇게 말을 하는 라미아의 날개가 오늘 아침 이드의 복부를 강타할 때처럼 또르르 말려 해머가 되었다. 거기다 이번엔 그렇게 만들어진 해머가 울룩불룩 크기를 키우더니 두 배로 커지기까지 했다.
[이 정의의 철퇴로 단호히 퇴치해 주겠어요.]
“야, 야. 참아라. 그러다 큰일 난다.”
[말리지 말아요, 이드. 전 결단코 이틀 전 그때와 같은 수치는 당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반격의 때라구요.]
“쿠쿠쿡…….. “호호호!”
“일리나, 웃지만 말고 말려 봐요.”
하지만 말을 하는 이드도, 옆에서 웃고 있는 일리나도 실제 라미아가 말처럼 행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수련장으로 향하는 동안 가볍게 주고받는 잡담인 것이다.
[…………이 철퇴가 사용되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