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45화
1180화
뭐라 웅얼거리던 도비드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내 기절한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링이 사라지며 한꺼번에 밀려온 통증에 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저 모습을 보면 옛날 생각나지 않아요?”
“언제를 말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본 이드의 말에 라미아와 일리나가 맹한 표정을 지었다.
피를 본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카논에서 소드 마스터 부대를 앞세워서 밀고 내려왔을 때 말이에요.”
“아, 그러고 보면 확실히.”
어마어마한 숫자의 소드 마스터에 당시 아나크렌 제국은 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더랬다. 믿기 어려운 현실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이드가 나서 카논의 소드 마스터를 생포해 오고, 이들이 마법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일회용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런 일도 있었죠. 그러고 보면 지금 상황과 매우 비슷하네요.”
둘 다 혼돈의 파편이 계획하고 실행한 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거기에 모든 부분에서 옛날보다 수준이 높아졌죠.”
더 이상 기사는 일회용이 아니었고, 개발 중인 마법은 그레이트 소드도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을 만들어 낸다.
“그래도 문제없어요. 그때보다 수준이 높아진 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옛날처럼 파편들이 전면에 나서서 카논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그래 주면 편하지.”
지금은 너무 꼭꼭 숨어 있어서 문제다. 이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옛날이야기에 빠진 사이.
대결을 진행하던 호위 기사가 해쉬의 팔을 잡아 올렸다.
“이번 대결은 해쉬 경의 승리입니다. 이로써 이번 내기의 승자는 에단 님이십니다.”
이드의 승리를 선언하는 호위 기사의 목소리가 유독 컸다.
아무렴 톤 자작의 기사가 대결 중 눈이 뒤집혀 자신이 모시는 후작을 향해 검을 들었으니까. 그는 조금 전 그 순간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허리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물론 일개 호위 기사의 기분 따위 톤 자작이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주인의 기분이라면 말이 다르다.
‘빌어먹을. 그간의 공이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대결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을 둘러본 톤 자작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후작뿐만 아니라 몇몇 그와 자리를 함께한 고위 귀족들이 자신을 턱짓하며 불편한 안색을 감추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다. 톤 자작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저들과 인맥을 엮기 위해서 그간 가져다 바친 돈과 선물이 얼마인데, 그걸 이렇게 까먹다니.
이번 사건에 대해 사과를 표하려면 또 얼마나 가져다 바쳐야 할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쓰린 자작이었다.
“천하에 쓸모없는 놈. 이게 다 저 무능한 녀석 때문이잖아. 격 떨어지는 저깟 계집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내게 이런 수치를 주다니.”
충동적으로 내놓은 아티팩트는 부서졌고, 온갖 뇌물로 만든 인연은 처음만 못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일의 시작이 된 내기에서도 졌다. 본인이 가진 패를 모두 내놓았음에도 말이다.
자작은 자신이 소장한 아티팩트가 결코 상대의 것이 비해 모자라지 않다고 여겼다. 설혹 작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가장 중요한 링, 그 하나면 모자란 부분을 다 채우고 남았으니까. 실제 링의 마법이 발동된 후 상대를 압도하지 않았었는가.
그러던 흐름이 어느 순간 갑자기 뒤집혔다.
톤 자작은 그 원인을 도비드의 무능이라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자존심이 상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단장! 아티팩트는 모두 회수하고, 저 병신은 지하 감옥이 처박아 버려!”
분노한 톤 자작의 속삭임에 솔론 단장은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히 말했다.
“일단 치료 후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치료는 무슨! 저놈 때문에 이번에 얼마나 깨질 예정인 줄 알아?!”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보일런의 몸값을 내놓는 쪽이 더 싸게 먹혔을 거다.
“제가 감히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하지만 저기 보십시오. 오늘 대결을 지켜본 눈이 많습니다. 당장 처벌한다면 뒤에서 말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 일단 회복한 후에 진행하시지요.”
“…… 빌어먹을. 피를 뽑아 팔아도 모자랄 놈을 돈까지 써서 치료해 줘야 한다니. 처리해.”
“현명하신 결정이십니다.”
솔론 단장은 곧장 기사들에게 도비드를 치료하게끔 명했다.
어쨌든 바인과 해쉬의 기사 작위가 거두어진 날, 열심히 싸운 도비드까지 지하 감옥에서 죽어 나가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기사들을 이끄는 그에게 있어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때,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홱 돌아섰던 톤 자작이 다시금 솔론 단장을 손짓해 불렀다.
“난 후작과 손님들께 가 봐야겠네. 그러니 나머지 처분은 자네가 알아서 하도록.”
“……기존과 같은 방식은 불가합니다.”
톤 자작의 말뜻을 금방 파악한 솔론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보통 이때 톤 자작이 말하는 ‘처분’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바벨의 감찰관에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자넨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나? 일단 사람을 붙이란 말이야. 이렇게 당한 이상 그냥 넘어갈 순 없잖아.”
“상대가 바벨임에도 말입니까?”
“……그래 봤자 바벨 자체가 아니라, 바벨 소속의 감찰관일 뿐이야.”
더 이상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걸음을 옮기는 톤 자작에 솔론 단장은 내일을 기약했다.
바벨에 대해서는 항시 그렇게 조심하던 자작이 너무 흥분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 사람은 붙여 두겠습니다.”
“…그리고 부서진 링을 회수하도록 하게. 작은 조각도 잃어버려선 안 돼!”
“충.”
솔론 단장이 자신 있게 가슴을 두드렸다.
이때만 해도 완수 불가능의 명령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치료를 위해 도비드를 옮겼고, 하인들은 흐트러진 실내를 정리했다. 또 일부 기사는 산산조각 난 링의 조각을 수거했다.
“저거 헛수고일 텐데. 그렇죠?”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자신의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게. 어쨌든, 우린 목표 확보 성공. 이 정도만 있으면 되는 거지?”
라미아는 손가락 한 마디보다 조금 더 큰 링 파편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해요.’
“뭐야, 그게.”
이드는 라미아가 링 파편을 아공간에 던져 넣는 것을 확인한 후 주변을 살폈다.
“좋은 대결이었소.”
“오늘의 승자들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해쉬 경이라 했던가. 내가 먼저 잡았어야 했는데. 아쉽구먼!”
대결의 승자이며, 귀족들을 공격하려던 도비드를 막아 내 영웅이 된 해쉬는 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저 재미로 이뤄진 내기이고 대결이었지만, 위험할 뻔한 순간을 그녀 덕에 넘김으로써 해쉬는 일순간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눈치 빠른 귀족들이 비록 호위 기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짧은 순간 위험에 노출되었던 후작과 고위 귀족들이 해쉬의 공을 그냥 넘기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것도 이 소란에 한몫했다.
두 기사가 마음을 바꾼다면 그녀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후작가의 기사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여타 귀족들의 기억 속에 자신들을 충분히 각인시켰다.
단 한 번의 대결로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들과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해쉬는 축하의 말을 건네는 귀족에 연신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두드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런 모습을 보던 어느 귀족이 말했다.
“아무리 아티팩트가 뛰어났어도, 실력이 없으면 그걸 그렇게 능숙히 쓸 수 있을까? 자작이 좋은 기사를 놓쳤어. 의외로 기사를 보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어.”
“근본이 상인이 아닙니까. 그리고, 저기 보십시오. 자작이 지금 기사를 아까워할 정신이나 있겠습니까?”
“후후후. 그렇긴 하군.“
두 사람은 고위 귀족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는 톤 자작을 보며 매우 고소해했다.
고작 자작임에도 백작보다 더 고위 귀족인 양 거만을 떨던 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입장에선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충. 에단 님께서 제게 내려 주신 힘으로 대결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리저리 붙잡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온 해쉬가 이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에 이드는 그녀를 급히 일으켰다.
“대결에서 이긴 것은 어디까지나 해쉬 경의 공입니다.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용한 아티팩트는 돌려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인 해쉬가 자신이 걸치고 있던 아티팩트를 하나하나 풀어낸 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탈력감에 해쉬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 짧은 시간 사용한 것만으로 몸이 벌써 익숙해져 버리다니.’
이미 체감하긴 했지만. 본신의 실력을 발전시켜야 할 입장에선 독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이었다. 그걸 다시 한번 실감하는 그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비싸다.
혹여라도 더 오래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는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그 감당을 어찌할까.
“어서 거두어 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그런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해쉬였다.
이드는 그 모습에 작게 웃었다. 해쉬의 행동이 바인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드는 해쉬의 손 위에 놓인 아티팩트를 천천히 챙기며 물었다.
“아티팩트의 성능은 만족스러웠습니까?”
“이전에 다른 것들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 쉽게 평가할 수는 없으나 앞으로 이보다 뛰어난 아티팩트를 사용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좋은 답입니다. 그럼 이 아티팩트들 중 해쉬 경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이드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해쉬가 손 위에 마지막으로 남은 팔찌를 살짝 들어 보였다.
“저는 이 팔찌가 가장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고른 것은 방어력과 함께 푸쉬 마법을 내장한 팔찌였다.
이드의 손에서 나온 만큼 성능은 뛰어나지만, 내장된 기능만 따지면 매우 소소한 기능이었다.
“그럼 이 팔찌는 지금부터 당신의 것입니다.”
이드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눈이 동그래진 해쉬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하, 하지만 이런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이드는 놀란 해쉬가 고개를 젓는 모습에 바인을 가리켜 보였다. 일리나 뒤에 조용히 선 그녀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전투의 흥분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바인 경에게도 축하의 의미로 선물했습니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 부담이 됩니다.”
바인이 받았으니, 쓸데없이 사양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하나 그런 이드의 말에도 해쉬는 힘없이 답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바벨 감찰관의 씀씀이가 매우 크구려.”
“……네. 후작 각하.”
후작의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문 톤 자작이 말했다.
최소한 저정도는 해야 사과를 받아주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 끝까지 나를 엿먹이는구나!’
그걸 눈치챈 톤 자작은 조용히 이드를 욕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