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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71화


1206화

죄인에, 사죄란다.

앞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의 말들과 달리, 스스로의 잘못을 오롯이 인정하는 발언이다.

모든 것을 밝히겠다는 게르만의 말이야말로 사실 이드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앞서 그와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게르만이 가진 정보에 대한 기대감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하고 있는 꼴을 보면 알 수 있듯, 그에 대한 혼돈의 파편의 취급은 매우 좋지 않았다. 방범용 마법 자판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혼돈의 파편을 봉인에서 풀어낸 장본인으로, 그들 입장에선 생각하기에 따라 은인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막 굴리는 인물에게 중요 정보를 흘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당신의 사죄라는 것,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쓸모는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이드가 귀를 기울이겠다는 뜻을 보였다.

하지만 시원치 않은 뒷말 때문일까. 애써 담담한 척하던 게르만은 의욕이 팍 식어 버렸다.

자신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심한 일이거늘. 쓸모가 없을 것 같다니.

‘진정 굳이 정체도 모르는 이자들에게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것인가.’

게르만은 시큼털털한 눈빛으로 이드를 보았다.

그리고 마주 선 이드 뒤로 보이는 검은 하늘과 구멍. 거기에 그 구멍을 향해 뻗어 있는 고목의 나뭇가지까지.

그 아래서 열심히 마법을 해체 중인 라미아를 보니, 흐지부지되려던 마음이 다시 굳어졌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선택지를 없애 버린 것이다.

어차피 이들은 멈추지 않으리라.

자신이 공허의 드래곤·

“으어어어…….”

“어머, 실수, 괜찮죠?”

・・・・물론이오.”

아니다. 제발 신경 좀 꺼 줬으면 좋겠다.

라미아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마법을 해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마음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좌우간 이 두 사람이 공허의 괴수를 신경 쓰지 않는 건 확실하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인지 몰라도, ‘드래곤보다 강한 괴수’라는 말에도 한 톨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런 두 사람의 결정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곧 공허의 괴수가 깨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연 이 두 사람은 자신에게 보였던 자신감대로 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 놈을 죽이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살 수 있을까. 만약 살 방법이 있다고 해도, 이 꼴을 하고 있어야 할까.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죄가 세상에 밝혀지면, 스스로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게르만은 이번엔 반대의 경우를 계산해 보았다.

이전 후배 마법사처럼 두 사람이 패한다 해도 문제다. 과연 놈은 이번에도 자신을 살려 둘까.

또 자아를 빼앗긴 상태로 나무에 기생하는 것이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태인가. 어쩌면 혼돈의 파편 손에 세상에 멸망하기 전, 사람답게 죽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이런 번뇌도 자신이 죽어 버리면 다 끝이니까.

죽을 기회,

그리고 멸망을 깨운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게르만은 곧 입을 뗐다.

그는 필요 없는 이야기는 빼고 핵심만을 간추렸다. 말을 할수록 잡념이 가득하던 머리가 비워졌다. 말하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림자 관에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덕분에, 현재 이 공간에 일어나고 있는 미세한 변화를 본능이 먼저 알아차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 속 게르만이 봉인을 풀기 위한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 의식을 위해 저 대륙의 끝. 사하의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였다. 티긱!

고목의 껍질 몇 개가 갑자기 튀어 오르고, 곧이어 쩌어억 소리를 내며 고목이 갈라졌다.

피시시식.

그와 동시에 라미아가 풀어내고 있던 결합 부위에서는 고약한 악취와 함께 진물이 흘러내렸다. 

“칫, 조금 남았는데!”

마법의 해주가 코앞이었던 라미아가 신경질을 부렸다.

중간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완성 직전에 일이 틀어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실패야?”

이런 모습에 이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급히 게르만을 확인하지만, 역시 상태는 좋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생명선과 같은 결합 부위에서 저런 고약한 진물이 흐르는데, 정상일 수가 있나.

“으음…”

게르만이 신음을 흘리는 것과 함께, 재생되고 있던 그의 팔다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거기선 등 뒤에서 흐르는 것과 같은 진물이 흘러나왔다. 머리가 사라지고도 멀쩡히 움직이고, 사지가 끊어지고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던 게르만이 하던 말을 멈췄다는 건 그만큼 상태가 나쁘다는 것이리라.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공허의 어쩌구라는 여기 주인이 알아차린 것 같아요.”

“알아차릴 만한 짓을 많이 하긴 했지.”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죽 요란하게 싸웠던가. 더욱이 말리는 게르만의 말을 무시하고 분리 작업도 밀어붙였고, 이런 상태에서도 반응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라미아의 잘못은 1도 없다는 거다.

다만 아쉬운 건 하필 라미아의 작업이 끝나기 직전에 실패했다는 점.

그르르르르-

때마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아무것도 없는 어둠 너머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단지 소리만으로도 그 주인이 매우 크고 무서우리라는 걸 짐작하게 만들었다. 마치 드래곤이나 와이번의 울림처럼.

그걸 들은 이드는 쩌억 갈라져 넘어지는 고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차차차착!

고목에 박혀 있던 검들이 고목을 산산조각 낸 후, 그 손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이윽고 일라이져를 제외한 나머지 검은 모두 다시 아공간으로 사라졌다.

“라미아, 게르만 챙겨. 당장 죽지 않게끔만 신경써줘.”

“맡겨 주세요. 디스멘틀!”

쯔즈즈즉.

라미아의 선택은 거칠었다. 서로 다른 둘의 결합을 강제로 분해해 버린 것이다.

결합된 부위가 퍽 하고 터져 나가며 진득한 진물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이미 그에 대비한 라미아 덕분에 그녀와 게르만의 몸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라미아는 당장 게르만을 잡고 한쪽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일단 최소한으로 조치하는데 20분 정도 걸려요.’

“그 전에 끝내 버리지, 뭐.”

20분 동안 방해하지 말라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간단히 답했다.

그르르릉-

그런데, 그 뜻을 이해라도 한 것일까. 어둠 속에 숨은 공허의 괴수가 내는 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런 놈의 울음소리는 육합전성처럼 사방에서 들려와 방향을 가늠할 수 없게 했다.

심지어 공간과 일체가 된 듯, 특별한 기운의 흐름도 느낄 수 없었다.

적을 기다리는 입장에선 조급함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이드는 그런 기색 없이 자연체를 유지했다.

어차피 적이 공격하기 위해선 자신의 공간에 들어서야 한다.

적의 위치를 알 수 없다면 그저 기다리면 될 일.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싸움은 조급한 마음을 가진 쪽이 불리하다.

“말 못 하는 괴수가 조급증을 느낄 만큼 영리할까는 모르겠지만. 온다!”

최소한 참을성이 없다는 건 알 것 같다.

제공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이드의 영역. 그 무형의 영역을 무언가가 넘어서는 순간, 은빛 무형검강이 번뜩였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도 없었다. 검보다 의지가 먼저 움직이고, 그 뒤를 기가 따랐을 뿐.

치이이익-

직후 머리 위에서 무언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나며, 검고 진득한 진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드의 머리 위.

거기에는 굵은 핏줄이 흉측하게 일어서 있는 굵은 촉수가 타고 있었다. 촉수의 한쪽에는 달팽이의 그것 같은 빨판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는 문어의 다리 같았다.

하지만 또 다리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촉수의 중간이 쩍 갈라져 있는 데다 그 사이에는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빨이 빼곡했다.

지금 타들어 가는 쪽은 빨판이 있는 아래턱에 붙은 이빨이었다. 무형검강에 아래쪽 이빨이 몽땅 잘려 나간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걸까. 그 자리에서 꿈틀거리던 촉수가 어둠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고.

크르르릉!

한층 거칠어진 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거목보다 굵고 긴 촉수가 불쑥 튀어나와 이드를 내리치려 했다.

분명 빠르지만 이드에겐 충분히 느렸다.

문제라면 이드와 직선상에 있는 라미아와 게르만. 그쪽을 힐끗 돌아본 이드의 팔이 어둠 너머를 향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수십 톤은 넘어 보이는 촉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모양새였다.

쯔자자작!

직후 일라이져에서 붉은 번개가 뻗어 나갔다. 끊어 치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검강의 모습은 번개라기보다는 차라리 레이저를 더 닮아 있었다. 그것에 닿은 촉수의 뿌리 부분이 쩌억 갈라졌지만, 레이저는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쿵!

그리고 그와 함께 이드와 라미아를 향해 떨어지던 촉수가 머리 위, 약 삼 미터 높이에서 투명한 기운에 막혀 멈췄다.

화르르르륵!

무극신기로 속을 채운 벽 위로 화기가 솟아오르며 새파란 불길이 촉수를 휘감았다. 그 온도는 순식간에 2000도를 넘어섰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살아 있는 것이라면 재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릴 만한 열기.

하지만 촉수는 타지 않았다. 촉수 표면을 덮은 끈적한 진물만 타들어 갈 뿐이다.

“불은 통하지 않는군.”

쿠쿠쿵. 쿠쿵.

이드는 어떻게든 벽을 부수고자 꿈틀거리는 촉수에 대한 정보를 하나 얻었다. 어차피 저 불길은 처음부터 적에게 얼마나 유효한가를 알아보기 위한 용도에 불과했다.

“크어워워워!”

한없이 깊어 보이는 어둠 속으로 뿜어진 붉은 번개 끝에, 무언가 닿은 순간.

괴수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공간을 울렸다. 거기에는 드래곤의 그것처럼 듣는 사람의 심령을 위협하는 공능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는 그것이 통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놈의 촉수는 이드에게 닿지 못했지만, 이드의 강기는 놈을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추가 공격으로 나타났다.

츄츄츄츄

굵은 촉수가 꿈틀거리는 어둠 속에서, 그에 못지않은 촉수들이 뻗어 나왔다. 튀어나오는 순간 끝이 갈라지며 허연 이빨과 함께 침을 대신해 진물을 흘리는 촉수는,

콰콰콰콱!

이내 머리 위 촉수를 막아 냈을 때와 같이 이드의 앞을 막은 벽에 가로막혀 녹인 고무처럼 찌그러지고 짓이겨졌으며, 그 틈을 파고든 검강에 정육점 고기처럼 툭툭 잘려 나가 떨어졌다. 부르르르!

직후 이드의 머리 위에서 꿈틀거리던 커다란 촉수가 움직임을 멈추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곤 굴을 찾아 들어가는 뱀처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워~ 크워워워웍!”

곧이어 한발 늦게 비명인지, 분노인지 모를 울음이 터지고.

끼기긱. 끼긱.

끼기긱. 끼긱.

철판을 긁어 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둠보다 어두운 무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겨우 얼굴 좀 보겠군. 그렇게 꼭꼭 숨긴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나 좀 보자고.”

혹시 대머리라도 되는 걸까?

이드의 눈빛이 어둠 속을 꿰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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