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3화
520화
“휴우.”
에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임무를 완수했다 싶었는데 갑자기 생각도 하지 못한 똥 덩어리를 밟은 것 같았다.
“제기랄. 소드 팰러스로 돌아오면 다 끝나는 일인가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소드 팰러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에단은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짜증에 불평을 토했다.
뒤에서 검궁을 지키는 경비병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검왕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갑자기 노망난 노인네처럼 구는가 하는 점이었다.
“일단 마스터께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겠다고 나오기는 했는데.”
에단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소드 팰러스를 둘러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존경하던 검왕의 낯선 모습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서 물어본다고 그 양반이 자세히 설명을 해 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에단은 몇 년간 직접 본 적이 없는 상관의 얼굴을 떠올렸다. 순간, 에단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었다. 실로 정보부에 어울리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보를 다룸에 있어서 에단보다 몇 수나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음………… 역시 그 양반은 포기하자. 잘못하다가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만 토하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지도 몰라.”
에단은 처음 목표로 했던 인물을 포기하고 그가 소드 팰러스에서 만들어 놓은 인맥 리스트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씁. 이런 정보를 알 만한 놈이라면 역시 그놈뿐이려나.”
적당한 인물을 뽑아 낸 에단이 걸음을 옮겼다.
카일란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도 검궁으로 돌아오면서 봤겠지만 소드 팰러스에는 이미 후예, 아니 이드에 대한 소문이 퍼졌네. 자네가 국경에서 출발한다고 연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식이 전해졌지.”
라발은 카일란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카일란, 지금 그 일이 이 미친 짓과 무슨 상관이며, 어딜 봐서 이 꼴이 검후님과 소드 팰러스를 위한 일이란 거지? 또 왜 이드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후우. 내가 지금 설명하고 있잖은가. 일단 천천히 설명을 듣게.”
카일란은 이 성격 급하고 뼛속까지 순수한 기사인 친구에게 지금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분명히 자신은 흘러가는 상황을 알고 있지만, 과연 이 친구가 그 상황을 이해해 줄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런 인사였으면 젊은 나이에 소드 팰러스에 몸담지는 않았겠지.’
카일란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도 잘 알 테지만 우리가 이드를 원한 것은 실종되신 검후님의 빈자리를 이드를 이용해 메우기 위해서였지.”
끄덕.
라발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그의 소식이 들려온 이유도 있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는 검후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이드뿐이라고 생각했어. 소드 팰러스는 물론이고 제국의 모든 기사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쓸모없는 이야기! 본론을 말하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네.”
“하! 대단하군. 어디 초인파가 자진 해산이라도 했다던가? 모든 권력에서 손 놓고 은거라도 했어? 도대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뀐 게 뭔가?”
“아까 말했지만 자네도 봤을 거야. 젊은 기사들이 자네들의 뒤를 따르는 모습. 자네는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소드 팰러스에 돌았을 때 그들의 반응을 우리는 확실히 보았네.”
“뭘?”
“이드를 향한 어린 기사들의 무조건적인 동경과 환호. 그것은 위험한 것이었네.”
라발이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일란을 바라보았다.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자네도 마찬가지고 이곳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우상인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나타났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우리만 해도 검후께서 사라지셨다는 말을 듣고서 어쩔 줄 몰라 했을 때 그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가?”
라발이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느냐며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답답했던지 앞서 재수 없게 웃어 보이던 남자, 소드 팰러스의 모든 정보를 주무르는 블레터 불룸이 다시 나섰다.
“젠장. 빌어먹게도 뺑뺑이 도는구나. 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빨갱이, 네가 없는 동안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어르신들께서 위협을 느꼈다. 이 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소드 팰러스를 고스란히 그 이드라는 젊은 놈에게 가져다 바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헛소리!”
라발은 블레터의 궤변에 크게 소리쳤다.
블레터가 다시 끌끌거리며 말했다.
“뭐가 헛소리라는 말이냐? 충분히 가능한 소린데. 검후도 없는 소드 팰러스에 그런 환호를 받는 놈이 등장하면 당연히 주인이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지. 넌 정말 정치를 모르는구나. 권력의 흐름을 몰라. 허기사 그게 싫어서 소드 팰러스로 들어온 놈이니 어련할까!”
잔뜩 라발을 비꼬는 블레터의 말에 라발이 발끈하고 나섰다.
“이 작자가!”
순간 라발의 손이 자연스럽게 검을 향해 뻗어 갔다.
“클클. 뽑게? 뽑아 봐, 뽑아 봐. 뽑아서 어디 내 목을 칠 수 있나 보자. 이 핏덩이 새끼!”
그 모습에 블레터가 목을 빼 보이며 라발을 도발했다.
“오냐! 내가 그 목을 잘라 주마.”
라발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몸에서 피 냄새 가득한 진짜 살기가 흘렀다. 정말 검을 뽑아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살기였다.
카일란은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나서서 두 사람을 말렸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일란의 능숙한 중재로 분위기는 금방 안정이 되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화를 삭힌 라발이 물었다.
“지금 내가 들은 개소리가 사실이냐? 소드 팰러스의 권력이 이드에게 넘어갈 수 있어서 방금과 같은 병신 짓을 했다고?”
“라발, 말이 과하다!”
카일란이 한 번 더 라발을 단속했다. 그 병신 짓의 주인공이 소드 팰러스의 검왕인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가 검왕의 검에 목이 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뭐가? 내 말이 틀렸어? 소드 팰러스에서 권력 싸움이라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곳은 기사들의 성지가 아니었나!”
얼굴을 붉힌 라발이 열변을 토했다.
카일란은 그 모양에 내심 고개를 저었다.
‘라발, 자네는 아직 소드 팰러스를 잘 몰라.’
카일란은 저 순수한 기사가 안타까웠다. 라발의 말과 현실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가장 초기, 정말 순수한 목적으로 소드 팰러스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황제가 소드 팰러스라는 성을 검후에게 내리고 그 이면으로 초인파의 견제를 맡기면서 처음의 순수하던 목적은 많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소드 팰러스는 초인파와 힘겨루기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라발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가 초인파를 견제하며 이드를 마중 간 것도 제국 권력의 추를 맞추기 위한 행동의 일부였다. 이런 소드 팰러스가 기사의 성지라 불릴 수 있을까? 카일란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소드 팰러스라는 이름으로 제국에 직접적인 영향력이 생기는 순간, 소드 팰러스 안으로도 권력의 지류가 생겨나 버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 흐름을 타려고 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 흐름을 타기 위해서 소드 팰러스를 찾는 자가 생겼다.
아는 사람들은 안다. 소드 팰러스는 더 이상 기사도를 숭상하는 순수한 기사의 성지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현재의 소드 팰러스는 거대한 힘을 가진 권력의 축이고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 힘이 잘 알지도 못하는 젊은 검사에게 넘어가게 생긴 것이다.
“자네는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라발, 우리가 이드에게 원한 것은 말 그대로 검후님을 대신해서 기사들을 모아 줄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역할이었네.”
“쉽게 말해서 얼굴마담이지.”
카일란이 갑자기 끼어드는 블레터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번에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이드의 소식을 접하고 움직인 기사들의 모습에 우리는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네. 아직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지.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은 아직 실체를 가진, 힘이 있는 이름이었네.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소드 팰러스를 지배할 정도의 힘이 있는.”
“…바꿔 말하면 그만큼 확실하게 기사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 지금처럼 검후님이 실종된 상황에서는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 아닌가.”
카일란은 라발의 말에 그의 우묵한 눈을 통해 그의 내심을 탐색했다.
지금 라발이 하는 말은 검후의 뒤를 이어 소드 팰러스를 이끌어나갈 사람으로 이드를 지지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라발이야 사심 없이 순수한 생각을 가지고 한 발언일지 모르지만, 가장 정치적인 발언이기도 했다.
카일란은 혹시 라발의 말속에 혹시 그런 생각이 있는지 살폈지만 알 수 없었다.
“자네 말이 틀리진 않아. 하지만 말이야, 소드 팰러스는 황제께서 검후께 내리신 성이네. 이 성의 주인은 오로지 검후님뿐이네.”
“하지만 지금은…….”
“그래. 지금은 그 검후께서 실종되셨지. 하지만 그렇다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에게 소드 팰러스의 주인 자리를 넘길 수는 없는 일이야.”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인가.”
“그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타이틀은 무엇보다 대단하지. 하지만 정작 그 후예의 속은 누가 알까? 막말로 그가 모습을 보이기 전에 초인들과 어울렸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비약이다. 그렇게 따지면 기사가 되겠다고 소드 팰러스를 찾는 수련자들은 모두 초인파의 첩자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조용히 그를 돌려보내면 될 일이 아닌가. 꼭 이런 이상한 꼴을 만들 이유가 있는가?”
“……그가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인물이지만 그만큼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네. 어쨌든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이지 않은가.”
라발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말에서 그 뒤에 감추어진 수많은 속뜻을 느끼고 눈앞이 캄캄했다.
‘검후…….’
그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카일란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저런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검후가 실종되기 전에는 저런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검후가 실종되기 전의 소드 팰러스는 그가 알고 있는 기사의 성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라발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너무나 낯선 모습에 눈앞이 아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드를 그렇게 경계한다면 검후님의 빈자리를 어쩔 생각인가?”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힘이 크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속에서 확실히 자리 잡고 있는 이름도 새롭게 알 수 있었네.”
“……”
“게일 인테그란 경.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