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4화
521화
라발은 기가 막혔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드에 대해서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했다. 소드 팰러스는 황제가 검후에게 내린 성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넘길 수 없다고도 말했다.
‘다 개소리지!”
그렇다면 이드를 데려오기 전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드 팰러스를 실질적으로 주무르고 있는 작자들이?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고는 그것을 이유로 걸어 이드를 밀어내고 있다. 생각 이상으로 호감과 환호를 보내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당황한 것이다.
더 기가 막힐 일은 그러면서도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확보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포기하지 않고 취하겠다는 뜻을 보인다는 것이다. 어찌나 훌륭한 도둑놈의 심보인지, 차라리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라발이었다.
‘더 기가 막힐 일은 이드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게일 인테그란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라발은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었다.
게일 인테그란은 그 역시 잘 알고 있는 젊은 기사였다. 라발도 30세 이하의 기사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뛰어난 기사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는 검후의 유일한 제자라는 공식적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어서 다른 기사들에게는 없는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어리다. 그는 검후님의 제자일 뿐 검후님은 아니다. 또 옛날의 마인드 마스터처럼 어린 나이에 모두가 인정할 만큼 경악스러운 실력을 보유한 것도 아니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이름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라발이 보기에 카일란들이 게일의 이름을 꺼낸 것은 그라면 어느 정도 구색도 갖추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했다.
거기에 최근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는 인테그란 후작의 활동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라발도 후작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후~”
라발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란이 조용히 라발을 보았다. 혹 그가 갑자기 날뛰는 것은 아닌가 했지만 고요하다 못해 축 늘어진 기력으로 보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직 이야기가 더 남았네만.”
“나머지는 나중에 듣지. 그게 아니라도 꼭 들을 필요는 없는 것 같고.”
“………나중에 내가 집으로 들르도록 하지.”
“마음대로 하게.”
라발은 카일란의 말에 무심히 대답한 뒤 방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접견실에서 나갔다. 그의 어깨는 접견실을 들어올 때보다 한 뼘이나 낮아져 있었다.
블레터가 그 모습을 보고 낮게 혀를 차고는 라발의 뒤를 이어 접견실을 나섰다.
그러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하얀 머리가 멋스러운 노년의 신사가 카일란에게 말했다.
“라발의 일은 자네가 잘 풀어 주게.”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는 바위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라발을 이드와 같은 자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 낸 것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라발은 그런 식으로 확실히 현실을 박아 넣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는 인물인 것을 자네가 잘 알지 않나. 애초에 그래서 라발을 같은 자리에 두고 이드를 몰아붙인 것이고. 더구나 이미 지나간 이야기야. 소드 팰러스와 제국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라발 본인을 위해서도 자네가 그를 잘 다독이도록 하게. 소드 팰러스가 가지는 힘은 우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그 힘이 엉뚱한 인간의 손에 들어간다면 제국이 무너질지도 몰라. 소드 팰러스와 제국, 그리고 검후를 위해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작동할 수 있는 자가 검후의 자리를 채워야 하네.”
노신사는 카일란에게 무거운 짐을 던져 주고는 접견실을 나섰다. 남은 사람들 역시 그를 따라 접견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카일란은 이후 라발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접견실을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라발의 시선이 눈에 선했다.
“내가 과연 제대로 판단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번 일로 그가 날 비난하지 않을까?”
카일란은 오랜 시간 접견실에서 고민했다.
에단이 방에서 나간 후 이드는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소드 팰러스에서 이드 일행에게 내준 방은 제법 컸다. 거실을 제외하고 침실만 세 개가 붙어 있었고, 한쪽에는 커다란 욕실도 딸려 있는 방이었다. 마치 호텔의 VIP룸 같았다.
[혹시 모르죠. 필요한 걸 여기다 넣어 두고 나오지 말라고 할지도. 접견실에서 난리를 피운 모습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거예요.]
새의 모습이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방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라미아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농담으로만 받아 넘길 수 없는 말이라는 사실이 무서운 소드 팰러스였다.
이드가 일리나와 라마아와 함께 방을 둘러보고 가장 넓고 아름다운 방을 고르더니 말했다.
“자, 간단하게 짐을 풀어 볼까?”
[무슨 말이에요. 우리한테 짐이 어디 있다고요.]
사실이었다. 그들의 짐은 모두 라미아가 가진 아공간에 완벽하게 보관 중이었다.
“아니, 그래도 여기서 적잖이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필요할 때마다 널 괴롭힐 수는 없잖아. 미리 챙겨 둬야지. 그리고 당장은 먼지가 가득한 옷도 갈아입고 따뜻한 물에 몸도 좀 담그고 싶거든.”
“이곳에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요?”
이드의 말에 따라 라미아가 꺼내 준 옷을 정리하던 일리나가 물었다.
“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오래 머물게 될 것 같네요. 아무래도 돌아가는 분위기가 복잡하잖아요?”
이드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일리나는 이드의 대답에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녀도 이드와 함께 그들의 억지를 지켜봤기 때문이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그들로 인한 고생도 적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리나는 과거 숲을 떠날 때 인간에 대해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질서 속에 혼돈은 품은 생명이 인간이다.
과거 혼돈의 파편이라는 강대한 적이 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은 단순하고 순수했다. 하지만 강대한 적이 사라지고 같은 종족끼리 다툼을 시작한 인간들은 음험하고 복잡했다.
과거 들었던 말과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나는 이드를 위해서 좀 더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드의 실력이라면 다칠 일은 없겠지만 인간적인 관계에서 마음이 상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드는 일리나의 표정이 좋지 않자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하고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오래 있지는 않을 거예요.”
“알았어요.”
이드는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욕실의 문을 열고 세 사람이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것 같은 욕조에 물을 받으며 말했다.
“욕조도 넓은데. 일리나, 같이 씻지 않을래요?”
“좋아요.”
이드의 말에 일리나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들어왔다.
라미아도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앗, 나두, 나두요. 그런데 에단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라미아의 말대로 욕실이 방과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실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곤란한 상황이 연출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드는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무슨 걱정이야. 저 문 앞에서 열심히 이 방을 지켜 주고 있는 양반들이 있는데, 미리 말해 두면 되지. 하핫.”
이드는 짧은 웃음과 함께 방문을 빼꼼이 열었다.
그러자 이드의 말대로 문 앞을 지키고 선 네 명의 기사가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지키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출입을 통제하고 이드들을 감시하기 위한 기사들이었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 말이에요.”
그런 이드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라미아가 물 온도를 맞추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드의 부탁 덕분에 잠시 후 돌아온 에단은 갑자기 문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에 막혀 한참 동안 방문 앞을 서성여야 했다.
오랜만에 이루어진 세 부부의 오붓한 시간이 생각 외로 길어진 때문이었다.
에단은 여러 사람의 지인을 통하고 나서야 원하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소드 팰러스를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덕분에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자리를 옮긴 때문이었다.
“이야, 록! 이게 몇 년 만이냐. 오랜만이다!”
에단은 몇 년 만에 친구를 불러내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록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에단과 같은 시기에 소드 팰러스에 들어온, 말하자면 에단의 동기였다. 검에 대한 재능은 조금 떨어지지만 머리 회전이 빠르고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현재 인력 운용과에서 일하고 있었다.
소드 팰러스에 왔다는 것은 검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뜻.
그런 사람이 서류 작업만 하고 있다는 것이 언뜻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록을 비롯해서 소드 팰러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비록 재능이 없어 검사가 아니라 행정 일을 맡고 있다고는 해도 소드 팰러스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꾸준히 검술을 가르쳐 주고, 수련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소드 팰러스가 아니라 외부에 있었다면 일찌감치 가능성 없는 검을 손에서 놓아야 했을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드 팰러스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각자 마음속의 검을 놓치지 않고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소드 팰러스의 운영을 위해서 외부에서 모셔 온 인력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 살아 있었구나.”
록은 오랜만에 보는 친우의 반갑게 손을 마주 잡았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살풋 표정이 굳어졌다.
에단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표정 변화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몇 년간 보지 못한 회포를 풀었다. 그러다 에단이 적당하다 싶은 시점에 록을 찾은 이유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록, 내가 오늘 돌아와서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에단은 높으신 양반들의 일과 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 내심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에단의 고민을 록이 깨끗이 해결해 주며 입을 열었다.
“역시 네 녀석이구나? 이드라는 남자를 데려온 게.”
“어, 엉? 네가 어떻게 아냐?”
“그걸 어떻게 몰라? 적색 기사단이 돌아오는 걸 보고 소드 팰러스의 모든 기사들이 뒤를 쫓아 달렸는데, 지금도 그 때문에 기사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붕 떠 있잖아.”
“아, 참. 그랬지.”
에단은 록의 말에 검궁으로 향하는 대로에서 뒤를 쫓아오던 젊은 기사와 검사들을 떠올리고는 이마를 쳤다.
그리고 록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임마. 넌 어쩌자고 그 이드라는 남자를 데려온 거야?”
“뭐?”
에단은 록의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한 데자뷰를 느꼈다.
어쩐지 접견실에서 봤던 검왕의 모습과 너무나 닮은 친구의 모습 때문이었다.
에단은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이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소드 팰러스가 맞는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인드 마스터의 가르침을 받아 초월의 경지에 오른 검후의 보금자리. 기사들의 요람. 검사의 성지.
검후 이상으로 마인드 마스터가 존경받는 곳이 바로 소드 팰러스였다.
그런데 그런 소드 팰러스에서 연속으로 마인드 마스터를 배척하는 모습을 접하게 되다니 말이다. 그것도 이런 일이 있기 전 마인드 마스터와 검후 다음으로 존경하던 검왕분들과 친했던 친구를 통해서.
“이런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야!”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의 연속에 기어이 에단의 뚜껑이 열려 버렸다. 록이라는 엉뚱한 피해자를 생산하면서 말이다.
“이,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래!”
에단을 보며 정색하고 있던 록은 갑작스러운 에단의 발작에 순간 쫄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