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5화
522화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 검사들의 인내심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정확한 데이터를 근거로 하자면 약 45시간 정도?
무슨 소리인가 하면, 검궁에 들어 전혀 나오지 않는 이드의 소식에 목마른 검사들이 참다못해 이드에 대해서 문의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45시간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스타의 팬이 모여서 스타가 나오길 기다렸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이들은 극성적인 사생팬이라 긴 시간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이름값이 있는 만큼 검궁에서도 볼일이 많은가 보다 하고 납득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못했다.
소드 팰러스의 모든 젊은이들이 선배와 스승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선배와 스승이라고 해도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이드가 소드 팰러스에 입성하는 날, 적색 기사단의 뒤를 따라 달린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이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고,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결국 그들도 젊은 기사들의 요청이라는 핑계를 대고 책임자를 찾았고, 그렇게 이드를 보고 싶다는 요청은 위를 향해 올라가서 최후에는 이드가 접견실에서 만났던 긴급 대책위의 귀에까지 닿았다.
그렇지 않아도 소드 팰러스에 상주하는 기사들의 열띤 반응에 이드를 견제하고 멀리하고 있던 대책위였다. 그렇게 신경 쓰던 기사들이 모두 나서자 그냥 침묵하고 있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긴급 대책위는 소드 팰러스의 이름으로 이드에 대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존경하는 소드 팰러스의 모든 검우들에게 전한다.
전날 스스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이드라는 이름의 젊은 검사가 적색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며 본 성에 입성했다. 이는 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번 일은 실로 중요한 일이다. 그가 감히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을 내세운 때문이다. 소드 팰러스에서는 이를 절대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절대 당사자의 한마디 말만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에 본 성은 이드라는 검사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실을 확인하는 중에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아, 그러나 검우들은 실망하지 마라. 아직 그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아니라는 확증도 없는 상황이다.
부디 당부하건대 검우들은 이 조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그와의 개인적인 접촉을 피해 주기 바란다. 이것은 긴급 대책위의 이름으로 금지된 사항이다.
긴급 대책위 스미스 클라인 백작-
긴급 대책위에서 발표가 있다는 말에 모여 들었던 기사들은 크게 실망하고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금지 사유가 너무나 분명한 긴급 대책위의 발표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도 엉뚱한 사기꾼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스스로를 마인드 마스터라고, 또는 그의 제자나 아들이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기사들은 그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기꾼에게 속은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흩어지는 기사들 속에 서 있던 에단은 마지막까지 남아 글을 읽고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단 한 마디를 했다.
“지랄!”
꽈앙!
에단이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고 방으로 들어왔다.
“에이 씨!”
“또 무슨 일이야?”
이드가 씩씩거리는 에단을 보고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물었다.
“마스터. 제가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가 막힌 글을 읽었습니다.”
에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읽었던 내용을 말해 주면서 분을 터트렸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조사는 또 무슨 조사구요. 언제 조사를 하기는 했나요? 거기다 언제 마스터가 소드 팰러스로 데려가 달라는 연락을 했다고 그런 말을 적습니까. 순 거짓말투성이예요.”
이드는 분해 죽겠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리는 에단의 모습에 끌끌 혀를 차고는 물 잔을 내밀었다.
“자, 이거 마시고 진정해. 긴급 대책위던가? 그네들이 그러는 게 한두 번이냐? 뭘 새삼스럽게 화를 내고 그래?”
“한두 번이 아니니까 화를 내는 거라구요. 마스터는 화도 나지 않으세요? 당장 지금만 해도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별로. 시간 되면 밥도 주고, 간식도 주잖아. 따뜻한 물도 나오고, 푹신한 침대도 있고, 읽을거리나 볼거리도 충분하고. 요 며칠 열심히 움직였으니 조금 편하게 쉰다고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어.”
이드의 느긋한 대답에 에단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에단은 자신이 속한 소드 팰러스가 마스터에게 하는 짓을 보며 속이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스터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느긋하기만 하다 보니 어쩐지 혼자 화를 내고 있는 것만 같은 자신의 모습에 기운이 빠져 버렸다.
그때 일리나와 바둑을 두고 있던 라미아가 말했다.
[뭐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요. 검궁에 온 첫날 그런 일을 겪고, 여기서 제대로 손님 대접받을 생각은 버렸다고 했잖아요.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왜 불렀대요?]
라미아는 바둑돌을 내려두고 에단을 보며 돌아앉았다.
에단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뭐, 별일은 아니었어. 그것보다 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안 되냐?”
[왜요? 내 모습이 어때서?]
라미아의 물음에 에단이 몇 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뭐랄까, 그…………… 에이 씨, 암튼 난 그 모습이 싫어. 징그럽다고!”
그 말에 라미아는 ‘뭐가 이상한 거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지금 그녀는 평소와 같은 새의 머리와 몸에 인간의 팔다리가 붙은 형태였다. 물론, 팔다리는 몸과 같은 강철이다.
아무래도 날지 않는 상태로 있을 때는 인간의 팔다리가 새의 그것보다는 편했다. 라미아는 그 상태로 양반다리를 하고서 일리나와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체 변환은 최종적으로 인간으로 변신하기 위한 수련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에단에게는 생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형태였던 모양이다.
유별난 그의 반응에 라미아가 이드와 일리나에게 뭔가 이상한 점이 있냐고 물었지만, 두 사람은 거부감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쓸데없이 예민하다니깐.]
하지만 굳이 일행을 괴롭힐 생각이 없는 라미아는 순순히 에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드는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에단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래?”
“…..보고서를 올리랍니다.”
“이제 와서?”
“그러니까요.”
이드는 힘없이 대답하는 에단을 바라보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위층을 올려다봤다.
보고서를 볼 생각이 있었다면 보고서부터 확인하고 이드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에단의 의견이 필요했다면 접견실에서 에단에게도 질문이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에단을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 놓고는 지금 와서 보고서를 찾고 있다.
이드는 전시 행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마, 오늘 발표한 내용과 관련해서 실제로 이드를 조사했다는 증거 자료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쯧. 어쩜 점점 갈수록 기사의 성지보다는 국가 기관처럼 느껴지는지.’
에단도 이드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돌렸다.
“아, 그리고 소드 팰러스를 돌아보는 것은 이틀 정도 기다리라고 합니다. 빠르면 이틀 후부터, 늦어도 삼일 후부터는 밖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틀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자, 이드는 마침 호출을 받은 에단을 통해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원래는 이드가 물어본 거였지만 이 소식을 가장 기다리고 반기는 사람은 이드가 아니라 일리나였다. 숲의 종족이라 불리는 그녀로서는 딱딱한 방에 갇혀 있는 것이 고역인 듯했다.
“그럼 그때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가요?”
“네, 중요 시설만 조심하고, 소드 팰러스 밖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어디든 가도 좋답니다.”
일리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에단은 그녀를 뒤로하고 이드 옆으로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제가 보고서를 쓰기 전에 마스터께 한 가지 확인해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뭐가?”
“마스터의 진짜 정체 말입니다.”
“내 진짜 정체? 나도 모르는 내 정체가 있었나?”
“마스터, 장난치지 마시구요. 마스터께서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보고서를 사실대로 쓸까요?”
“흐음.”
이드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사실대로 썼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이 일은 크게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너무 확실하고 극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지. 에단의 보고서를 거짓이라고 판단할지도. 어쩌면 첫날처럼 내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할지도 모르겠군. 하하하.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한다. 그것도 재미있기는 하겠네.’
한편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억지를 부리며 자신을 견제하고 밀어내던 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극적으로 바뀔지,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드가 씨익 웃으며 에단을 보고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써 봐. 어떻게 굴러도 상관없을 것 같으니까.”
에단의 얼굴 위로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 마스터.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실 일이 아닙니다. 이건 중요한 일이라구요. 어느 쪽이든 분명하게 정해 주셔야 저도 그에 따라 일을 하죠.”
“내가 왜 그런 걸 정해 줘?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하세요. 크큭.”
이드는 기대된다는 듯 악동처럼 웃고는 책을 다시 들어 얼굴을 가려 버렸다.
더 이상 건들지 말라는 듯한 이드의 모습에 에단이 어쩔 줄 몰라 하다 일리나와 라미아를 찾았지만, 두 사람 역시 일찌감치 멈췄던 바둑을 다시 시작한 후였다.
“으아~ 젠장…….”
에단은 힘없이 고개를 숙인 후 한쪽에 마련된 고급 책상 앞에 앉아 빈 종이를 꺼내 펼쳤다.
‘빌어먹을.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에단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드는 쉽게 말했지만, 자신이 적는 방향에 따라서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에단으로서는 여간 갈등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전이었다면 소드 팰러스에 득이 되는 일들을 사실대로 보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삼일 간 소드 팰러스가 이드에게 하는 꼴을 보고 단단히 마음의 뿔이 솟아난 에단은 어쩐지 진실을 알려 주기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의 정체를 감추고 이대로 둔다면 아마 소드 팰러스와 마스터는 완전히 갈라서겠지?’
순간 에단은 마조히즘적인 짜릿한 쾌감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소드 팰러스가 마인드 마스터의 적이라니.
‘아니야. 아니야. 정신 차려라, 에단!’
엉뚱한 망상에 빠질 뻔했던 에단은 스스로의 머리를 두드리며 생각을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 펜 끝을 노려보다 종이에 꾹 눌러 첫 글자를 완성했다.
‘제길. 원래 이런 중요한 일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닌데. 아, 속 쓰려. 뱃속에 구멍이 나는 것 같다. 제발, 내 보고서가 엉뚱한 폭탄이 되지 않기를 빈다.’
에단은 간절한 마음으로 글자에 힘을 주었다.
찌이익-
“아, 정말 별게 다 속을 썩이네!”
하지만 에단도 설마 자신의 보고서가 바로 읽히지 않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