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71화
1306화
네 명의 네트나.
그들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인공 초인들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 비록 찰나였지만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선 충분히 큰 허점이 되었다.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은 기사의 검에 인공 초인 22명의 목이 마저 떨어졌다.
확실히 네트나는 인공 초인과는 다른, 특별한 면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트나의 죽음에 인공 초인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 뭔가.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다.
여섯의 네트나가 모두 죽었으니까.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을 구르는 머리.
“휴~ 제법 까다로운 놈들이었어요.”
그걸 보며 스폴이 혀를 쏙 빼문다.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 거기에 떠오른 일그러진 표정을 보면 혐오스러울 만도 하건만, 여상한 모습이다.
하긴, 은색 기사단의 수석 기사인 그녀의 검에 죽어 나간 작자가 어디 한둘일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쉴라를 앞에 두고 이제 와 새삼 내숭을 떨 일도 없다.
“역시 마법사가 엮이면 뭐든 복잡해지는 것 같아요.”
“그게 마법사니까.”
“이제 그 마법사의 멱을 딸 때죠.’
스폴이 서늘한 눈으로 저 멀리 선 펠튼을 노려본다.
그녀들이 싸운 것은 초인. 하지만 그들을 만들어 내고 조종해 자신들의 싸움에 내놓은 것은 바로 저 앞에 선 펠튼이었다.
그로 인해 아끼고 아끼는 부하 중에 부상자가 벌써 여럿이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지만, 피 흘리는 부하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다친 듯 안타까웠다. 이제 그 복수를 해 줄 때다.
“멱을 따는 것도 좋지만, 그러려면 우선 본체를 끌어내는 게 우선이야.”
“그거야 뭐, 아래층에서처럼 이드 님이 해 주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거예요?”
“그냥 좀…”
스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와 나란히 선 쉴라가 고운 눈썹을 일그러트린 상태로 연신 사방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주변에 있는 거라고는 다시 싸움을 시작한 기사들과 인공 초인들뿐이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스폴이 한발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그때.
무엇을 본 것일까. 아니면 숨어 있던 무언가를 감지한 것일까.
경악과 다급함이 교차하는 얼굴의 쉴라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놀라운 속도로 스폴의 가슴 앞을 향해 검을 뻗어 냈다. “…….”
그와 동시에 다급하게 나오는 경고음.
그러나 뾰족한 창촉과 그 끝에 매달려 회전하며 뿌옇게 압축된 마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그보다 먼저였다.
슈르르륵,
그야말로 쏘아지기 직전의 화살. 어떻게 이런 공격이 코앞에 다다를 때까지 모를 수 있을까.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창날을 앞에 둔 스폴은 놀람을
뒤로하고 방어 자세를 취하려 했다. 지금은 공격보다는 방어가 먼저라 판단한 것.
하지만 그녀가 태세를 굳히기도 전, 창이 쏘아지는 게 더 빨랐다.
콰콰콱!
이대로면 가슴이 관통당하고 만다. 그렇게 판단된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검날이 창날을 막아선다.
쩌러러렁!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찢을 듯하다. 전진하던 창날이 주춤한다. 하지만 겨우 때를 맞춘 검날에는 온전히 힘이 담기지 못했다.
끼이이익!
창에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지는 검날. 이대로는 창이 검을 뚫고 스폴의 가슴을 관통하고 만다.
‘스폴!’
그야말로 놀라운 기습. 하지만 정정당당한 결투도 아니고, 목숨을 건 전투도 아닌 기습 따위에 잃기에는 스폴은 그녀, 쉴라에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손을 뻗기는 힘들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정녕 이대로 스폴을 잃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다.
피잉-
있는 힘껏 부릅뜬 눈에 공간이 갈라지는 모습이 보인 듯하다. 아니, 분명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콰쾅!
마치 포탄이 터진 듯한 소리. 더불어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뿌연 마나를 휘감고 있던 창날이 산산이 조각나 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창날이 음산하게 모습을 드러내던 공간이 파문이 생긴 양 일렁이더니, 그대로 잘게 쪼개졌다.
“끄아아아악!!”
그리고 그렇게 쪼개진 공간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소리는 묘했다. 마치 세 명의 목소리가 겹친 듯 음울하고 기분 나쁘다.
하지만 지금 그런 데 신경 쓸 때인가.
“물러난다!”
쉴라는 창날이 사라진 반동을 이용, 스폴의 옷자락을 낚아채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으로부터 수 미터 뒤로 미끄러지며 거리를 벌렸다.
위기를 벗어났으니 무엇이 스폴을 구했는지도 살펴야 했다. 분명 아군인 것은 확실하지만, 누가 이 긴박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을까.
‘검후님?’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상대는 검후였다. 자신의 태양이자, 은색 기사단의 주군. 언제나 자신들을 향해 따뜻한 손을 내미는 그녀라면.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검후가 아니었다.
“위험할 뻔했어요. 스폴 경.”
“이드님!”
“……덕분에 스폴 경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스스슥.
소리 없는 봄바람처럼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이드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스폴과 진심을 다해 감사를 표하는 쉴라를 보며 손을 들었다.
슈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 손으로 날아드는 일라이져.
‘조금・・・・・・ 위험한 순간이었지.’
검자루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냉기를 느끼며 이드는 스폴을 바라보았다. 사방을 돌아보던 쉴라와 마찬가지로, 이드도 이상을 감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목이 떨어진 네 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초인력이, 허공으로 흩어지기는커녕 끈적하게 엉겨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운이란 본래 원정이 없으면 흩어지고 마는 것. 그런데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뭉친다는 말은, 원정이 살아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미 죽은 여섯 말고 일곱 번째 인물이라도 있는 것일까. 막 그런 의문을 가리려던 찰나, 엉겨 붙어 있던 기운이 한점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점의 위치는 스폴의 정면. 그녀와 쉴라가 목을 벤 적의 시체 바로 위였다.
그렇게 심상치 않다 느낀 순간. 공격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공간을 비집고 나타난 창이 스폴을 꿰어 버리려 한 것. 쉴라가 창을 막으려 했지만, 그녀의 속도로는 부족했다.
초인력의 수습. 창의 출현과 공격. 그리고 쉴라의 방어까지.
그 모든 것이 한 덩이가 되어 0.3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동시에 일어난 다음 순간. 이드는 더 볼 것도 없이 적을 향해 검을 뽑았다. 아니, 그조차 낭비다.
의지가 검에 담기는 순간 일라이져가 저절로 날아올라 공간을 넘었다. 그렇다. 공간을 가로지른 것이 아니라, 공간을 베어 넘겼다.
어검술.
그중에서도 최고 단계에 이른 심어검이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공간을 가른 일라이져는 그대로 적이 숨어 있는 공간까지 부숴 버렸다. 그 너머에서 들려온 비명은 공간과 함께 조각난 적의 단말마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적에게 일격을 먹인 이드는 후방의 방어를 라미아에게 맡기고 직접 달려 나왔다. 아무래도 저 공간 너머에 웅크리고 있는 놈은 자신이 직접 상대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아무렴 앞서 하나를 넘겼으면 되었지, 숨어 있는 놈의 처리까지 일리나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적을 죽였다고 방심했습니다. 설마 은신한 적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살짝 자책이 섞인 목소리.
이드는 그런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방심도 아니고, 은신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길 보세요.’
“……어째서 시체가?”
쉴라의 눈이 커진다.
이드가 가리킨 곳은 그녀와 스폴이 목을 베어 낸 시체가 있어야 하는 자리. 그런데 지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따로 떨어진 머리와 몸이 사라진 것.
“다시 살아난 겁니다. 아니, 목이 잘리고도 죽지 않는 거겠죠.”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건 그야말로 신의 이적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그러니 목이 잘리고도 죽지 않은 것이 정확하리라.
물론 그 역시 기이한 일이긴 하나, 아마도 그런 종류의 초인기이지 않을까.
재생 능력이 극도로 뛰어난 초인기라면 잘린 목을 붙이는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말이 쉴라에겐 달리 해석된 모양이다.
“마무리가 어설펐던 것이로군요.”
“…….”
묘하게 우울한 그녀의 모습에 이드는 말을 줄였다. 아니라고 해 봤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알았든 몰랐든, 그녀가 상대하던 적이 다시 살아난 것은 사실이니까.
“아프다! 아파!”
“죽인다!”
“닥쳐! 시끄러우니까 닥치라고!”
때마침 위치를 알 수 없게 사방에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각자 말하는 내용이 다른데, 희한하게 한 사람의 목소리다.
“이놈은 내가 상대하죠. 그래도 되겠죠, 쉴라 단장?”
“여기서 더 미숙한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보다는 그러는 편이 낫겠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쉴라는 곧 스폴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그곳에는 어느새 자리를 옮겼는지 검후와 일리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마 두 사람도 스폴이 공격받는 순간에 도우려 했던 것이리라.
그런 이들을 뒤로한 이드는 펠튼이 있는 쪽을 한번 바라본 후,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
하지만 이드의 눈에는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 사이로 미세하게 벌어진 틈이 보였다. 마치 닫혀 있는 커튼과 같은 모습.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나오게 만들어 줄 수도 있고.”
“으아아~ 내가 어째서!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게 다 저놈들 때문이잖아!”
“죽이자! 다 때려죽이자!”
역시 한 사람의 목소리. 하지만 세 명의 말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혹시 쉴라가 목을 쳤던 적처럼 분신이라도 만들어 낸 것일까. 한데 말하는 투가 절대 제정신은 아닌 듯했다.
미친놈을 상대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에 이드가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투쾅,
닫혀 있던 공간을 때려 부수는 듯 거친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공간을 비틀어 열며 손 하나가 튀어 나왔다.
손은 컸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오우거의 그것 같이 생긴 손.
터턱!
뒤이어 손 하나가 더 나와 비틀어 열린 공간을 잡는다. 거기에 다시 손이 더해지고, 다시 더해지고, 다시 더해진다. 전부 해서 여섯 개의 손.
역시 그 안에 세 명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잠시 후 공간을 열고 나타난 것은 세 명의 인물이 아니었다. 커다란 몸에 붙어 있는 여섯 개의 팔.
그리고 뒤이어 튀어나온 하나의 머리에는 놀랍게도 두 개의 얼굴이 더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