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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화


446화

“그럼 90년이나 마력을 뽑아내고 있다는 말이네요?”

라일로시드가가 봉인의 문제를 90년 전에 해결해 줬다고 했으니 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90년이다.

이드의 질문에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금 틀리지만요. 라일로시드가 님이 봉인을 변형하고 마력선을 까는 데 7년이 걸리셨기 때문에 정확히는 83년이에요.”

90년에서 7년이 빠진다는 소리다. 90년에 비하면 7년 정도는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가 아니니 그냥 90년으로 보는 게 편하다.

“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이 봉인되어 있는 거야? 그 긴 시간 동안 마력을 빼앗기면서도 살아 있단 말이야?”

마을에 설치된 마법 물품들을 생각하면 정말 경악할 만한 힘이었다. 덕분에 한 해가 지날 때마다 그런 괴물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에 우디가 몸서리를 친다.

“라일로시드가 님은 소멸까지 정확히 141년을 예견하셨어요.”

83년만 해도 충분히 긴 시간인데 거기에 더해서 58년간 더 빼앗길 힘이 남았다는 것이다. 정말 제때 봉인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푸른 나무 마을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그레센 대륙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입는 대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 봉인, 직접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말을 하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하하하. 이제 오셨군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들 하십니까?”

이드를 초대한 윌이었다. 아이들로 인한 웃음이 아직 입가에 묻어 있는 듯 보였다.

“봉인에 대해서 일리나에게 듣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수련장에 여러 가지 마법이 걸려 있어서 물어봤거든요.”

“아, 그 흉물을 말씀하시는군요.”

윌에게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봉인 안에 갇혀 있는 존재는 둘째 치고, 거기서 나오는 마력으로 생활이 한층 윤택해졌다. 그리고 봉인을 다시 정리하고 수습한 사람은 다름 아닌 라일로시드가다. 봉인 안의 존재를 욕한다면 모를까, 봉인에 대해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흉물…………인가요?”

“네.”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석탑 위에 그런 걸 올려 두시다니, 라일로시드가 님께서 장난을 치신 것 같더군요. 덕분에 장로님께서 걱정이 좀 많으셨습니다. 마을 안에 그런 흉물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드는 윌의 말 속에 들어 있는 탑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전날 마을을 안내받던 이드는 정령수의 뒤쪽에서 마을 끝에 유독 검고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나무의 그림자에 묻혀서 잘 눈에 띄지 않게 서 있는 탑과 그 위를 흐르는 시퍼런 귀기도 보았다.

오후에 가 보려고 생각했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 음산한 모습은 푸른 나무 마을과 어울리지 않았다. 위험해 보였다. 그런 것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했다. 혹시 일리나에게 마저 듣지 못했던 우디의 고민거리가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푸른 나무 마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을의 구성원이 된 이드의 문제이기도 했다. 자신의 집이 있는 곳에 그런 귀기가 흐르도록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드는 윌에게 자신이 봤던 나무의 위치와 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거기죠. 저 장난꾸러기들도 무서워서 거기는 가지 않죠.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꽤 인상적인 구경거리기는 하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아이들의 싸움이 끝이 났다. 도망 다니던 남자아이는 여자아이 하나를 쓰러트리고 엎어져 있었고, 그 위로 남은 여자아이 하나가 다리를 올리고 승리의 포효를 올리고 있었다.

인간이나 엘프라는 차이를 떠나서 어느 종족이든 어린아이는 순수하고 잔혹한 모양이다. 아이와 엘프라는 단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모습이었다.

싸움이 그치자 거기에 잡혀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놀이거리를 원하는 눈이었다.

[앗. 이드, 저 좀 숨겨 줘요.]

그 모양을 생각 없이 보고 있던 라미아는 순간 머릿속을 치고 치나가는 싸한 느낌에 급히 이드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라미아의 행동은 한발 늦은 것이었다.

“앗, 라미아다.”

오히려 은빛의 화려한 그녀가 빠르게 움직이는 게 아이들의 눈에는 더욱 잘 띄고 말았다.

“잡아랏!”

[이 꼬맹이들, 왜 날 못 잡아 안달이야. 내가 무슨 죄인이야! 오늘은 그냥 당하지 않는다고!]

당차게 소리를 지르며 날개 주먹을 쥔 라미아였지만 공중에 떠 있는 그녀의 신형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말과는 달리 주먹을 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라미아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한 아이의 외침을 신호로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전날 라미아를 잡지 못한 게 퍽

아쉬웠는지 작전이라도 짰던 모양이다. 아이들 세 명이 뛰어오던 기세 그대로 그 앞의 아이들을 발판 삼아 라미아를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진형까지 짜서 날아오는 아이들의 모습에 라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드를 찾았다.

[이, 이드. 쟤들 좀 어떻게 해 봐요.]

“미안. 나도 얘들은 대적 불가야. 부디 잡히지 말고 잘 도망쳐라!”

이드는 그 말과 함께 공중에 떠 있는 라미아를 아이들의 손을 피해 부드럽게 내공을 사용해서 밀어냈다. 느긋한 움직임과 다르게 이드의 손을 떠난 라미아는 순식간에 십 미터 이상 뒤로 미끄러져 나갔다.

[이드, 바보. 멍청이. 마을에 오고서부터 저한테 너무 소홀한 거 아니에요? 돌아와서 보자구요. 복수할 거야!]

“무사히 돌아와라!”

라미아의 원망을 애써 웃음으로 때우는 이드의 옆으로 파라락파라락 바람에 옷을 날리며 아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정해진 팀끼리 쫓아!”

“그물 가져와. 오늘은 꼭 잡고 만다!”

“알은 내 거야!”

역시 생각대로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지막 말을 외치는 녀석은 어떤 의미로 좀 위험해 보였다. 이드는 마지막 녀석만은 자신이 미리 처리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순간 갈등하고 말았다.

고민 중인 이드의 곁으로 일리나가 다가왔다.

“미안해요, 이드. 괜히 아이들 때문에 라미아가 곤란하게 돼서.”

“일리나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제게 미안할 일도 아니고. 아이들이 장난치고 노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그리고 좋은 점도 있잖아요. 이틀 만에 금방 친해졌으니까요. 전 몰라도 라미아를 모르는 엘프는 마을에 없을걸요.”

그러는 한편 이번에도 아이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면서 나름대로 섭섭한 이드였다. 항상 라미아와 함께 있는 이드였지만 아이들은 라미아만 쫓을 뿐 이드에게는 한 번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외부에서는 수많은 추적자가 붙었던 인기인이었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나가 버리자 수련장이 텅 빈 듯 조용해졌다. 역시 이십 명이 넘는 아이들의 존재감은 굉장했다.

“하하하. 그렇죠. 그녀를 모르는 엘프는 마을에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윌이 끼어들었다. 나름대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거기에 눈치 없이 끼어든 것이다. 한 쪽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채이나가 쯧쯧 혀를 차며 ‘저러니 인기가 없지.’ 하고 작게 혼자 중얼거렸다.

“크흠. 아무튼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친구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채이나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묘하게 얼굴이 붉어진 윌의 소개로 전날 가볍게 인사를 나눈 엘프들과 다시 인사를 나눴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수백 명이 한 사람을 기억하기는 쉽지만 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는 마을 사람들을 기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드는 다시 한 번 그들의 얼굴을 익혔다.

인사를 마치자 윌이 나서서 이드를 초대한 이유를 이야기했다.

“일리나에게 이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굉장한 실력을 가지신 분이라고요. 그리고 고맙게도 일리나를 통해서 이드의 무공이라는 독특한 마나 컨트롤에 대한 비법과 전투술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꾸벅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윌을 따라서 그 뒤에 서 있던 엘프들도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야말로 기쁘군요.”

이드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무공을 보고 보완된 루인 피스트를 배운 마오를 볼 때와는 달랐다. 자신이 직접 전수한 무공을 배운 사람들의 감사 인사였다. 저들과 자신 사이에 무공으로 인해서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라일론에서도 자신의 무공을 익힌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는커녕 더 많은 무공과 라미아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위협했다. 절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와 비교되는 엘프들의 모습에 이드는 마음처럼 푸근하고 넉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리나에게 전한 무공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죠.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일리나의 마음. 여러분들에게 무공을 전한 건 그녀가 그만큼 마을분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겠죠. 그런 마음으로 오래전 무공을 전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저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드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공을 일리나에게 돌렸다.

“일리나에게는 이미 충분히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원주인의 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 충분히 감사를 받으실 만합니다.”

“인사는 잘 받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르신 이유가 단순히 인사만을 위해서는 아닐 테고, 다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이드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감사 인사에 제동을 걸었다. 보기 좋은 상황에 마음이 넉넉해진 이드의 말에는 이상한 요청만 아니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무공 관련인 것 같으니까 부담도 없지.’

그렇지 않았다면 괜히 수련장에 초대하지도, 무공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련장에는 의자가 없었기 때문에 윌이 적당한 높이로 조성된 연무장의 한쪽에 이드들을 앉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이드를 수련장에 초대한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무공 때문입니다. 일리나가 전해 준 무공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한 비법들의 덩어리와 같았지요. 그래서 일리나가 알려 주는 대로 열심히 익혔습니다. 그런데 오리지널을 그대로 익혀서 성과를 보인

소수의 엘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엘프들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일리나가 배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원인이 뭔지는 확인됐습니까?”

이드는 윌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큰 관심을 보였다. 자신이 전수한 무공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말에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반응한 것이다. “종족의 차이더군요. 인간과 엘프가 가지고 있는 근원의 마나. 그 마나의 성격이 인간과 달라서였습니다. 무공은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드가 살던 중원에는 이종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종족을 생각하고 무공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무공보다는 인간과 엘프, 이종족이라는 그 부분이 엘프들에게 문제가 된 것이다.

일리나에게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좀 더 조심하고 신중하지 못했던 그때의 자신이 아쉬웠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들도 저희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 때 다른 종족까지 생각하고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드가 전해 준 무공은

결과적으로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신 무공을 저희들에게 맞춰서 변형시켜야 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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