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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07화


1342화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저렇게 좋을까.

이드는 성격 나빠 보이는 플레타에서 부관주로 시선을 돌렸다.

11분이라는 답을 들은 그녀는 침묵 중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실망한 모습. 지휘자라기보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부하에 더 가까워 보인다.

‘탑주가 시간을 끌라는 명령을 내렸군.’

이건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다.

그녀의 말처럼 영혼의 관의 부관주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탑주 말고는 없다. 과연 탑주는 무엇 때문에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이트 타블렛 관련인데.’

그에 관해선 예상하기 어렵다. 바이트 타블렛을 하나 가지고 있고 연구도 했지만, 여러 개가 모인 바이트 타블렛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까지 완전히 파악해 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빠르게 움직이거나, 부관주의 입을 열어야 했다.

“부관주가 원하던 답을 해 드렸으니, 이번엔 부관주가 답해 줄 차례입니다.”

바쁜 마음과는 달리 담담한 어조.

“…….”

그에 따라 부관주의 눈이 자연스럽게 이드를 향했다.

현재 그녀의 마음은 온통 회색이다. 탑주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실망감. 스스로 가졌던 오만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이 지고 말았다는 패배감.

이중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탑주에게 실망을 주었다는 자책이었다.

약속은 한 시간이었지만, 결과는 어떤가.

겨우 11분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11분을 끌었을 뿐이다.

강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실제 싸워 본 명예 후작은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강함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솔직히 자신이 본 명예 후작의 힘도 그의 전력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을 상대하는 명예 후작은 여유로웠다.

또한 이제 와 깨달은 점은, 정신없는 전투 와중에도 명예 후작이 손에 사정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신의 외골격을 거침없이 잘라 내는 검강.

거대한 껍질 속에 몸을 숨기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직접 자신을 베지 않은 것이 과연 우연이겠는가 말이다.

‘처음부터 어찌할 수 없는 상대였던 거야.’

후회가 들었다.

이런 상대를 앞에 두고 시간을 끌겠다고 혼자 나섰다. 뇌가 오만에 절여져 있었기에 내놓을 수 있는 결정이었다.

패배의 가능성이 절반을 넘는다면. 아니, 절반이 무언가. 반의반만 되더라도 여유를 남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토끼 사냥에도 전력을 다하는 사자처럼.

현재 영혼의 관에 남은 모든 전력을 동원해야 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공격에 나서야 했다.

그랬다면 한 시간은 벌 수 있었을 텐데.

“이봐, 명예 후작께서 묻지 않나.”

그렇게 후회가 휘몰아치는 머릿속으로 플레타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었다. 목소리를 따라 플레타를 올려다본 부관주.

자신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그를 본 부관주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끝난 건 아니야. 아직・・・・・・ 기회는 있다.’

전투가 이어진 시간은 11분, 하지만 그보다 앞서 있었던 대화까지 생각하면 대충 30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30분 정도만 더 버티면 되는 일이다.

침묵을 유지하고 고문을 견디거나,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시간을 벌거나. 오로지 자신하기에 달렸다.

문제라면 하나.

‘명예 후작이 얼마나 속아 주느냐는 건데.’ 

쿨럭쿨럭.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 피가 섞인 기침이 튀어나온다.

그렇다. 속이는 것이 아니라, 속아 주느냐다.

그는 앞서 시간을 벌기 위한 자신의 속내를 빠르게 꿰뚫어 본 장본인이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더 빠르게 이쪽의 의도를 알아차릴지 모른다. 어쩌면 말을 꺼내는 순간 알아 버릴지도.

그렇게 된다면 명예 후작은 상층으로 오르려 할 것이다. 과연 그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위에 모여서 철저하게 패배한 지금의 자신을 보고 있을 장로들과 마법사들?

부관주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분명 뛰어난 마법사들이다. 다름 아닌 자신이 키우고 이끌던 사람들이니까.

반대로, 그렇기에 그들의 속성과 실력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연구 마법사들이다.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

물론 시간만 주어진다면 강력한 마법들을 뻥뻥 쏴 댈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을 하나. 명예 후작을 상대로 그들이 승리하는 그림이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는데.

그들은 명예 후작에게 패배할 것이다.

문제라면, 과연 이들이 명예 후작을 상대로 얼마나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절레절레.

냉정히 따져도 최대 20분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위에 있을 장로와 마법사들을 모두 쓰러뜨린다면 길어도 40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런데 명예 후작이라면 어떨까. 20분도 충분히 사정을 봐주어야 가능한 시간이 아닐까.

“이것 참. 아직 날 잘 모르지? 내가 무시를 당하고 가만히 있는 인간은 아니라서 말이야.”

콰드득.

“켁! 커어억!”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플레타의 말소리가 들린 직후다.

가슴 위에 천 근 쇳덩이가 올려진 듯 엄청난 무게가 갈비뼈를 짓누른다. 그것도 온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흉부에 대한 압박.

실시간으로 갈비뼈에 금이 가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림은 물론, 가슴부터 땅속으로 박혀 들어감에 따라 목과 허리가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격렬한 통증!

그에 부릅뜬 두 눈에,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플레타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천근 쇳덩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플레타의 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초인기였던 것.

“커흑・・・・・・ 그르르륵! 그, 그・・・ …….”

“좋아. 이제야 말이 나오네. 명심하는 게 좋아. 저 성격 좋으신 명예 후작님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무시 받는 건 못 참아. 아니, 안 참아!” 

‘그렇게 보였나? 나도 무시 받고 참는 성격은 아닌데. 쩝.’

갑자기 지목받은 이드는 괜히 머쓱한 마음에 주변을 살폈다. 혹시 라미아가 돌아오고 있을까. 아니면 홀로 떨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라울이 달려오고 있을까 했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전투의 흔적으로 무너진 산과 뒤집어진 지반뿐.

다시 아래로 눈을 돌렸을 때 보인 것은 고통에 차서 바쁘게 또 조심스럽게 숨을 몰아쉬는 부관주였다.

온몸을 꼼꼼히 감싸고 있는 외골격, 특히 눈동자도 가려진 외골격 투구 사이로 붉은 핏물이 비집고 나오는 게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부러진 갈비뼈가 이번 플레타가 손을 씀으로 인해서 몽땅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과연 심문에 자신 있어 하던 모습이 허세는 아니었다는 걸까. 손을 씀에 있어 과격하고 과감하다.

그러면서도 정도를 아는 걸까. 만약 조금이라도 더 심하거나, 고통을 가하는 시간이 길었다면 부관주는 심장과 폐가 파열되거나 질식으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플레타 대장의 초인기도 나름대로 응용에 따라 고문에도 충분히 사용이 가능하구나.’

그저 단순하게 폭력을 사용할 줄 알았는데, 설마 방어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외골격의 무게를 증가시키는 방법을 쓸 줄이야.

저런 식이라면 발톱의 무게를 증가시켜 발 속으로 파고들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발톱을 뽑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고통일 것이다. 뽑고 나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뒤꿈치로 빠져나오기까지 근육과 혈관, 신경들을 갈기갈기 끊어 낼 테니까.

그런 응용법이 떠오르자 자연적으로 자신이 각성한 초인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이드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젓고 만다. 자신의 초인기는 금속 조종. 어차피 고문에 사용되는 도구는 대부분 금속이다. 따로 초인기를 사용할 필요조차 없다. 오히려 도구보다는 이러한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플레타는 그쪽으로 상당한 경험을 쌓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명예 후작님, 부관주가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나눠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전부?”

플레타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이드의 눈에 부관주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느새 얼굴을 감싸고 있던 외골격이 사라진 모습이다. 플레타의 협박에 투구를 해제한 것일까.

그렇게 드러나 그녀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다. 지금도 꾸역꾸역 벌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그와 함께 그르륵 거리며 끓어오르는 피거품.

이러한 모습에 이드가 혀를 찼다.

“지금 저 꼴로 이야기 나눌 준비가 됐다고 하는 겁니까? 저래서야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아무렴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피가 아니라 내장을 뱉어 낼 게 아니라면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장이 나오면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말을 하겠죠?”

“……”

과격하다. 완급 조절이 없어 너무 과격하다.

이드는 반성했다. 이런 플레타를 두고 심문 경험이 많다고 생각을 하다니. 세상 고문 기술자가 다 얼어 죽어도 절대 플레타는 실력 좋은 심문관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휴우. 어쩔 수 없지.”

작게 한숨을 쉰 이드는 곧 아공간 속에서 커다란 물병 하나를 꺼내서는 부관주의 얼굴에 부었다.

핏물이 씻겨 나가고 물병에서 떨어진 액체가 부관주의 입과 코를 막아 괴로워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입으로 먹든 코로 먹든, 결코 그녀에게 나쁜 것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창백하게 질려 있던 부관주의 얼굴에 실시간으로 붉은 기운이 돌았다. 동시에 그르륵 거리던 숨소리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변화에 플레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설마 그거 포션이었습니까?”

“포션 맞습니다. 그것도 최상급품이죠.”

“으아~ 그 아까운 걸 그렇게 물처럼 쓸 거면 절 주십시오! 왜 아군이 아니라 적군에게 그런 걸 쓰십니까?”

왜 쓰기는?

당신이 벌여 놓은 사고 뒷수습 중인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하지만 이런 이드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플레타는 그저 부관주의 얼굴에 떨어진 포션을 손가락에 묻혀 쪽쪽 빨 뿐이었다.

그와 함께 이드를 향한 눈빛이 조금 변했다.

이드의 실력이 대단한 것이야 방금 보기도 했으니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상급 포션을 저렇게 물처럼 펑펑 쓸 정도로 재력까지 좋을 줄은 몰랐다는 느낌일까.

조금 애매하긴 하다.

과연 실력이 더 대단해 보인 것일까.

아니면 재력이 더 대단해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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