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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09화


1344화

“짜짠! 나 등장!”

빛이 다 가시기도 전, 그 안에서 짤랑한 목소리가 달려 나온다. 직후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수백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부관주에 의해 따로 떨어졌던 은색 기사단과 플레타 부대원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삼녀일남.

그중 라미아가 당당히 가슴을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오래 기다렸죠?”

말과 달리 금방 왔지 않냐며 칭찬을 바라는 고양이 같은 모습.

틀린 말이 아닌 것이, 그녀가 아니면 누가 이 많은 인원을 챙겨 올 수 있겠는가. 이드는 진심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니, 딱 적당한 때 왔어.”

“혼자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요.”

타박타박 다가온 일리나가 손수건으로 이드의 볼에 묻은 먼지를 닦았다. 그 모습에 라미아가 아쉬운 얼굴로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내가 닦아 주려고 했는데.”

그야말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사랑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현장.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닌 검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부관주를 바라보았다.

“과연. 이쪽이 진짜였단 말이군요. 이번에도 또 명예 후작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신세랄 것도 없습니다. 부관주가 제 앞에 있었을 뿐이니까요. 부관주가 검후님 앞에 있었다고 해도 충분히 처리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글쎄요. 그럴까요.”

이드의 말에 미묘한 톤으로 답하는 검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파괴된 주변 환경을 통해 전투가 결코 만만치 않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성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흔적과 저기 반쯤 무너진 산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과연 어떤 형태의 공격을 받으면 저렇게 될까. 자신이 전력을 다하면 저러한 파괴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질문에 검후의 고개는 절반만 끄덕여졌다.

둘 중 하나라면 어느 정도 같은 흔적을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연달아 동일한 수준의 공격력을 뿜어내는 것은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길 자신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선 대답을 미룰 수밖에 없다. 꼭 힘이 강하다고 해서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검후는 많은 경험을 통해 수없이 보고 익혔다. 전투란 결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검후의 생각에 이드가 힘을 보탰다.

“그럼요. 충분합니다. 제가 보증하죠.”

“……명예 후작이 보증한다면 그런 것이겠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속에 담긴 진심을 전달받은 검후가 가벼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만큼 이드의 말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제법 애를 먹을지 몰라도, 검후라면 부관주를 상대로 승리를 빼앗았을 것이다.

충분히 그만한 역량이 있다.

그렇게 이드가 세 명의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검후의 좌측에 서 있던 라울의 눈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실제 바쁘게 움직인 것은 그의 눈이 아닌

그의 초인기 골든아이였다.

도착과 동시에 초인기를 발동한 라울은 주변의 흔적을 통해 순식간에 대략적인 전투 과정과 그 결과를 읽어 냈다.

뭐, 부관주가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결과야 뻔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많았다. 과연 자신이 없는 사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

또 명예 후작은 분신이 아닌 ‘진짜’ 부관주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왜냐면 자신은 ‘분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인기 골든아이를 통해 부관주가 분신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 자리에 그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일까.

라울은 자신의 의문을 풀어 줄 플레타를 보며 열심히 눈빛을 번뜩였다.

찡긋. 찡긋찡긋. 찡긋.

눈으로 말해요.

복잡하게 깜빡거리는 눈꺼풀은 그야말로 모스 부호다. 눈꺼풀에 경련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저 깜빡임만으로 심도 깊은 대화가 가능할 것 같다. 다만 문제라면, 이러한 라울과 달리 그의 눈빛을 받은 플레타에게는 이러한 스킬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너・・・・・・ 눈에 뭐 들어갔냐? 물이라도 좀 줄까?”

정정하자. 모자란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 같다.

원하던 것과 전혀 다른 플레타의 반응에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난 라울은 눈을 꾸욱 눌렀다.

동시에 격렬하게 후회했다.

“관둬라. 내가 너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 젠장, 저놈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한숨과 함께 터진 한탄에 등 뒤에 있던 오탄이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엔 상관에 대한 부끄러움이 가득하다. 아무리 눈빛이 통하지 않아도 그렇지. 기본적인 눈치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서로 떨어져 있다가 합류했다면 가장 먼저 정보 공유가 기본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걸 못 알아먹고 눈에 뭐라도 들어갔냐니.

“아니네. 오히려 자네들이 고생이 많아. 저런 걸 상관이라고. 말만 해! 원하면 내가 소속을 바꿔 줄 테니까!”

“야! 내 새끼들을 어딜 빼 가려고!”

“쩝…… 혹하는 이야기지만, 괜찮습니다. 저희가 아니면 우리 대장 모셔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독거노인처럼 지내야 할 겁니다.” 

“아니,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여기서 부관주 상대로 싸우는 동안 어디서 놀다 온 놈들이 왜 이렇게 헛소리야!”

씩씩 콧바람을 뿜는 플레타에 라울이 손가락을 까딱거려 그를 불렀다.

그래도 친구이기 때문일까.

제법 건방진 호출에도 플레타가 쫄래쫄래 다가오자 라울이 와락 하고 플레타의 목을 휘어 감… 으려다 실패했다.

“뭐 하냐?”

“빌어먹을 놈이, 힘만 좋아서는. 어차피 부관주를 잡은 건 명예 후작일 거잖아.”

“처음 검을 든 건 나거든?”

“시작보다 마무리가 중요한 거지. 오히려 시작을 해 놓고 마무리를 못 했으니 더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냐?”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특히 전투에 있어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누가 먼저 전투를 시작했고, 전투의 명분이 어느 쪽에 있든. 전투에서 이기는 쪽이 모든 것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괜히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케 생각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

“그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아니. 플레타 정도가 되면 모를 수가 없으니, 일부러 무시하는 거다. 이런 반응에 라울은 관두자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플레타의 목을 다시 한번 잡아끌었다.

플레타도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는 대로 자세하게,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봐. 일단은 부관주에 대해서 심문 중이었던 거 같은데, 뭐 중요한 거라도 나왔어?”

“어, 일단 탑주가 영혼의 관에 있다는 건 확인했다. 어딨는지도 대충 알았고. 그러니까………….”

툴툴거리던 모습은 어디로 던져 버린 플레타가 부관주에 대한 심문 과정을 시작으로, 전투의 대략적인 과정과 그 앞서 있었던 대화까지 사건을 역순으로 빠르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자신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진 오탄은 새삼 주변을 살폈고, 라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 후작의 전력이야 어느 정도 예상한 거지만, 부관주가 보인 전력이 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는 건 문제인데.”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내가 상대하려면 할 수 있었어. 어디까지나 명예 후작의 전력을 알아내려고 일부러・・ “

“그래그래. 대충 그런 걸로 치고!”

애써 반박하려는 플레타의 얼굴을 밀어낸 라울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미 골든아이를 통해 머릿속에 사진처럼 박힌 지형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관주.

당장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외골격 형태의 풀플레이트로 전신을 가린 그녀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

그런데 플레타의 말대로라면 저 풀플레이트 형태의 외골격도 진짜가 아니라는 말이지 않은가.

진짜는 더 큰 거인과 같은 형태라니.

무엇보다 이중, 삼중으로 연계되는 초인기라니! 그건 단순히 두 가지 이상의 초인기를 가진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지금까지 누구도 연계되는 초인기를 가진 초인은 없었다.

물론 다중 초인기를 동시에 이용하는 경우는 많다. 가령 신체 강화의 초인기에 속도를 빠르게 하는 초인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초인기를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했을 뿐, 각각의 초인기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는 아니다.

그에 반해 플레타에게 전해 들은 부관주의 초인기는 다르다. 지금 부관주를 감싸고 있는 외골격이 거인의 형태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는 저 외골격이다. 플레타의 말에 따르면 거인의 목이 잘리기 전, 부관주가 거인의 배에서 튀어나왔다고 했다.

그때 이미 풀플레이트 형태의 외골격을 걸치고 있었으며, 그 움직임은 어지간한 기사 이상이었다고 했다. 절대 마법사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가정들에 라울은 바짝 마르는 입술에 억지로 침을 발라 적셨다. 초초한 내심을 숨기려는 행동이었다.

‘인위적으로 초인기를 각성하는 방법도 중요하고, 다중 초인기를 각성시키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핵심은 이거다. 이것이야말로 바벨이 무조건 확보해야 하는 기술이야.’

바벨이 이 기술만 완전히 수습할 수 있다면, 바벨의 전력은 단숨에 몇 배로 커지게 될 것이다.

좀 더 간단히 설명할까?

다중 초인기가 더하기라면 단계별로 연환되는 초인기는 곱하기와 같다.

즉 저 기술만 손에 들어온다면 바벨이 강대해질 뿐 아니라, 초인들이 대륙의 주도권을 쥘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설마 미완의 마탑이 이 정도로 초인 마법을 개발한 상태였을 줄은……?’

동시에 괘씸했다. 설마 이런 중요한 결과물을 숨기고 있었다니.

과연 미완의 마탑은 언제 이 결과를 공개할 생각이었을까.

공개할 생각이 있기는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래도 영혼의 관을 습격한 결정은 옳았다. 다만 이제 와서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도 컸다.

라울의 눈이 이드와 은색 기사단을 담았다.

‘이런 보물을 숨기고 있는 줄 알았다면 결코 동행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해서든 바벨의 힘만으로 영혼의 관을 처분하고 그들이 가진 결과물을 수습했으리라.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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