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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14화


1349화

“스으으…….”

고요히 잦아드는 숨소리.

그와 동시에 빛을 잃고 흐려지는 눈동자를 눈꺼풀이 내려와 덮어 버린다.

생기 없이 창백한 가운데 일그러진 얼굴.

잠든 듯 보이지만 잠든 것이 아니다.

탑주의 뇌 기능이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을 제외하고 모두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으로 돌려지는 순간에 나타난 반응들. 그 모습은 마치 죽음과도 같았다.

이런 탑주의 상태를 확인한 존 워스가 가장 굵은 가시나무 줄기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우드득!

직후 가시나무가 뱀처럼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초록의 가시나무는 악몽의 한 장면처럼 기괴했다.

하나 존 워스는 이런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사막의 거미처럼 잘 참았다. 지금부터는 참을 필요 없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빨아들여라.”

진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존 워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시나무 줄기들이 탑주의 몸에 달라붙어 사정없이 가시를 박아 넣었다.

심장과 폐, 간을 시작으로, 모든 내장 기관은 물론이고 눈과 귀까지 가시가 박혀 들었다.

머리를 빙 돌아 두개골을 뚫고 뇌에 직접 가시를 박아 넣은 모습은 흡사 가시관을 연상케 했다.

이런 가시나무의 움직임은 마치 육식 동물 같았다. 존 워스의 말처럼 굶주림을 참고 있다가 이제야 욕구를 발산하는 탐욕스러운 육식 동물 말이다. 그렇게 탑주의 전신은 가시나무로 뒤덮였다.

마도 제국의 왕관이 아니라 죽음의 가시관을 쓴 탑주라니.

새로운 마도의 문을 연 대마법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마지막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런 모습을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충격과 원통함에 써클이 꼬여 쓰러지는 마법사들이 꽤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슬픔을 함께할 마법사는 없다.

이곳에는 탑주에 대한 측은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담기지 않는 무감정한 눈을 한 존 워스 혼자. 그렇게 존 워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탑주의 몸에 박힌 가시나무 속으로 빛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기존의 것에 비해 세배나 빨랐다.

그 때문일까.

탑주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는 가뭄이 온 논바닥처럼 말라 갈라지고, 근육은 쪼그라들고, 지방은 사라져 뼈가 선명하다.

신체의 붕괴였다.

그야말로 인정사정 보지 않고 한계까지 쥐어짠다는 문장을 잘 보여 주는 순간이었다.

“쯧, 아쉽군.”

존 워스는 이런 상태를 보고서도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찼다.

탑주를 향한 눈은 숫제 불량품을 보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가져다 버리고 싶다는 얼굴이지만, 당연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탑주는 반품도 교환도 불가능한 존재였다. 상태가 아무리 좋지 못해도 고쳐 써야 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존 워스는 계속해서 기분 나쁘게 혀를 찼다.

사실 그의 이런 불만은 탑주 입장에선 억울할 일이었다.

탑주로서는 부관주와 영혼의 관을 살리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가.

비유가 아니라 정말 목숨을 걸었고, 실시간으로 생명이 빨려 나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태워 계약을 이행 중인데, 불만이라고?

“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그렇게나 맘에 들지 않으면 당신이 나 대신 직접 해 보든가!”

아마도 탑주에게 대화할 능력이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 소리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차라리 다행한 일이었다. 이어진 존 워스의 말을 들었다면 뒷골을 잡고 넘어가는 사태가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완성까지 40분. 나약한 탑주 때문에 여기서 속도를 더 올릴 수도 없고, 14%의 성능 저하가 생각보다 타격이 큰데.”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그 성능 저하가 누구 때문이었던가.

아무튼, 해결 방법이 없는 문제에 존 워스의 미간에는 주름이 깊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 따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끼아아악!!”

때마침 다시 터져 나오는 부관주의 비명이 그것을 확인시켜 준다.

“쯧.”

또다시 혀를 찬 존 워스의 시선이 정면을 향한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당연히 영상 중앙에 있는 이드다. 잠시 이드에 멈췄던 눈길이 이내 부관주와 라울을 향했다.

고통에 일그러진 부관주의 얼굴과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라울.

비명을 지르는 부관주는 그런 중에도 굳은 결심이 엿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라울이 탑주에 관련한 중요한 사항을 물었음이 분명하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 복잡하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던 그녀가, 답을 포기할 정도의 어떤 질문.

그렇다면 라울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저러한 대치는 오래갈 수 없다. 길어야 10분이다.

물론 부관주의 생명이 10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영혼의 관이 보유한 보물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라울이 아무렴 부관주를 죽게 만들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를 온전히 살려 바벨로 데려가는 게 이번 작전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부관주가 위험에 빠지면 가장 먼저 달려들 사람이 아마 라울일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10분’이란 같은 장면을 보고 있을 아래층 마법사들의 인내심을 말하는 것이다.

10분.

그 후 마법사들은 모두 부관주를 살리기 위해 뛰쳐나오리라.

물론 그에 대한 결과는 뻔했다.

전멸.

“실로 의미 없는 행위지. 쓸모없는 버러지들.”

남아 있는 마법사들이 모두 나서도 결국 벌 수 있는 시간은 5분, 길어야 10분이다.

그렇게 해도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까지는 아직 20분이나 남는다.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존 워스의 기준에서는 버러지라는 평가를 온전히 부정하기 힘든 결과라고 할까.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예측일 뿐이다.

탑주와 정식으로 계약을 주고받은 존 워스로서는 고작 20분을 얻자고 묵인할 수 없는 결과라고나 할까.

물론 만약 그렇게 해서 바이트 타블렛이 완성되는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마법적인 저주가 덮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후라면 이곳에 남을 이유도, 이드와의 전투를 대비해 최상의 전력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깟 저주의 해주 정도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저들을 버려 40분을 얻을 수 없는 지금은 최상의 전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렴 저주를 등에 지고 저 메르시오를 소멸시킨 이드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결국 오늘 우리의 마주침은 피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런데 이상하지. 결코 싫지 않은 기분이야.”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싸움을 앞두고 있음에도 존 워스의 얼굴은 밝았다. 버러지로 취급받은 마법사들에 대한 짜증이 깃들었던 눈빛도 어느새 투명해졌다.

오히려 선명한 기대감이 엿보이는 눈이다.

다만 기분 좋은 고양감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다.

“탑주! 이러다 부관주의 목숨이 위험하겠습니다. 아직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10분도 길었던 모양이다. 가란의 거울에서 장로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질문이라기보다는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

하지만 탑주는 그에 답할 능력이 없는 상태.

잠깐 탑주를 돌아본 존 워스가 가란의 거울을 조작하고는 말했다.

“거기서 기다려라. 내가 간다.”

“탑주의 목소리가 아닌・・・・・・ 그대는 누구요? 어째서 탑주가 아니라 당신이 답하는 거요.”

“버러지는 닥치고 기다려라. 그러면 곧 부관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무…….”

이어지는 반문은 들리지 않았다.

티칵!

존 워스가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가란의 거울 중앙에 미세한 선이 생겨나며 가란의 거울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존 워스가 손을 쓴 결과였고, 또 파괴된 것은 가란의 거울만이 아니었다.

카가가가각!

존 워스의 등 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수십 개의 검로가 달리더니, 바이트 타블렛과 탑주를 제외하고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부숴 버렸다. 분명 이드가 가란을 거울을 넘어 플로어 마스터를 포획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존 워스의 꼼꼼함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그가 방을 나서는 순간, 입구가 있는 벽을 중심으로 방과 복도의 일부가 무너지며 출입구를 막았다.

부관주를 언급하며 발을 묶어 놓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통신에 답한 목소리에 의문을 품고 달려올 마법사의 출입을 막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철저히 출입구가 막혀 버린 탑주의 연구실이 마치 묘지처럼 음산해 보이는 것은.


“이게 무슨…….”

“누굽니까. 방금 그 목소리는!”

가란의 거울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에 장로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자신들도 그러하지만, 아래 마법사들이 더는 고통받는 부관주의 모습을 견디지 못할 듯해 탑주에게 연락한 것이었는데.

답한 것은 탑주가 아니었다.

“왜 탑주가 아니라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가 탑주의 방에서 들려오는 겁니까.”

“난들 압니까. 나도 여러분들과 같아요!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립니다.”

“어쩌면 말입니다. 침입자들이 탑주의 연구실에……..?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시오. 탑주가 계신 최상층에 대한 마법 방비가 얼마나 철저하게 되어 있는지 아시는 분이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침입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으면 저놈들이 바로 그리로 갔지, 왜 저러고 있겠습니까.”

“아니, 혹시나 해서 해 본 말에 왜 그렇게 성을 내십니까?”

“하도 어이없는 말을 하시니 그런 거 아닙니까.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혼란만 일으키고 있잖습니까.”

“뭐요?”

의혹은 논란을 낳았다. 슬슬 목소리가 높아지자 가장 나이가 많은 장로가 나섰다.

“그만들 하시오! 지금 그런 것을 두고 다툴 때입니까. 제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에잇…….”

“큼. 큼.”

장로의 중재에 목소리를 높이던 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내 앞뒤 상황을 살피는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로 탑주를 대신해 답한 목소리는 무엇일까요? 그럴 리는 없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탑주께 사고라도 난 것이라면.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정말 초대받지 않은 자라면 아예 무시했을 겁니다. 굳이 답을 해서 의심을 살 필요가 없어요.”

이성적으로 따지면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말이 나오기 전에, 장로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무엇보다 그 목소리는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나선다고 부관주를 이리 보내겠다고. 그러니 지금은 기다려 봅시다. 탑주님을 믿고, 부관주를 믿고. 그리고…… 목소리를 믿고요.”

“으음….”

이러한 말에 장로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든 상황.

누구도 차마 자신이 탑주를 뵙고 오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부관주를 언급해 마법사들의 발을 묶어 놓는 존 워스의 안배는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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