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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17화


1352화

너무 방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점투성이.

그런 자세를 하고서 마치 장난처럼 일라이져로 어깨를 두드린다.

툭툭.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검신이 절묘하게 오탄 등으로 향하는 존 워스의 눈길을 끊어 낸다. 그제야 뻣뻣하게 굳었던 오탄이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존 워스.

“거슬리는군.”

“내가 할 소리. 대화 중에는 상대를 봐야지. 가장 오랫동안 불린 이름이 존 워스라면서, 사람 간의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건 아닐 테지?”

…… 75년이다.”

인간의 기준에선 그야말로 한평생이다.

“그래 봤자 혼돈의 파편이 존재한 시간에 비하면 찰나일 뿐이지.”

이드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혼돈의 파편은 세계의 시작과 함께였다.

생명이 살아가는 세계와 그것을 관리하는 신.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깨어나 세상을 변혁하는 혼돈의 파편.

다만 앞의 둘과 달리 혼돈의 파편이 가지는 성격과 목적성은 정반대였다.

그 자체로 강력한 시련. 시련을 이겨 내면 발전하고 진화할 것이고, 견디지 못한다면 멸망할 것이다.

스케일이 크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적자생존이라는 자연 생태의 당연한 흐름일 뿐이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절대 그렇게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문제지만.

좌우간 이렇게 준비된 혼돈의 파편인 만큼, 이들이 존재한 시간은 실로 까마득하다. 인간에 있어 한평생일 수 있는 75년도 그야말로 눈깜짝일 시간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말대로다. 그 긴 시간, 우리는 태어나기 위해 존재했을 뿐이다. 너, 차원의 주인아. 생각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시간을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

이드는 대답하지 않고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자궁에 든 태아도 발을 차고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쩌면 태아가 아니라 그 전전전 단계인 수정이나, 세포 분열의 시작 단계 정도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생명이라고 불리기도 애매한 단계 말이다.

또한 그렇게 존재하기 전에 따로 어디 모여 창조주로부터 단체 교육이라도 받은 게 아니라면.

“그렇다. 아득히 오래 존재한 우리가 태어나 활동을 시작한 시간은 고작 백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중 절반이 넘는 시간을 존 워스로 살았다. 어느 쪽이 진짜 내 이름일 것 같은가.”

“당신은 메르시오와 많이 다른 것 같아.”

“나는 나다. 같을 수가 없지. 그런데 어디가 다르단 거지?”

존 워스는 부정하는 한편 관심을 보였다.

이드는 그 모습이 같은 핏줄을 타고 태어난 평범한 형제들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서로 부정하면서도 꼭 닮아 있는 형제 말이다.

“내가 본 그는 단순했지. 순수할 정도로.

“크하하하! 정확히 봤군. 옳은 말이야. 메르시오가 우리 중 가장 본능에 충실한 친구긴 하지.”

같은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일까. 존 워스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과연 메르시오는 혼돈의 파편 안에서도 가장 와일드한 성격을 가진 모양이긴 하다. 하긴, 일단 외모부터 웨어울프지 않나.

성격 또한 짐승처럼 호전적이고, 무엇보다 이드와의 전투도 즐겼던 것이 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드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력을 다한 메르시오는 거대한 신랑의 형태를 취했었다.

모든 힘을 다한 시점에서 나온 그 모습이야말로 메르시오의 본성이 아닐까.

이드는 개인적으로 메르시오의 바로 그런 본성 덕분에 그를 쉽게 죽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봐라. 만약 메르시오가 전력을 다해 도주했다면?

이드는 내심 진저리를 쳤다. 그야말로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추적 과정이었으리라.

그러나 고맙게도 메르시오는 이미 죽고 없다.

과연 눈앞의 존 워스는 어떨까.

일단 이 시점에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 확실한 목적이 있다는 의미. 전투에 밀린다고 도망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데. 이드는 그런 생각과 함께 대화를 이어 갔다.

그나저나 뒤에 있는 오탄 일행은 왜 아직 움직이지 않는 걸까. 이렇게 자상하게 그들을 향한 기세도 가닥가닥 끊어 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 그에 비해 당신은 메르시오와는 반대야. 복잡해. 그리고 감상적이야. 진짜 인간처럼.”

“그게 이상할 일인가?”

이상한 건 아니다. 인간만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중간계 최강인 드래곤부터 엘프와 같은 아인종, 그리고 숲속의 멧돼지까지. 다 감정이 있으니까.

“당신은 혼돈의 파편이잖아. 세계의 멸망이 감상적이라니, 충분히 이상하지.”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가. 흐음, 좋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원의 인의 주인이니. 우리에 대해 하나 알려 주지.”

“……”

이드는 입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새로운 정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특히나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혼돈의 파편에 관한 정보라면 더욱더!

“그대의 말대로 우리는 세계의 멸망이다.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렇기에 우리 안에는 인간의 요소가 들어있다.”

“그 말은, 인간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인간인 부분도 있다는 건가?”

“그렇지. 인간뿐만이 아니다. 엘프, 오크, 개, 물고기, 식물, 드래곤, 세상의 모든 요소가 우리 안에 내포되어 있지.”

“……미친.”

신음과 같은 감상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과연 세상에 그런 생물이 있을 수 있는가?

태고부터 준비된 거야 신과 같은 존재라고 치고 넘기더라도, 세상의 모든 요소를 가진 생명이라니.

그런 게 존재할 수 있나?

가장 먼저 그런 의문이 든다. 혹시 혼란을 주기 위해 흘린 가짜 정보가 아닐까.

‘아니…… 이건 진짜다.’

깊은 눈으로 존 워스를 바라본 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굳이 가짜로 흘릴 정도의 정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극신기가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좀 더 마음을 열고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의도야 어떻든 혼돈의 파편을 만든 것은 창조주다. 이 세계를 만든 창조주에게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의 기적.

뭐, 반가운 기적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한마디 따지고 싶다. 무슨 멸망이 걸린 시련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했냐고 말이다. 대충대충 준비해도 잘 넘길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걸로 준비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은가.

당장은 그레센의 일이지만, 그의 고향인 지구에도 언제가 일어나게 될 일이기에 내심 걱정인 이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

그가 다녀온 현재 지구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도 최소 수백 년 동안은 혼돈의 파편이 깨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잡생각에 빠졌던 이드는 눈앞의 존 워스에 다시 집중했다.

“그렇다면 불쌍하군. 인간의 요소를 가졌다면 측은지심도 그 속에 있을 터. 그런 상태에서 세계를 멸망시키는 건 힘들지 않나?”

“쯧, 내 설명이 부족했나? 이해를 못 하는군. 내 안에 인간의 요소가 있다고 해서 내가 인간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임무는 창조주께서 내려 주신 것, 그것을 행함에 있어 불만이 있을 리가 있나. 너희 인간들은 살기 위해 나무를 베고, 고기를 먹는다. 그 과정에 측은지심이 들어 힘들던가?”

“아니지.”

“그런 거다.”

“그렇군.”

혼돈의 파편이 이 그레센의 멸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너무 조용하고 은밀해서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나였다고 할까.

“그럼 나는 너희 혼돈의 파편을 막아야겠군.”

“그게 차원의 인의 주인이 해야 할 임무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것참 고마운 말이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누가 되었건 미움을 받는다는 건 유쾌한 기분은 아니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지.

이드의 시선이 삐딱하게 존 워스를 향했다.

“미워하지 않는다면서 날 향한 그 투기 속에 섞인 살기는 뭐지?”

투기는 이해한다.

어차피 서로를 확인한 시점에서 전투는 피할 수 없으니까.

우선 이드부터 그냥 놓쳐 줄 생각이 없었다.

혹시라도 존 워스가 도주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 결단을 낼 각오도 있으니까.

그런데 살기는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검후가 존 워스에게 살기를 품는 거야 당연한 일. 하지만 존 워스가 자신에게?

원망받을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 이드다.

“아,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혼돈의 파편과 차원의 인 창조주가 설정해 주신 우리 관계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메르시오에 대해서는 다르지. 우리 형제를 소멸시킨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감정이 있거든.”

“그렇게 친해 보이지는 않아도 일단은 가족이란 건가?”

“그 비슷하지.”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가족이라는 것이 그렇다. 아무리 싫고 원수 같아도 일단 내 핏줄인 만큼 남에게 피해를 당하면 화가 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자신은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끊어 버리지 않았던가. 부활도 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럼 뭘 망설이지? 검을 들었으면 베어야 할 것 아닌가?”

“망설이는 게 아니다. 당장의 전투보다는 그대와 대화를 해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묘하게 좋지 않은 예감.

혹시 하는 생각에 차원의 인으로 또 다른 혼돈의 파편의 존재를 살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 기다린다니. 뭘?”

“저거.”

이드의 어깨 넘어를 향해 턱짓하는 존 워스.

그와 함께 뒤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지지직!

“이런 젠장! 잡아!”

“부대장!”

오탄의 욕설과 함께 댐이 무너진 듯 쏟아지는 마력. 방금의 그건 부관주를 결박하고 있던 구속구가 파괴되는 소리였다.

허를 찔린 이드는 혀를 찼다.

존 워스의 기운은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한 것일까. ‘부탁을 받았다’고 말한 만큼, 어쩌면 그의 능력이 아니라 영혼의 관에서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도 모를 일.

존 워스는 그저 부관주로 향하는 시선을 막았을 뿐일지도.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결과적으로 부관주의 구속구가 풀렸다. 물론 당장 부관주를 놓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오탄 등은 정신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드가 당장 그를 도와줄 수는 없다.

“그럼, 메르시오의 원수를 갚아 볼까.”

존 워스의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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