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938화


1373화

그렇게 한 처녀가 산 위에서 놀림을 당하는 사이.

잠시 손을 멈춘 이드는 존 워스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전투는 먼저 손을 멈춘 존 워스에 의해 잠시 중단된 상태.

그런 이드의 등 뒤로는 바이트 타블렛이 얌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비올라가 2박 3일의 데이트에 미련 없이 포기해 버린 바로 그 바이트 타블렛 말이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런 시시한 사정 따위 알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런 가운데, 존 워스가 한껏 힘든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드가 아닌 그 너머의 바이트 타블렛이다.

“곤란하네. 이런 건 예상 밖인데.”

“그럼 세상일이 모두 생각한 대로 될 줄 알았나 보지?”

“되던데? 일단 그대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세상일을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지.”

“흥, 오만이 지독하네. 그렇게 잘났으면 왜 내가 돌아오기 전에 계약을 완성하지 못했지? 무능인가?”

“크크크큭. 그럴지도.”

존 워스가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키득거렸다.

이드는 그런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존 워스의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세상이란 것이 힘 있는 자들이 가리키는 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문명이 발전한 지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주의라고, 여론의 눈치를 보는 가식을 떨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소수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지구가 이랬는데 전제 군주제인 그레센은 어떨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혼돈의 파편에겐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계약이란 이름으로 뚜껑을 덮어 두지만 않았어도 이 그레센은 벌써 라일론을 통해 통일된 후 혼돈의 파편에 의해 멸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솔직히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이드로서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뚜껑 덕분에 이드를 반겨 주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혼돈의 파편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다. 애초에 놈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생할 이유도 없다.

덕분에 그런 마음이 목소리에 담겼다.

“웃는 얼굴이 보기 좋네.”

“비꼬는 건가?”

“원하면 욕도 해 줄 수 있어. 해 줄까?”

“사양하지.”

고개를 저은 존 워스의 시선이 이드의 머리 위를 향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대대적인 한숨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곤란해. 정말 곤란해.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라고.”

“계획에 없다니. 그럴 리가, 바이트 타블렛의 저 변화는 당신 계획에 따른 것이잖아.”

라미아로부터 들어온 추가 정보가 있다.

그에 따르면 바이트 타블렛의 지금과 같은 변화는 정상적인 작동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결코 라미아의 개입에 의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에 존 워스의 시선이 다시 이드를 향해 내려온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새로운 법칙을 세우는 과정에 누군가 개입하는 것은 분명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뭐, 대업에는 항상 방해꾼이 있는 법이니까.”

장대한 마법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 동시에 초인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다. 이런 규모라면 대업이라는 말도 부족한 감이 있다.

문제라면 이런 대업의 목적이 선업이라기보다는 악업에 가깝다는 점이다. 어쨌든 저들 혼돈의 파편이 가진 최종 목적은 삶과 죽음에 대한 강요니까.

이드가 어깨를 으쓱이자 존 워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은 매우 심란해 보였다.

“시련은 어디나 필멸자들의 몫일 뿐.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우와. 재수 없네.”

“하지만 그게 사실이지. 그런데 어째서 그대와 관련된 일은 이렇게 복잡하게 꼬이는 것일까.”

이드는 한탄을 쏟아 내는 존 워스의 말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온전히 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과 혼돈의 파편 간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악연으로 엮인 운명.

“이것도 그대가 차원의 인의 주인이기 때문이겠지?”

“그걸 탓하고 싶으면 창조주에게 가서 따져. 나도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우린 서로 적이야. 서로의 일을 방해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지금에 와서 그걸 토로하는 것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면 그만한 방비를 하지 않은 존 워스의 탓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이드의 말에 존 워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금 한숨처럼 말을 토해 냈다.

“・・・・・・ 없다고 여겼다.”

“무엇이?”

“섭리에 닿은 바이트 타블렛에 접속할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분명 현재 이 그레센에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드래곤조차 다 쫓아냈는데. 이런 결과라니.”

이럴 리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존 워스.

그런 모습을 보니 정말이지 라미아의 존재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라미아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의 말 중 틀린 점을 정정하자면 드래곤 한 마리가 돌아와 있다는 것이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친절하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드가 존 워스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고 있는 가운데, 존 워스가 깊은 눈빛을 하고서 물었다.

“저기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스트레이트와 같은 질문.

이드는 곧바로 답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 비밀이 지켜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애써 심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때론 진실이 가장 상대를 아프게 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내 아내다. 아내의 마법에 대한 당신 칭찬은 내가 확실하게 전해 주지. 아마 좋아할 거야.”

사실 이미 기뻐 날뛰는 중이다. 머릿속에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그럼에도 굉장하군. 그녀가 그렇게 대단한 실력일 줄은 몰랐는데.

존 워스는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라미아라면 그도 여러 번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라미아의 실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건 절대 그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라미아라는 존재가 가지는 특이성 때문이었다.

라미아는 그 탄생부터가 특별하다. 그 영혼은 샛별처럼 아름답지만, 섭리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며, 드래곤 로드로부터 물려받은 마법 능력도 굉장하지만, 막상 마법에 사용되는 마력은 이드의 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 밖의 이런저런 특이성으로 인해 아무리 혼돈의 파편이라 할지라도 라미아의 실력을 완벽히 꿰뚫어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당연히 이드는 굳이 이런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어디 없다 뿐인가.

“아까도 말했지만, 세상이 당신들 뜻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라니까. 이제 와서 알아 봤자 어쩔 건데?”

“……그렇군. 이미 일은 벌어졌지.”

“서로 할 일을 하자고. 나는 내 아내를 지킬 거야.”

“그럼 나는 뒤틀린 법칙을 바로 세우면 되는 건가.”

“해 봐. 그게 가능할지 나도 궁금하네.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자고. 뒤틀린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운 법칙을 뒤트는 게

목적이잖아!”

“글쎄, 무엇이 올바른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제법 현학적인 질문에 이드는 콧방귀를 끼었다.

누군가는 백 명이 있으면 백 개의 정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정의는 오직 하나다.

바로 살아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혼돈의 파편은 이 땅의 모든 정의가 싸워야 할 거대한 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어떤 세계에서는 그걸 마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서로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 다시 시작해 보지?”

“이걸 알고서도 기다린 건가?”

존 워스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와 함께 고요하던 검에서 검염(劍)이 일어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은 거세고 거대했다. 존 워스의 머리 위로 솟아오르는 불길은 산 하나를 순식간에 태워 버릴 기세였다.

저 검염은 검강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보아야 했다. 그렇기에 진짜 산을 태우진 못한다.

대신, 산을 날려 버리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거력.

하지만 이드는 그 앞에서 오히려 더욱 당당했다.

“물론,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거든.”

자신만만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동시에 일라이져의 주변으로 별빛과 같은 반짝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별빛을 닮은 은빛은 은은하지 않은 대신 사람의 혼을 빨아들일 정도로 강렬하고 화려했다.

거대한 검염과 작은 은색 반짝임.

언뜻 봐서는 그 기세에서부터 결판이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그 자리에 선 존 워스의 눈빛은 굉장히 무거웠다.

그는 단숨에 알아본 것이다. 저 작고 예쁜 별빛에 깃들어 있는 힘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를 말이다.

동시에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무공에 대해서는 완벽히 파악했다고 여겼는데, 놀랍군. 마법도 그 정도까지 마나를 정련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걸 무공으로 완성하다니

말이야.”

“무슨 의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무공에 애정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고마운 일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게 당신의 실수야. 지금부터 그걸 확인시켜 주지.”

“장담하지 않는 게 좋아. 쉽지 않을 테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고. 그만 끝을 보자고. 당신과 검을 마주하는 것도 슬슬 지겨워. 곧 동이 틀 거야.”

“흠. 과연 뜨는 해를 볼 사람이 누구일까.”

“당연히! 나지!”

이드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한 번의 휘두름에 길고 긴 은하수가 생겨났다. 그에 존 워스는 높은 불길로 은하수를 불태웠다.

은하수의 일부분이 불길에 타올랐지만, 별빛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어 내며 서로를 응원하듯 빛을 옮겨 갔다. 그리고 그렇게 옮겨 갈 때마다 별빛은 점점 강해졌다.

그렇게 강해진 별빛은 결국엔 검염의 불길보다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투의 흐름이 이드 쪽으로 기울었다는 증거였다.

그것은 단순히 힘의 우위가 아닌 무리에 대한 우위였으며, 검술에 대한 깊이에서의 우위였다.

“크크큭! 역시 인간이란!”

그렇게 밀리고 있음에도 존 워스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를 몰아붙이고 있는 이드의 검법은 어느새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검법은 이제 난화십이식과 수라삼검, 그리고 무형검강결을 오가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검법이 하나로 통합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실전을 통한 발전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모습.

다만 그에 대해 존 워스도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이제 자신의 마지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여긴 것일까.

파파파팍!

그의 등 뒤 공간을 가르며 검이 튀어나왔다.

“이제야 정체를 밟히는 거냐! 페르세르!”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