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43화
1378화
기맥에서 검신으로 뻗어 나가는 거침없는 내력의 흐름. 그 크고 아름다운 흐름에 휩쓸린 일라이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우우우웅!
검명은 금방 한계까지 올라가 귀를 찔렀고, 그것이 멈추는 순간.
퐁!
칼끝에서 작고 귀여운 새 한 마리가 태어났다.
“휘이익!”
탄생을 축복하는 이드의 휘파람에 참새처럼 귀여운 녀석이 곧장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꼬리에 검은 궤적을 단 새는 이드가 갈라놓은 틈을 통해 단숨에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구두룡이 급히 몸을 움직여 새를 막으려 했지만, 그러기엔 덩치가 너무 컸다.
대신 성긴 바람의 장막이 앞길을 가로막지만.
팡!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을 증명하듯 새의 힘찬 날갯짓에 바람의 장막이 맥없이 터져 나간다.
길이 트이자 새는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작은 새가 대붕으로 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는 순간이었다.
푸드득!
구두룡의 포위를 벗어난 새는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높이 날수록 몸도 점점 커졌다. 날갯짓 한 번에 두 배씩 커진 몸은 순식간에 녹색 하늘을 완전히 가려 버릴 정도로 거대해졌다.
구두룡쯤은 씹지도 않고 한입에 삼켜 버릴 것 같은 모습. 압도적인 체격 차에 본능적인 위기감을 감지한 아홉 개의 용머리가 일제히 대붕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쿠오오오오!!
나도 만만치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이런 반응은 명백한 실수였다.
“잠깐 지나갈게요.”
대붕은 분명 위협적이다.
그러나 대붕은 어디까지나 이드가 칼끝으로 부리는 심상의 구현일 뿐, 그 근원에 있는 것은 오로지 이드였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대붕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든 말든 이드만 잘 잡고 있으면 되는 일인데, 대붕이 두른 힘에 놀라 그 사실을 깜빡해 버린 것.
그 결과 이드는 느긋하게 바람길을 탈 수 있었다.
대붕이 만들어 놓은 선명한 검은 궤적을 따라 만류일품에 이은 뇌령전궁보를 시전한 이드는 너무도 쉽게 구두룡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잠시 한눈을 판 대가로 이드를 놓친 구두룡은 곧바로 똬리 튼 몸을 풀고 이드와 대붕을 쫓았다.
그와 함께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의 이드를 향해 입을 벌렸다.
찌이이잉!
작은 동굴 같은 아홉 개의 아가리 안에서 요란한 검명이 울리며 커다란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밖에서 보면 그건 영락없는 드래곤의 브레스였다. 크고 빠른 검기의 브레스는 점이 아닌 넓은 범위를 커버했다. 이드가 피할 것을 대비해서였다.
하지만 애초 이드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파파파팡!
허공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이드의 발그림자가 주변으로 번진다. 마각철황격 일흔아홉 번의 발길질에 경력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본래 경력의 특성상 한번 발출된 경력은 곧바로 폭발하는 성질을 가진다.
그러나 마각철황격의 경력은 곧바로 폭발하지 않고 거꾸로 선 피라미드 형태로 층층이 쌓이더니, 아래에서 치솟아 오르는 검기의 브레스를 내리찍었다.
퍼퍼퍼펑!
강과 강의 충돌은 열을 발생시켰고, 열은 불꽃이 되어 나타났다. 이드의 발아래로 붉은 폭염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충격도 그렇지만, 더욱 큰 문제는 열기였다.
스치기만 해도 살을 태울 것 같은 열기가 이드를 향해 쭉쭉 뻗어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열기가 이드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푸드드득!
하늘이 무너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대붕의 날개가 이드를 가려 버린 것. 거대한 날개에 막힌 열기는 흔적도 없이 산산이 흩어졌다. 동시에 이드의 모습도 날개 너머로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납득하기 어려운 일도 있었다.
참으로 거대한 날개였다.
한데 그런 날개가 움직였음에도 바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저 날개의 반도 되지 않는 와이번의 날갯짓에도 미친 듯한 광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눈앞에서 목표를 놓치고 만 구두룡은 특히 더 그랬다. 놈은 목표를 가로채인 것에 대한 분노를 참지 않았다.
쿠오오오오!!!
분노에 찬 울음소리와 함께, 구두룡은 강력한 브레스를 뿜었다. 앞서 이드를 노렸던 브레스와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달랐다. 속도가 느린 대신 브레스에 담긴 기운은 더없이 강력했다.
앞의 브레스가 검기였다면, 지금의 브레스는 검강이었다.
아홉 줄기의 브레스는 대붕의 전신을 노렸다.
대붕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노릴 곳은 너무도 많았다. 막말로 눈을 감고 쏴도 어딘가에는 맞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구두룡은 신중했다. 브레스는 대붕의 머리와 목, 심장과 날개를 정확히 노렸다.
퍼퍼퍼퍽!
그리고 구두룡의 이러한 공격은 빗나가는 일 없이 정확히 목표를 관통했다.
공격이 성공한 것일까?
“…….”
하나 그렇다기엔 존 워스의 표정이 너무 썩어 있다.
구두룡과 함께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린 존 워스. 그는 손에서 느껴지는 텅 빈 감각에 대붕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퍼서석!
브레스에 관통당한 대붕이 신기루처럼 무너져 내렸다.
푸드드득!
콰콰콰콰콰!
이내 바람을 가르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광풍이 일어났다.
천천히 흩어지던 거대한 대붕이 바람에 씻겨 일순간 사라지고, 그 뒤에 숨어 있던 진짜 패왕멸천붕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늘을 온통 가릴 정도로 거대했던 모습에 비하면 심하게 초라하다. 심지어 구두룡보다 작다.
그럼에도 그렇게 작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대붕에서 느껴지는 힘과 신비함이 몇 배는 더 강해졌기 때문이리라.
뿐인가.
대붕의 몸 어디에도 구두룡의 브레스에 당한 흔적이 없었다. 그와 함께 구두룡을 아래로 깔아보는 눈은 마치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구두룡의 모든 브레스는 허상을 두드리며 완벽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사실 이런 허상은 이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의도치 않게 구두룡을 속인 허상은 하나의 자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나가 극도로 압축되는 과정에서 생긴 응집력에 끌려온 대기의 마나가 공간의 굴절 현상을 발생시키고, 그로 인해 대붕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춘 것이다.
이런 과정은 사막에서 흔히 일어나는 신기루 현상과도 매우 비슷했다. 다만 흔히 볼 수 있는 사막의 신기루와 달리, 마나의 신기루는 관측된 기록 자체가 없다시피 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존 워스가 이런 마나 신기루에 속아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전까지의 그를 생각한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패왕멸천붕의 위엄이 감각을 속일 정도로 강력했다고 하더라도, 허상과 진짜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이것이 뜻하는 사실은 하나였다.
“약해졌군.”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광자검강에 당한 그의 몸은 벌써 죽었다고 해야 옳았다. 붕괴하려는 육체를 그 압도적인 마나로 붙들고 있으니, 존 워스의 몸이 정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엔 그래도 괜찮았지만, 이제 슬슬 파탄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
그 첫째가 바로 감각 기관에서 발생하는 오류다. 감각 기관에 혼란이 생김으로 인해 대붕을 진짜로 인식해 버린 것.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사자인 존 워스에게 있어 이는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과연 이런 상태라면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까. 지금은 그래도 보정이 가능하지만 여기서 더 나빠진다면 오감을 닫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싸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마인드 마스터를 상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여기서 더 무너지기 전에 끝을 봐야 한다.’
이길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아니,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마인드 마스터는 과거보다 더욱 강해졌고, 자신의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어차피 승리를 확신하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현재 존 워스의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최소한 실망스러운 싸움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자신의 마지막은 철벽의 검왕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존 워스는 문득 실없이 웃고 말았다. 과연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두고 혼돈의 파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방금의 그건 분명 혼돈의 파편이 아니라 인간 존 워스이기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이었다. 메르시오의 말처럼 지금의 자신은 너무 깊게 인간에게 물들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신.
그런데 이런 스스로가 딱히 싫지 않은 것은 존 워스로 살아온 시간이 혼돈의 파편으로 존재한 시간보다 더 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마지막이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그런 마음을 참지 않고 웃음으로 터트린 존 워스,
이드는 이런 갑작스러운 모습에 그를 내려다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해 버렸다.
“눈이 완전히 돌아간 것이, 엄청 위험해 보이는데.”
서로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시점에서 더 위험하고 말 것도 없지만, 왜 기세라거나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존 워스는 방금 그러한 부분에서 무언가를 초월해 버린 양 보였다. 당연히 이는 단순한 기분에 그치지 않았다.
쿠오오오오!!
한층 거칠어진 몸짓으로 대붕에게 달려드는 구두룡. 아홉 개의 대가리가 대붕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그렇지 않아도 크던 구두룡의 입이 흉측하게 찢어지더니, 그 속에 있던 대검이 번들거리며 나타났다.
그에 날개를 펼치며 회피를 시도하는 대붕.
하지만 이번엔 구두룡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머리 하나가 대붕의 목을 휘감는 순간, 다른 두 개의 머리가 대붕의 양쪽 날개를 물었다. 아니, 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확히는 입안에 든 대검을 찌른 것이다.
물론 대붕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끄아악!
목을 휘감고 대붕의 머리를 한입에 꿀꺽 삼키려는 구두룡의 머리를 부리로 찍었으며, 날카로운 발톱으로는 몸통을 조여 오는 구두룡의 몸을 찢어발겨 버렸다.
보기에 따라 구 대 일의 싸움이지만, 전혀 대붕의 기세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 증거로 구두룡이 아무리 물어뜯어도 윤기가 흐르는 대붕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바람으로 이뤄진 구두룡의 몸체는 공격을 받을 때마다 흩어졌다 뭉치기를 반복했다.
콰콰콱!
그런데 그렇게 다시 뭉친 구두룡의 몸짓에는 힘이 없었다.
몸체를 구성하는 내력의 결합력이 떨어진 것이 확연히 눈에 보일 정도.
하지만 이드는 존 워스의 마지막이 이렇게 쉬울 것이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물론.”
콰콰콰콱!!
짧은 대답과 함께, 어지럽게 얽혔던 구두룡이 한 번에 흩어진 후 다시 생겨났다.
그런데 흩어질 땐 아홉이던 머리가 다시 나타났을 땐 하나가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입에 있던 아홉 자루의 대검이 이젠 몸체에 길게 솟아 있었다.
이젠 구두룡이라는 이름보다는 검룡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모습이다. 무엇보다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내 마지막은 실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미리 작별 인사를 하도록 하지. 또 보자고.”
진한 미소와 함께 말을 마친 존 워스의 몸이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가루가 된 그의 몸이 마치 자석에 달라붙은 철 가루처럼 검룡의 몸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