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45화
1380화
검룡의 목이 잘렸다.
단단히 두른 검갑(劍鉀)도 일라이져를 막지는 못했다.
서걱!
그 광경을 보던 모든 사람의 머릿속엔 검룡의 목이 잘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너무도 강렬한 장면에 뇌가 환청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검룡은 죽었다.
썩은 동태 같은 눈조차 곧 빛을 잃고 사그라졌다.
“그래도 이게 가짜보단 낫다.”
까만 눈에 비치던 지성도 어차피 가짜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꼴이 보기 좋다는 건 아니다. 그런 복잡다단한 마음을 담아 검룡의 머리를 찼다.
퍽!
그러자 잘린 자리를 따라 주르륵 미끄러진 검룡의 머리가 빙글 회전하며 떨어졌다.
검룡의 머리와 몸이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텅! 터텅!
바위가 떨어진 것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검룡의 머리는 한 번 튕겨 오른 후 다시 바닥을 굴렀다. 드래곤에 비견되는 힘과 위엄을 뽐내던 모습을 찾을 길 없는, 더없이 초라한 최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런 모습이 오래가진 않았다는 것일까.
푸스스스스
흙투성이가 된 검룡의 머리가 구르기를 멈춘 순간,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건 대붕이 잡고 있던 몸체 역시 마찬가지.
몸을 휘감고 있던 검갑과 함께 검룡의 몸체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차원의 인.
우웅.
이드는 작은 진동과 함께 자신의 손목에 나타난 차원의 인을 보며 마치 저승사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지 않는가.
물론 그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 죽은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 저승사자라면, 차원의 인은 죽은 혼돈의 파편을 ‘흡수’하려는 것이니 말이다.
몹시도 탐욕스럽게 보이는 목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드의 생각이 그러거나 말거나, 모습을 드러낸 차원의 인은 곧 무너지는 검룡의 흔적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검은 안개가 작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드는 이 상황이 제법 흐뭇했다.
“이로써 존 워스를 볼 일은 두 번 다시 없겠네.”
역시 죽은 자리는 이렇게 뒤끝 없이 말끔해야 하는 법이다.
차원의 인의 흡수는 금방 끝났다.
흡수를 마친 차원의 인은 이내 다시 모습을 감췄다.
손목을 만져 보지만, 아니나 다를까, 손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드는 괜스레 손목을 한 번 빙글 돌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따라 허공을 딛고 있던 그의 신형이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포옥.
전투의 여파로 수십 번이나 뒤집혀서 그런지, 이드가 밟은 땅은 마치 높이 쌓인 눈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신발 안으로 흙이 들어와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상태를 보아하니 씨를 뿌리면 딱 좋아 보였지만, 과연 어떤 미친 농부가 여기까지 올까.
그런 담력이면 오래전에 모험가나 용병이 되었을 거다.
게다가 설혹 뒤늦게 간이 부어서 그런 선택을 하는 이가 있다고 해도, 역시 이 땅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차피 이곳은 오늘의 해가 지기 전에 왕실의 병력에 의해 통제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야 당연한 일이다.
비난과 전쟁을 각오하고 받아들인 영혼의 관이 하룻밤 사이에 터만 남기고 날아가 버렸으니, 이보다 기가 막힐 일이 없다.
소문이 나는 순간 그야말로 국제적인 망신이다.
거기에 잃어버린 초인 마법은 또 어쩔 것인가.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마스는 어떻게든 범인을 찾으려 할 터였다.
‘다만…… 마스를 다스리는 왕에게 그만한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잘 갈려 폭신폭신 기분 좋은 흙과는 달리, 흉하게 파헤쳐진 대지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와 무너진 산. 그리고 허리가 꺾인 봉우리. 깔끔하게 잘려서 불타 버린 숲까지.
이곳으로 달려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될 광경이다. 과연 이러한 풍경을 마주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이드는 문득 웃음이 났다.
사람들이 받을 충격과 두려움을 상상해 본 것이다.
그들이 과연 범인을 쫓고 싶어 할까?
아니.
당연히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고개를 저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추적 대신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겠지. 자신들의 사견을 듬뿍 담아서.
그걸 본 마스의 왕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포기하고 이대로 눈을 감을지, 아니면 피해를 감수하고 자존심을 챙길지 말이다.
사실 개인이라면 이런 경우 대부분이 실리를 택한다. 철저히 손익을 따진다는 말이다.
이 무지막지한 파괴의 현장을 보면 이해가 간다.
‘손익’에 걸리는 게 자신의 생명이 될지도 모르는데 신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결단의 주체가 국가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국가란, 그리고 왕이란 손익보다 더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때론 뻔히 보이는 피해를 감수하고도 나설 수밖에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름 아닌 체면과 명분, 자존심이라는, 이드가 보기에는 하나같이 하잘것없는 것을 위해서.
그리고 이런 면에서 마스의 왕은 쉽게 판단이 힘든 인물이었다.
겉으로 볼 때는 그 역시 피 끓는 전사의 나라의 왕답게 거칠게만 보이지만, 냉정히 손익을 따져 초인 마법을 확보하려는 모습은 여느 정치인처럼 능구렁이 같았기 때문이다.
‘뭐, 어느 쪽이라도 이제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제일 큰 목표였던 존 워스를 죽이고 차원의 인에 흡수시킨 이드다.
존 워스가 없는 마스, 그리고 미완의 마탑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막말로 마스가 준비 중인 전쟁도 남의 일이라는 말이다.
다만 문제라면 그 전쟁의 대상이 아나크렌이라는 점이다. 검후와 함께 제국에 머무는 이상, 온전히 관심을 끊는 것은 어려웠다.
사실 마스가 진짜 전쟁을 일으키더라도 시시하게 끝나 버릴 가능성이 다분했다. 비장의 수가 될 초인 마법이 사라진 마스의 전력이란 뻔했으니까. 반대로 제국에는 바벨의 적극적인 지지가 뒤따를 예정이다. 오늘의 작전을 기획한 것이 그들이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않겠는가.
그때가 오면 마스 왕은 술이 많이 땡길 것이다.
‘사라진 존 워스 대신 또 다른 혼돈의 파편이 전쟁에 개입한다면 상황이 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아마도.’
왠지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엄밀히 따져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예측도 아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돈의 파편 역시 이미 망해 버린 미완의 마탑에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부관주가 일부 마법사들을 데리고 도주하긴 했지만, 그뿐이다. 탑주와 바이트 타블렛을 잃은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초인 마법을 익힌 그들의 가치가 객관적으로 높긴 하나, 혼돈의 파편이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존 워스가 움직인 이유도 초인 마법보다는 그들이 보유한 바이트 타블렛을 이용하려던 목적으로 보였다.
하나 그 역시 현재는 라미아의 손에 들어온 상황. 그녀가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작업을 마친다면 같은 조건으로 바이트 타블렛의 사용은 불가능하다.
진리란 본래 영원불변한 것.
초인 마법에 대한 법칙 역시 한번 정해지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아카데미 과제물도 아니고, 추가 수정 같은 건 어림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게 가능했으면 개나 소나 다 대마법사 됐겠지.’
아무렴 언제 도달할지 알 수 없는 대마법사를 목표로 하는 것보다 여럿이 힘을 모아 바이트 타블렛을 만드는 쪽이 당연히 더 쉽지 않겠는가. 이드는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완성된 대마법사로 가득한 세상을
“하. 하. 하. 왜 이렇게 식은땀이…………..?
이드가 이마를 훔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좋은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강대한 무력으로 다툼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글쎄?
중원과 그레센을 거쳐 지구까지 다녀온 이드의 입장에선 다시 없을 개소리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누구보다 빛나는 지성을 가진 대마법사라면 다툼을 피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하지만 그 역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바이트 타블렛으로 만들어진 대마법사들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자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피나는 자기 성찰과 고단한 수련이 아니라, 지름길을 통해 편하게 목적지에 닿은 자들이니까.
그런 만큼 지성이나 인성은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차원계 전체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평등한 세상이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다.
옆집 부부 싸움 도중에 메테오가 떨어지면 그게 무슨 재난이냔 말이다.
그렇게 정신 나간 상상에 고개를 젓고 있을 때다.
“이드!”
흥분에 찬 목소리와 함께 일리나가 이드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휘감고 있던 바람이 흩어졌다.
산 위에서 이곳까지 일리나를 안고 날아온 바람의 정령이 사라진 것이다.
“이드가 이길 줄은 알았지만, 걱정 때문에 가슴이 터질 뻔했다는 것 알아요?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죠?”
이드를 힘껏 안고 있던 일리나는 곧 이드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 다친 덴 없는지, 피가 흐르는 곳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드는 그녀의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기며 침착한 목소리로 일리나를 진정시켰다.
“다친 곳은 없으니까, 안심해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게 차분한 목소리에 안정을 찾는 일리나.
이드는 그녀를 포근히 안아 주는 동시에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혼자 달려와요?”
“괜찮아요. 검후가 있으니까. 그리고 내겐 이드가 제일 소중해요.”
“……나도 일리나가 제일 소중한 거 알죠?”
“라미아도 있잖아요.”
“두 사람이 제일 소중한 거 알죠?”
또 한 사람의 가족을 잊지 않는 일리나의 말에 이드는 쿡쿡거리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산 위에서는 검후와 나머지 일행들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끝이 났음에도 그들의 행동은 빨랐다.
하긴 그게 옳았다. 이곳은 누가 뭐래도 적지. 오래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직 중요한 일 하나가 끝나지 않았다.
‘라미아쪽은 어떻게∙∙∙∙∙∙ 마무리되어 가려나?’
이드는 일리나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늘까지 닿아 있는 빛줄기 안에 들어 있는 라미아. 마침 그녀와 빛줄기를 중심으로 몇 개의 대형 마법진이 만들어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라미아의 작업도 막바지라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스팟!
아무런 전조도 없이, 돌연 라미아를 중심으로 땅과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던 빛줄기가 멈췄다.
사방을 비추던 녹색의 빛이 줄어들자 한층 어두워진 주변.
뒤이어 마법진까지 사라진 주변으로 붉은빛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