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46화
1381화
나뭇가지는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이어져 있고, 빼곡한 잡초는 몇 걸음만 걸어도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어지간한 경험이 없다면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
그런 숲속을 두 무리가 달렸다.
약 오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앞뒤로 달리는 그들은 딱 봐도 쫓고 쫓기는 관계 같았다. 그들은 숙련된 사냥꾼도 달리기 힘든 수풀 속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기세는 맹수를 능가할 정도로 날카롭고 사나웠다.
그 증거로, 중간중간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앞길을 막는 나뭇가지와 잡초가 맥없이 꺾이고 뽑혀 날아갔다.
딱히 그들이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음에도 말이다.
그건 그들의 가벼운 몸짓에 실린 힘이 맹수의 것을 뛰어넘고 있다는 증거였다.
특히 두 무리 중에서도 유독 눈이 가는 사람.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를 여유 있게 미끄러지는 한 남자.
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웠다.
그렇게 달리기를 얼마일까.
두 무리의 거리가 천천히 좁혀졌다.
문제는 그것이 뒤따르는 이들에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쯔쯔쯧. 어리석은 녀석들.”
안타까움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감상과 함께, 홀로 숲속을 노닐던 남자의 진행 방향이 바뀌었다. 훌쩍 몸을 띄운 그는 이내 허공에 늘어진 나뭇가지를 차며 뒤쫓아 오는 무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파라라락!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와 함께 삼십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줄인 남자는 그대로 수풀 위를 미끄러졌다.
중원 무림에서도 쉽게 볼 수 없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인, 그야말로 절정에 이른 초상비다.
흔들!
직후 남자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법처럼 감쪽같지만, 마법이 아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 순간에 만들어진 사각으로 뛰어든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사라진 남자로 인해 뒤를 쫓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오싹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 일순간에 최고점을 찍는 경계심. 그러나 단순히 눈을 부릅뜬다고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명심해라. 때론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남자는 사라질 때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과 같은 말을 남긴 남자.
하지만 그 손속은 선생처럼 은혜롭지 않았다.
서걱!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리 없이 하나의 목이 잘려 떨어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남자의 검은 섬뜩할 정도로 깨끗한 검로를 그리며 그 근처 사람들의 팔다리를 끊어 냈다.
“코너! 왼쪽 뒤에서 온・・・・・・ 제길!”
누구도 그의 검을 막지 못했다. 아니, 검뿐 아니라 남자 자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뒤따르던 동료가 다급히 경고를 하지만, 늦다.
남자의 검은 그의 말보다 몇십 배 빨랐다.
그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네 명이 목이 더 잘렸다.
목과 사지가 떨어져 나간 부위에서 뿜어진 피가 사방에 뿌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달빛 대신 쏟아지는 초록빛에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던 숲은 붉은색이 더해지자 더욱 공포스럽게 변했다.
마치 그 자체로 몬스터가 된 것 같다.
일반인이라면 그 분위기만으로 기절하고도 남겠지만, 지금 여기엔 겨우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다.
“멈춰! 상대와 맞서지 마라!”
“진형을 갖춰서 대응해!”
부하들이 맥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에 피오 단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당장 자신이 달려 나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이 진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 중에도 남자는 기사들은 쉼 없이 베었고, 진형의 형성은 그만큼 늦어졌다. 그러나 기사들의 숫자는 많았다. 결국 느리게나마 진형이 갖춰졌다.
그렇게 동료의 원한을 품은 진형이 완전히 형성된 순간, 피오 단장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이제부터는 우리 차례다!”
“재미없는 짚단 베기는 끝인가. 반가운 일이지만.”
감히 기사를 짚단 따위에 비유하는 오만방자한 발언이지만, 쉽게 쉽게 기사들을 베어 넘긴 것 또한 사실.
하지만 그런 남자도 완성된 진형에서 뿜어내는 기세는 무시할 수 없었는지 거침없던 발길이 슬그머니 멈추고 만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린 것일까.
콰지직!
한줄기 새파란 검광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릉!
흡사 진짜 번개를 떠올리게 만드는 폭음과 함께 발생한 충격파에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눈을 찌르는 나뭇잎에 뭇사람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덕분에 그 장면은 오직 피오 단장만이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절대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타란 백작의 기습을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저지한 검왕과 그에 막혀 허공에 멈춰 버린 타란 백작의 모습을 말이다.
“ ・・・・・・저대로는 위험하다!’
실패한 기습은 도리어 공격자 본인에게 치명타로 돌아오는 법.
피오 단장은 위기를 직감했다. 당장 타란 백작의 위치만 봐도 그랬다.
그의 두 발은 지지할 곳 없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다.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데 어떻게 공격을 막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온전히 감당할 수는 없어도 타란 백작이 몸을 뺄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피오 단장이 결국 달려 나가려 할 때였다.
눈이 마주친 타란 백작이 그를 막았다.
‘오지 마라!’
오랜 시간 백작을 모신 피오 단장이기에 그의 눈이 하는 말을 모를 수가 없었다.
백작의 뜻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넘기기보다 남아 있는 기사들을 위해 피오 단장을 살리고자 했다.
“……이 벌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그러나 피오 단장으로서는 차마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따지더라도 타란 백작을 잃은 후 검왕으로부터 살아 나갈 수 있을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험을 해 보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판단한 피오 단장이 땅을 박찼다.
“끄아압!”
십 미터를 한걸음에 뛰어넘은 피오 단장이 검왕의 허리를 베어 갔다. 상단의 검을 끌어 내리려는 의도였지만, !!
허리는 고사하고 옷자락도 스치지 못한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하물며 검왕의 발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한쪽 발끝의 방향을 트는 게 전부였다.
“죽어라, 검왕!”
그러나 이 정도 대응은 이미 예상했다.
피오 단장은 크게 한 걸음 디디며 검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본래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회피는 어려워진다.
아무리 상대가 검왕이라도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
피오 단장은 집요하게 검왕의 하체를 노렸다.
하지만 검왕의 이목을 돌리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그는 원래 섰던 곳에서 한 걸음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피오 단장이야말로 불쑥불쑥 날아드는 발을 막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검을 쉬지 않았다. 그런 집요함이 통한 것일까.
쉬지 않고 파고드는 피오 단장의 몸짓에 드디어 검왕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충성심이 깊은 놈은 싫어하지 않지. 다만, 날 향한 것일 때 말이야.”
“……!”
무심한 듯 눈살을 찌푸린 검왕.
그와 눈이 마주친 피오 단장은 순간 등허리를 지나는 한기에 손을 멈출 뻔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인식한 그는 오히려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이 순간이 지나면 타란 백작을 살릴 수 있다.
대신 자신은 죽겠지만.
그런 확신을 담아 검왕의 허리를 찔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였다. 왼쪽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해졌다. 검이 살을 파고드는, 싫지만 기억에 있는 익숙한 통증이다.
“주군, 부디!”
강렬한 통증에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쩡!
“끄악!”
뜨거운 쇳소리와 함께 어깨에서 시작한 진동.
그로 인해 전신의 뼈에 시큰한 고통이 전달되었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
“물러나라!”
“주군!”
타란 백작의 목소리였다.
어째서! 어째서 몸을 피하지 않고 검왕의 검을 막아선 것인가!
피오 단장이 안타깝고 다급한 마음에 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허공에 거꾸로 선 타란 백작의 뒤통수. 그리고 검왕의 검을 막고 있는 타란 백작의 검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검왕이 짓고 있는 흐릿한 미소였다.
어쩌면 군신 간의 흐뭇한 모습이 보기 좋아서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피오 단장의 눈에는 비웃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직후 검왕의 눈이 타란 백작을 향했다.
그 순간, 피오 단장은 검왕의 눈을 통해 환상처럼 하나의 검로를 봤다. 자신의 어깨에서 타란 백작의 목으로 이어지는 검로. 너무도 간결해서 완전무결해 보이는 검로의 끝에서, 타란 백작의 목이 잘려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멈춰!’
막아야 했다.
하지만 검왕이 멈추란다고 멈출 리도 없고, 자신의 움직임은 너무도 느렸다.
그에 반해 어깨에 박힌 검은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펄떡거리고 있다. 마침 시야 한구석에서 검왕을 향해 검을 찔러 오는 기사들이 보였지만, 그들 역시 너무도 느리기만 했다.
그렇게 애가 타는 중에, 결국 검왕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정확히 피오 단장이 본 검로를 타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끝인가.
지켜야 할 주군이 지켜 주는 가운데, 주군의 죽음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저 이 상황이 절망스럽고 원망스러웠다.
그런 중에도 검왕의 검은 빠르게 움직였다. 타란 백작도 그걸 보고 대처를 하려 하지만, 아무래도 검왕보다는 늦다. 그렇게 모두가 타란 백작의 목이 잘릴 것을 예상하고 있을 때였다.
쿠르릉!
갑자기 저 멀리서 천둥소리를 닮은 폭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녹색의 빛이 숲속을 환하게 비추고 지나갔다. 그건 짧은 순간 일어난,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측 불가의 현상 덕분에 검왕의 검이 찰나 주춤하고 말았다.
다른 상황, 다른 장소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검왕 정도나 되는 기사의 검이 흔들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진짜 자식이라도 죽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다.
그런데, 지금 검왕은 주춤했다.
타란 백작의 목을 베기보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피는 것을 우선했다.
그도 그럴 게, 영혼의 관이 있던 방향에서 뻗어 나오는 마나의 파동이 너무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란 백작을 살렸다.
아니, 타란 백작 스스로가 자신을 살렸다.
검왕의 검이 주춤하는 순간, 내력을 폭발시켜 검왕의 검을 튕겨 낸 것이다.
“끄아아악!!”
쩌어어엉!!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쇳소리를 뒤로하고, 타란 백작은 반발력을 이용해 검왕과의 거리를 벌렸다.
물론 그런 중간에 피오 단장을 잡아채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훅훅! 후훅!”
뒤로 훌쩍 물러난 타란 백작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