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47화
1382화
“훅훅! 후우우…….”
순간적 힘을 폭발시킨 덕분에 호흡이 어깨까지 차올랐다.
검왕을 앞에 두고 지금 상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기에 배꼽 아래로 호흡을 끌어내리며 억지로 안정시킨다.
순식간에 잦아든 숨소리에 어두운 숲속이 고요해졌다. 벌레도 숨을 죽인 가운데,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사람이 없다.
대신 있는 힘껏 눈을 부릅뜬 기사들의 번뜩이는 안광이 녹색 빛이 물러간 어두운 숲속에서 번뜩이는 중이다. 그렇게 모두가 멈춰 버린 모습은 마치 한 장의 우울한 전쟁화 같았다.
철벅.
그런 가운데 들려온 질척한 소리. 조심히 발을 옮기던 중에 바닥에 고인 피를 밟은 것이다. 순간 피어오르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침묵을 타고 콧구멍을 찔렀다.
그러자 오로지 검왕을 향해 있던 시야에 바닥에 누운 동료 기사들의 시체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건 잠깐일 뿐이었다.
시체는 시체일 뿐이다. 팔다리가 잘린 동료도 지금은 돌봐 줄 여유가 없다. 기사들은 생각했다. 지금 검왕에서 눈을 떼는 순간 자신들도 바닥에 쓰러진 동료의 옆에 눕게 될 거라고.
꿀꺽!
그런 식은땀 나는 긴장 속에 들려온 침 삼키는 소리. 기사들은 생각했다. 저 침이 혹시 내 것은 아닐까 하고. 그 정도로 이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만용을 부려 나서는 기사조차 없었다. 동료들을 믿고 검왕을 베었다는 타이틀을 노려는 볼 법한데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타란 백작에게는 달리 읽혔다.
‘・・・・・・ 전의를 잃었나.’
자신이 키워낸 기사들의 이런 모습이 안타깝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무려 상대가 검왕이 아니던가.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맥없이 죽어 간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저들은 충분히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타란 백작은 옆에 있는 피오 단장을 살폈다.
죽음 직전에서 살아난 그는 어느새 쩍 벌어진 어깨를 옷을 찢어 동여매고 있었다. 단장에 오를 만큼 경험이 많은 그의 행동은 신속하고도 빨랐다.
“움직일 수 있겠나?”
“멀쩡합니다. 검왕의 어깨에 똑같은 자국을 만들어 줄 정도는 됩니다.”
“그 꼴을 하고 또 달려들겠다고? 원래 그렇게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잖나?”
“흐흐흐, 제가 아무리 무모한들 허공에 매달린 상태로 검왕의 앞을 막아선 주군만 하겠습니까.”
“……거 할 말 없게 만드는군.”
부하를 향해 물러나라 눈치를 주던 타란 백작은 내로남불을 시전하는 자신의 기사에 끌끌거리며 웃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저 잔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물론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하기에 따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기사들을 물리도록 하게.”
“・・・・・・ 더해도 모자랄 전력을 빼란 말씀이십니까?”
“저 검왕을 상대로 평기사들이 무슨 소용인가. 걸리적거릴 뿐이네. 나는 내 기사를 그렇게 의미 없이 죽이고 싶지는 않아.”
기사에 있어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은 로망이다.
그것이 어떻게 의미 없는 죽음일까. 하지만 피오 단장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거기에, 다행히도 당장 전투가 이어질 것 같지는 않기도 하고 말이네.”
타란 백작의 말처럼 검왕은 자신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먼 하늘을 살피는 중이었다. 자신들의 기습 따위는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것일까.
“까득!”
피오 단장은 자존심이 상하는 가운데 충실히 주군의 명을 따랐다. 그의 수신호에 따라 기사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조심스러운 가운데 치밀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진형이 유기적으로 변했다.
언제든 검왕이 공격해 온다면 그 즉시 반격에 나설 수 있도록.
하지만 검왕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저자……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자 그때까지 긴장을 놓지 않던 피오 단장이 나직이 한숨을 쉬고는 검왕을 노려보았다.
이쪽을 완전히 무시한 그.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런 행동을 보여 주는 것인가.
“…………검왕이라는 이름이 크긴 큰 모양이야.’
그 물음에 타란 백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피오 단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느끼는 압박감 말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할 자네가 아닌데. 하늘을 보게. 녹색 빛이 사라졌네.”
움찔.
그제야 깨달은 사실에 피오 단장이 몸을 떨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이 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주군의 제일 기사로서 이렇게 부끄럽고 한심할 수가 없다.
“내 목이 잘리기 직전에 녹색 빛이 일순간 밝아진 후 사라졌네. 다행이지. 덕분에 검왕의 검이 잠시 멈췄고, 나는 살았으니까.”
“……면목 없습니다. 기사로서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다니.”
“아니야. 어차피 그 일이 아니었으면 내 목이 잘리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
말을 하는 타란 백작 본인도 그 운이 실감이 나지 않는지 슬쩍슬쩍 목을 만졌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깐.
타란 백작은 검왕이 보고 있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는 매우 심란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진짜 운이 좋은 것이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주군?”
“영혼의 관이…… 무사하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목이 잘리는 대신, 그만큼 치명적인 곳을 찔린 듯 고통스러운 표정이 된 타란 백작. 그러자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와 동시에 바람이 불어왔다.
쏴아아아.
나뭇가지를 흔들며 불어닥친 바람은 제법 강했다. 새벽이슬을 머금어 차갑고 무거운 바람은 어딘가 음울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바람이 불어온 방향은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영혼의 관이 있던 곳.
실로 불길한 예감에 부채질을 하는 바람이 아닐 수 없다.
타란 백작은 이 불길한 예감이 그저 기분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눈앞의 저 검왕이 환상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하늘을 물들이던 초록빛도 착각이 아니며, 영혼의 관이 있던 곳에서 들려왔던 폭음과 파도처럼 밀려오던 마나 파동도 엄연한 현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 임무 실패로군.”
실제로 말을 하고 보니, 가슴에 돌덩이를 올린 것처럼 무겁다.
이번 임무는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국운이 걸려 있는 중차대한 임무였으니까. 그럼에도 실패라니.
‘차라리 여기서 죽을까.’
얼마나 충격이 크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하지만 이건 가문의 주인으로서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다. 최소한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가문에 죄를 묻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 이 자리에서 살아나더라도 어차피 돌아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왕이 명령할 죽음 말이다.
“쯧, 어리석은 생각이지.”
타란 백작은 혀를 차며 잡생각을 버렸다.
어떤 형태로 죽더라도, 죽기 전에 가문의 기사들은 살려야 했다. 그래야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가문이 산다.
새파랗게 밝아 오는 하늘을 보며 타란 백작이 다시 검을 들었다. 이대로 전투를 이어 갈지, 아니면 물러날지.
지금이 아니면 선택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란 백작이 어떤 선택을 하기도 전이었다.
“아무래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검왕의 말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먼 하늘을 향해 있던 검왕의 눈은 어느새 타란 백작과 피오 단장을 향해 있었다.
“아…….”
그 무심한 듯 하면서도 깊은 눈을 본 타란 백작은 순간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투를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걸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오로지 저 앞에 있는 검왕이 가진 권리였다.
애초에 자신이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저 괴물에 압도당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는 말인가.’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기분은 굉장히 불쾌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검왕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저쪽은 끝이 난 것 같은데. 백작이 보기에도 그런 것 같지 않소?”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겁니까? 자신을 미끼로 써서?”
“흐음. 미끼라. 아무래도 백작은 스스로를 상당히 대단하다 생각하는 것 같소? 나, 검왕을 미끼로 쓸 만큼 당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말이오.”
“으드득.”
“아아…… 너무 화내지는 마시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믿어 주지 않겠지만, 저기서 벌어진 일은 나와는 관계가 없소.”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검왕의 말.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타란 백작은 다시 한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런 수치를 주다니.
“그대가 검왕이라면, 기사라면, 더 이상 나를 조롱하지 마시오.”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극히 가벼운 사과. 그조차 진심은 담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더욱 흉흉해지는 타란 백작과 피오 단장.
검왕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저리도 어리석어서야.’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진심을 이리도 몰라준단 말인가. 그로서는 나름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나 타란 백작이나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타란 백작이 먼저 기습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건 결국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은 의심이 아닌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전할 수는 없었다. 타란 백작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이해시키기에는 너무 선을 크게 넘어 버린 탓이다.
당장 발아래 흐르는 피가 얼마인가. 평기사의 피야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봐도 타란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다.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이 오해가 이어지는 쪽이 오히려 자신에 있어서는 유리하다.
그런 이유로 타란 백작이 생각을 정리하고 할 시간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이어지는 말은 정확히 검왕이 바라는 대로였다.
“우선 하나 확실히 하겠습니다. 이 밤. 귀하가 벌인 이 일은 본국에 대한 절대적인 침략 행위입니다.”
“글쎄. 침략 행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투는 결코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소. 조용히 물러나려는 날 쫓은 것은 그쪽이 아니었던가.”
어깨를 으쓱이는 검왕의 모습에 타란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 그런 괴변을 지껄이면 부끄럽지 않소? 명색이 검왕이라 불리는 분이 말이오.”
허락 없이 남의 땅을 밟은 시점에서 이미 잘잘못이 누구에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