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48화
1383화
“허허. 이 검왕의 말이 고작 궤변으로 들렸단 말인가. 이런 취급은 참으로 오랜만이야.”
검왕의 머리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불쾌함과 신선함이 반반 섞여 있었다.
그럴 만했다.
아주 오랜 시간 그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검왕으로 불린 후로는 황제조차 자신에게 ‘궤변’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사람의 눈에 검왕은 참으로 태연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런 검왕의 모습에 타란 백작은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을 맛봤다.
분명 모욕을 주었건만 저런 모습이라니.
그에게 있어 자신이 그렇게 가치 없는 존재란 말인가.
검왕을 흥분시키려 던진 말은 오히려 타란 백작 본인의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자신의 기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태연할 정도의 여유 역시 강자의 권리.
애초에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고개를 숙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자존심을 버리진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한 타란 백작이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이 밤, 귀하는 침략자가 분명하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침략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겠군.”
“…….”
증명한다고? 뭘 어떻게?
타란 백작의 손에 땀이 찼다. 무슨 행동을 하려는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시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내 발언이 너무 강경했나.’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검왕이 미묘한 미소를 띠고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봅시다. 우리 문제의 시작이, 내가 허락 없이 이 땅에 발을 디딘 것이었던 것 같은데. 맞소?”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타란 백작.
“좋소. 그럼 그게 죄인지 아닌지 우리 세상에 물어봅시다.”
“무슨・・・・・・ 말이오.”
“나처럼 허락 없이 제국 땅에 무단으로 발을 디딘 마스의 인간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잔 말이오. 이런저런 인간들을 모두 합해서.”
“・・・・・・ 이보시오, 검왕!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너무도 어이없는 발언에 이해가 조금 늦었다. 하지만 말뜻을 이해한 순간, 타란 백작은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붉은 얼굴도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이런저런 인간들이라니. 이런저런 인간들이라니!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무서운 말이 아닌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개새끼부터 쥐새끼까지 모조리 잡아내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게 했을 때의 혼란은 어쩌고!
사실 모두 알면서 묵인해 오고 있지만, 허가 없이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꼭 밀수꾼이 아니라도 채집이나, 사냥, 혹은 도망친 노예까지.
사연은 많고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문제가 되는 경우가 없어 무시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잡기 위해 들여야 하는 수고가 너무 컸다.
제국이 거대한 만큼 지켜야 하는 국경이 너무 넓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넓은 국경을 개구멍 하나 없이 촘촘히 지킨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건 마스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이런 불법 입국자를 모조리 잡아내겠다고?
억지로 덮어 두었던 문제를 다시 들춰내는 순간 튀어나올 그 많은 악취를 다 어쩌란 말인가.
‘안 된다. 저건 내 목을 조르겠다는 소리다.’
이건 잘잘못 이전의 정치적인 문제다.
사연 없는 불법 입국자가 어딨으며, 불법 입국자 중에 떳떳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중에는 권력자의 치부와 관련된 일도 많을 터.
잘못 건드리는 순간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될 소지가 넘쳤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하지만 들춰내는 인간이 검왕이라면!
그의 힘과 영향력이라면 세상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정말 겨우 잘잘못인지를 가려 보자고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이다.
주르륵.
‘만약’이라는 가능성에 식은땀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이 문제는 정말로 위험했다.
영혼의 관이 공격당한 것은 어쩌면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 검왕이 장난처럼 꺼내 놓은 일이 문제가 된다면 왕이 직접 자신의 목을 자르겠다고 날뛸 것이 확실했다. 타란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그의 입에서 약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좀 전에 자존심은 굽히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상황이 다른 거니까.
“그렇게 했다가는 죄 없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죽을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왜 죄가 없소? 백작이 내게 물은 죄가 있지 않소. 불법 입국. 설마 그들이 하는 불법 입국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거요?”
“…….”
“훌륭한 내로남불에 할 말이 없는 모양이오?”
“그건……!”
타란 백작은 억지를 부렸다.
“그들은 단순히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을 뿐이지만, 귀하는 왕국의 귀한 기사들을 죽였소!”
“어허. 그에 대해선 내 여러 번 항변했듯 난 그저 반격했을 뿐이라니까.”
잘 도망치다가 반전한 것이 반격이냐!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어차피 서로 잘잘못에 대해 떠들고 있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폐하의 기사가 죽은 그 순간부터 귀하가 범한 모든 잘못도 다 죄가 되는 거요.” 다시 말해서 걸린 것이 죄라는 거다.
죄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걸리지를 말았어야 했다.
당장 수십의 기사들이 죽었다. 영혼의 관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영혼의 관을 지키던 병력에도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군가는 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 절대적으로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검왕이다.
“누군가는 오늘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오.’
“그게 본심이로군. 구질구질하게 침략이 어쩌네 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말이 듣기 좋소. 그런데 말이오. 그렇게 내 탓을 한다고 백작이 살 수 있겠소? 영혼의 관이 결코 멀쩡할 것 같지 않은데 말이오.”
“설마, 그 말은…….”
검왕의 말에 타란 백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과연 영혼의 관의 피해가 크지 않다면 검왕이 과연 저런 말을 했을까?
어쩌면 검왕은 영혼의 관의 피해 정도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검왕에겐 그런 거짓으로 자신을 속일 이유도 없었다.
“역시 영혼의 관을 노리고서 우릴 유인한 것이오?”
“허허. 거참,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나.”
“그럼 영혼의 관의 피해 정도를 어떻게 아는 것이오.”
“왜 모르겠소. 백작도 느꼈잖소. 숲속을 달리는 동안 온몸을 두드리던 마나 파동을 말이오. 거기에 더해서 산이 무너지는 충격까지. 아, 실제 무너지기도 했던가. 그걸 보고도 짐작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크크큭.”
검왕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검을 바닥에 꽂아 두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동시에 저 멀리 영혼의 관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은 매우 깊었다.
그러나 타란 백작은 그의 깊은 눈빛이 쉼 없이 떨리고 있다고 느꼈다.
불안과 공포, 후회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담고서 말이다.
‘저 검왕이 후회라니. 그럴 리가 없지.’
검왕이 무엇이 아쉬워 무엇을 후회한단 말인가.
하지만 공포라면 조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저 멀리서 들려온 폭음과 마나 파동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인간의 힘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무엇보다 저 멀리 보이던 산봉우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했다.
하지만 차라리 그 모습은 괜찮았다.
타란 백작은 그건 인간이 한 짓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으니까.
분명 마탑에서 준비한 마법에 의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 산을 날려 버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그와 함께 다시 떠오르는 쉐어 가든의 모습에 타란 백작은 서둘러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딴 황당한 일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다시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타란 백작은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했다.
대신 앞에 있는 검왕에 집중했다.
그는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검도 놓고서. 자신과 기사들이 앞에 있음에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방심이라는 글자를 세워 놓으면 저럴까.
하지만 그런 모습임에도 타란 백작은 그에게서 어떤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눈에 보이는 빈틈은 있지만 찔러 들어가면 어떻게든 막히고 반격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서 있는 것은 방심이 아니라 자신감이고, 강함이었다.
그렇기에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에…….”
“음?”
“만약에 귀하의 말대로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게 놀아난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죄인은 누구요?”
저런 무시무시한 파괴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은 누구인가.
“이제야 그걸 묻다니, 오래도 참으셨소.”
검왕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타란 백작은 굳이 그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결코 참은 것이 아니었다. 검왕을 추적하고 싸우는 동안 의문을 가질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여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휘젓고 있을 뿐.
“나는 바벨이라고 생각하오. 오늘 밤의 주관자 말이오.”
“생각하다니, 확실한 증거가 없는 거요?”
“증거를 확보할 여유가 있었으면 애초에 당하지도 않았을 거요.”
“그런데도 바벨을 지목한단 말이오?”
“바벨이 아니면 이런 무리한 일을 누가 벌인단 말이오. 초인 마법의 등장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인간들이 그들 말고 누가 있다고.”
“……그런데 결국 증거는 없다는 말이군.”
타란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증거가 없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더욱이 그 말을 한 사람이 검왕이다.
검왕은 그 이름만으로 말에 무게가 실리고 믿음이 가야겠지만.
글쎄. 무작정 덮어 놓고 믿기엔 저기 죽어 있는 부하들이 눈에 밟혔다.
또한 그는 배신자다. 스승이자 주군을 배신한 배신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이런 타란 백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왕은 말을 이었다.
“믿든 말든 그건 백작의 마음이오. 하지만 나는 확신하오. 그리고・・・・・・ 오늘 밤 이곳을 찾은 바벨은 아마도 그분과 그분도 함께하고 있지 않을까 싶소.”
“그분. ・・・・ 이라면?”
“검후.”
“……”
방금 검왕의 말에 대한 신뢰도가 뚝 떨어졌다.
타란 백작은 과연 검왕이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그가 검후를 언급하다니.
더욱이 검후가 바벨과 함께한다고? 둘이 손잡고 영혼의 관을 공격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얼마 전까지 바벨에 잡혀 있던 검후다.
그녀에게 있어 바벨은 수치를 준 적이다.
그런데 그런 둘이 손을 잡을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미완의 마탑이 무슨 마왕성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타란 백작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