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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49화


1384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리다.

마침 고개를 젓던 그의 눈이 피오 단장과 마주쳤다. 그런데 그 표정이 묘하다.

마치 손자의 어설픈 거짓말을 듣고 있는 할아버지 같았다. 인자함이 빠진 할아버지 말이다.

그 모습에 타란 백작은 자신의 얼굴도 그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오래도록 함께한 이들은 서로를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눈이 마주친 김에 슬쩍 눈짓을 했다.

‘자네는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한 번의 눈짓에 담기에는 많은 것이 담긴 질문이지만, 오랫동안 백작을 모신 피오 단장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그런 쪽으로 초능력에 가까운 촉이 발동한 것인지도 모를 일.

검왕의 눈치를 잠깐 살핀 피오 단장은 곧바로 전음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타란 백작처럼 눈짓으로 담기엔 그의 생각은 제법 길었다.

-솔직히 바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분명 바벨의 개입 가능성은 있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 데다 그들의 개입이라고 하기엔 그 과정과 결과가 너무 과격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벨의 일 처리는 제법 조용한 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걸 아는 타란 백작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바벨의 행사가 항시 조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건은 커도 너무 크다. 전쟁이 일어날 수준이지.’

검왕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했다.

-하지만 제국의 짓이라고 하기에도 과격하긴 마찬가집니다. 아무래도 저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야. 나 역시 판단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니까.’

-송구합니다. 다만 검후가 바벨과 함께하고 있다는 발언은 분명 거짓일 겁니다. 영원한 적은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갈등을 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검왕의 저와 같은 주장에는 분명 노림수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피오 단장이 의견을 보탰다.

-주군께서도 아시겠지만, 저자가 배신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죽어도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정말 만약 제가 그라면 검후가 언급되는 상황은 제가 먼저 피했을 겁니다.

끄덕끄덕.

타란 백작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오 단장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믿음의 표현이며, 동시에 그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인 사람은 자신의 치부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는 법이다.

그런데 검왕은 그 반대로 행동했다.

뿐인가.

검후를 바벨에 가져다 붙였다.

왜 그런 것일까?

문득 배신자라는 피오 단장의 말이 귓가에 맴돌자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죄가 세상에 드러날 때를 위한 안배이지 않을까?’

한번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나온 결과는 타란 백작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건…… 나쁘지 않다. 아니, 아주 좋은 신호야.’

사실 당장 목숨이 걸린 전투를 앞에 둔 입장에서 검후와 검왕의 일은 아무래도 좋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위기 상황이 아니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관련자가 관련자인 만큼, 전 대륙을 뒤흔들 만큼 시끄럽긴 하겠지만 어차피 마스의 귀족인 그의 입장에선 흥미로운 스캔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발생한 스캔들이 어쩌다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혹시 모르겠다. 아니면 이 과정에서 황제에게 어떤 변고라도 생긴다든가.

그렇게 된다면 제국의 혼란을 틈타 무언가를 도모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럴 일이 있을까?

타란 백작이 생각하기에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당장 내전을 가정해 보자.

이런저런 조건이 있겠지만, 내전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과 명분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 내전은 이미 실패했다고 봐야 했다.

이런 점에서 검왕은 둘 다 가지고 있지 못했다.

굳이 깊이 들여다볼 것도 없었다.

배신자.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이야기는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수백 개의 명분을 가져다 붙여도 배신자라는 사실 앞에서는 의미를 잃어버린다. 자연히 그의 힘이 되어 줄 지지자들도 떨어져 나갈 것이다.

검왕의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기사들에게 있어 배신은 죽었다 깨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검왕이 배신자다?

그에서 오는 충격과 배신감에 검왕을 향해 칼을 빼 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검왕의 측근이 아닌 이상 그를 지지하는 기사 대부분은 검후를 향해서도 동일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말하자면 양다리랄까.

구분하자면 우상과 동경이라는 미묘한 차이다.

사실 이러한 마음은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검후와 검왕은 나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이며, 동시에 주군과 기사다. 그 정도의 관계라면 부모 자식으로 봐야 했다. 그냥 일심동체라고 할까.

또 이러한 관계이기에 검왕의 배신은 더욱 큰 충격이 될 것이다. 부모를 죽이려던 패륜아를 그 누가 동경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욕하고 손가락질하기 바쁘지.

쉽게 거짓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관련된 사람이 사람이니까.

다만 그렇다고 금세 믿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리 검후의 주장이라도 의심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었다. 반대편에 있는 것이 무려 검왕이지 않은가.

이때 필요한 것이 증거다.

당장 쉐어 가든을 탈출한 검후가 조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마스에서는 그 이유를 배신의 증거를 수집하기 위함이라고 분석해 놓은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검왕도 증거를 만들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과연 어느 쪽의 증거가 더 완벽할까.

세상은 어느 쪽의 말을 믿어 줄까. 여기에는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리고 바벨은 그중 가장 크고 치명적인 변수였다.

배신자의 협력자임과 동시에 검후를 감금한 범죄자들.

타이틀만 놓고 보면 바벨이 검후를 위해 행동에 나설 이유는 결단코 없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왜 검왕은 그런 바벨이 검후와 손을 잡았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어쩌면 검왕은 마스가 모르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언젠가 바벨이 검후를 위해 증인을 자처할 때를 위한 함정.’

가능성은 충분했다.

검왕과 손을 잡고 검후를 습격하고, 이후 그녀를 감금하고 있던 바벨이다. 그런 그들이 검후가 손을 잡고 마스에 있는 영혼의 관을 습격했다? 과연 이러한 흐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모두 이 둘의 관계를 의심할 것이다. 증인으로서 바벨의 말이 힘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감금한 검후의 인품에 바벨이 감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감동 스토리보다는 음험한 음모론에 심취할 가능성이 컸다.

아무렴 그런 이야기가 더 재밌는 법이지 않은가.

아마 그때가 된다면 대륙의 모든 눈과 귀가 제국을 향할 것이다.

그야말로 세기의 스캔들이 될 테니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

막상 그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말이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진실에 도달하는 길은 고난의 연속인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주목할 점은, 이런 이야기를 왜 굳이 이 시점에서 꺼내 놓았냐는 것이다.

타란 백작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검왕이 노리는 것은 내 목이 아니라 내 혀였어!’

이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아무렴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소리를 떠벌릴 이유가 없다. 적을 상대로 수다를 떠는 정신 나간 버릇이 있는 게 아니라면!

동시에 타란 백작은 문득 떠오른 어떤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 검왕은 처음부터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나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타란 백작은 곧 그런 생각을 지웠다.

이런 의문은 서로를 위해 묻어 둬야 했다.

대신 조금은 마음 편히 검왕의 눈을 마주했다.

자신의 혀를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 있어야 했다.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미 간접적으로 본인의 뜻을 내비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살려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다. 타란 백작은 조금 더 힘을 내기로 마음먹고는 말을 가렸다.

“내가 오늘 밤 영혼의 관에서 검후를 보았다. 귀하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오?”

“음? 그것도 나쁘지 않군. 하지만 굳이 거짓을 강요해 백작의 명예를 깎고 싶지는 않소. 그건 예의가 아니지.” 

예의가 아니다?

그야말로 ‘이제 와서’다. 당장 검왕이 하는 행동 자체가 협박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럼 귀하가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타란 백작이 과감하게 질렀다.

이 이상 말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진실. 오로지 진실을 원하오. 오늘 백작이 본 대로, 또 들은 대로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오.”

“정말 그것뿐이오? 확실히 말해 주길 바라오.”

“음, 그렇게 말한다면 하나 있기는 하오.”

그럼 그렇지.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타란 백작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검왕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백작이 돌아가면 마스의 왕이 물을 것이오. 그때 백작은 본 대로만 전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의견을 살짝 더해 주길 바라오.”

“・・・・・・귀하의 의견을 내 것처럼 말하면 되겠소?”

“후후후.”

아무래도 원하던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말없이 웃음을 보이는 검왕의 모습에 타란 백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걱정과 달리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검왕이 거짓 보고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살짝, 정말이지 아주 살짝 진실을 왜곡하는 수준.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감의 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자신과 기사들의 목숨을 살리는 대가가 겨우 이런 것이라면 수십 번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싸움은 이것으로 끝이오?”

“나는 이미 한참 전에 검을 놓았소.”

말과 함께 바닥에 꽂아 두었던 검을 검집으로 되돌린 검왕이 전투의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런 말에도 그를 향한 기사들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검왕은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대신 오늘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밖으로 흘러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

“믿어도 좋소.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말과 함께 타란 백작의 수신호에 따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납검하는 기사들.

검왕은 그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들의 모습을 보니, 믿음이 가오.”

칭찬이지만 도저히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말이다.

도대체 그의 눈에 자신들은 어떻게 비치는 것일까.

“그럼 이만 서로 헤어지도록 합시다.”

“내가 배웅하겠소.”

“…..”

검왕의 배웅이라니. 등에 소름이 돋았지만 거부할 수도 없다.

타란 백작은 굳은 다리를 억지로 옮기다 문득 물었다.

“혹시 내가 오늘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시오?”

“나는 백작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소. 그렇지 않소?”

“・・・・・그렇소.”

발길을 옮기는 타란 백작의 어깨가 힘없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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