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5화


532화

호로록-

케마란은 네리베르가 시퍼렇게 노려보는 것을 무시하고 찻잔을 들었다.

네리베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모여들었던 시선들도 무심한 케마란의 모습에 제자리를 찾았다.

네리베르는 기분이 몹시 상한 듯 케마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 보았고, 케마란은 그런 그녀를 애써 무시했다.

이드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말을 꺼냈다.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네리베르 양.”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방법이 있어서 화원에 들여보내 줄 수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겪은 케마란의 성격으로 봐서 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결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네리베르의 기분을 괜히 더 긁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드는 중간의 과정을 치워 버리고 바로 네리베르의 양해를 구했다.

케마란을 노려보던 네리베르가 단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끙, 철벽을 둘렀구나.’

이드는 자신을 포함해서 일행 하나하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네리베르의 눈을 보고 작게 신음했다. 첫 만남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 날카로운 눈빛 뒤로 단단한 철벽이 서 있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불가합니다. 케마란 양이 했던 말은 듣지 못한 것으로 해 주세요.”

케마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네리베르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듯한 자세까지 취해 보였다.

이드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까 검궁에서 보답을 하고 싶다고 하셨죠? 화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으로 그 보답을 받을 수는 없을까요?”

“제 개인적인 보답과 화원의 출입에 대한 문제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화원에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정식으로 신청을 올리시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람만 아니라면요.”

네리베르는 당신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냐는 듯 이드와 에단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분명한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처음 인사를 하면서 보였던 에단에 대한 호감도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사라진 듯 보였다.

에단은 그 모습에 아쉬움을 느끼며 말했다.

“아쉽게도 쉽게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나 마스터께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야. 그건 록이 증명할 수 있는 일이고.”

“그렇다면 다시 신청하고 기다리시면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후배 말대로 기다리면 허락이 떨어지겠지. 하지만 이쪽도 그렇게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 결코 이상한 생각으로 화원에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야. 무엇보다 지금은 검후님께서도 화원에 없으시잖아. 검후님이 머물지 않는 화원은 그냥 옛 고성(古城)일 뿐이야.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면 클라인 백작님과 여러 기사단장님들께서 허락을 하셨겠지요.”

“…….”

어느새 처음으로 돌아와 버린 대답에 에단이 말을 잃었다.

에단의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하던 네리베르는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이 말씀하신 대로 검후님이 계시지 않은 화원은 그저 거대한 성이에요. 하지만 그곳엔 검후님께서 소중히 간직하고 계신 많은 추억이 잠들어 있죠. 그런 곳에 정체도 알 수 없는 분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답은 이후에 따로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네리베르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휑하니 자리를 떠나 버렸다.

“…….”

가게 안의 화사한 분위기와 다르게 이드들이 앉은 테이블에는 묵묵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만히 찻잔을 비운 케마란이 말했다.

“먼저 자리를 비운 네리베르 양을 대신해서 그녀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사이가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네리베르를 대신한 사과에 이드는 악우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니요.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내가 먼저 과한 부탁을 한 것 같으니까요. 오히려 이쪽이 무례했는지도 모르죠.”

“마스터, 무례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에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배님 말씀이 맞아요. 화원은 검후님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저희가 스스로 조심할 뿐, 출입 자체가 금지된 곳은 아니니까요. 가끔이지만 검후님께서 어린 검사들을 초대하셔서 이야기를 들어 준 적도 있으시거든요.”

“어, 후배는 화원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 보네.”

“네리베르 양 덕분에요.”

“무슨 일이 있었나?”

“음. 보셔서 아시겠지만, 검후님에 대한 네리베르 양의 존경과 사랑은 정말 대단해요. 그래서 오히려 실제로 검후님과 만나게 됐을 때 네리베르 양이 실수를 하고 말았죠. 그녀는 정말 크게 실망했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서 검후님을 만나기 위해 화원 주변을 맴돌았어요. 그러다 실제 검후님과 만날 수 있었나 봐요.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거든요. 어느 날은 그녀가 검후님의 초대를 받았다면서 동기들과 화원에 함께 가기도 했죠. 그 뒤로도 네리베르 양은 가끔 화원에 간다면서 몇 시간씩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어요.”

이야기를 듣던 이드가 재미있다는 듯 케마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그녀가 화원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안다는 건………….”

“네. 확실한 건 아니에요. 반응을 봐서는 확실히 화원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요.”

이드는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성격의 이 아가씨가 생각 외로 음흉한 구석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흠. 그 방법, 후배님은 어떻게 알 수 없나?”

“불가능해요.”

에단의 은근한 질문에 케마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지금 검후님이 자리를 비우시기는 했지만, 그분의 거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분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다는 네리베르 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아무리 선배님의 보증이 있는 분이라고 해도 말이죠.”

반듯한 얼굴로 조금 음흉하고, 뒤끝 있는 아가씨다.

이드가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에단이 자신과 록이 보증한다면서 단호하게 소리치고 있지만, 그 말은 케마란의 귓가만 맴도는 것 같았다.

이드는 케마란의 시선이 다시 자신을 향하자 천천히 물었다.

“그럼 혹시, 제 정확한 신분을 밝힌다면 케마란 양이 네리베르 양을 설득해 줄 수 있나요?”

“제가 판단했을 때 귀하의 신분이 네리베르 양을 설득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면요.”

이드는 케마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리를 옮길까요.”

이드는 검궁의 숙소로 자리를 옮겼다.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으면서 검궁의 방에 직접 들어오는 것은 처음인지, 케마란은 화려하고 기품 있는 방에 작게 감탄하고는 이드와 마주 앉았다.

라미아를 안은 일리나와 에단은 이번엔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이드는 ‘그래,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내가 들어 주겠다!’는 얼굴의 케마란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늦게나마 제 소개를 하죠. 제 이름은 이드. 수일 전 에단과 적색 기사단의 안내를 받아 소드 팰러스에 입성했습니다.”

덜컹!

“…….”

순간 조각처럼 굳었던 케마란의 턱이 여자로서 보기 흉할 정도로 떨어져 내렸다.

‘좋았어! 그래, 저거거든. 저런 반응을 원했다고!’

그 모습을 본 에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존경해 마지않고, 존경받아 마땅한 이드였다. 그런데 겨우겨우 그를 모시고 소드 팰러스에 도착했더니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이드를 무시하는 모습에 질려 있던 에단에게, 케마란의 반응은 실로 그가 기대하던 그대로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저히 닫힐 기미기 없는 케마란의 입에 에단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좀… 깬다.”


케마란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가 멍멍하고 눈앞이 깜깜했다.

‘적색 기사단? 적색 기사단이 누구와 함께 왔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데려왔지. 그런데 지금 이름도 이드라고 했잖아? 이드는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이잖아! 아니지, 뜻깊은 이름은 가족이 물려받아 사용하기도 하잖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그녀는 차츰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뜻하는 의미를 파악한 케마란의 입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이드를 가리키다 급히 손을 내리고, 다시 가리키려다 도저히 이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에단을 바라보았다.

“선배. 이………… 이분이, 여기 이분이………….”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에단은 그 모습에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다. 마스터가 바로 그분이시다.”

“하아아…….”

에단의 대답을 듣는 순간 케마란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는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홀린 듯 이드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에단에게 물었다.

이드는 눈앞에 자신을 두고서 계속 뒤에 서 있는 에단에게 질문을 던지는 케마란의 모습에 고소를 지었다.

“사실인가요? 그럼 어째서 아직 그에 대한 발표가 없는 건가요? 그리고, 그리고………….”

궁금한 것은 너무 많은데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듯 케마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에단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아직 물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까지 천천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만, 이드의 존재에 대한 검증이 발표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어른들 간의 사정이라는 것으로 묻어 두었다.

케마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얼굴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거칠게 제국을 떠돈 그녀는 세상이 기사도와 정의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경험은 어중간한 기사보다 넓고 깊었다. 무엇보다 잠시 마법을 풀어 증언에 나선 일리나의 모습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의심마저 지워 주었다.

다만 소드 팰러스에 대한 믿음의 일부가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 선배로서 에단의 마음을 허하게 만들었다. 

“……”

이드는 얼굴이 뜨뜻해지는 것 같았다.

일리나를 통해 마지막 확인을 마친 케마란이 어떤 감동을 가지고서 자신과 허리에 걸린 일라이져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십 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예술 작품도 아니고,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이드가 헛기침을 하며 감동에 빠진 케마란을 깨웠다. 

“크흠. 어떤가요. 제가 화원에 들어갈 만한 충분한 자격이 되는 것 같은가요?”

“……충분히 확인이 되셨습니다.”

“그럼 네리베르 양에 대한 일은 부탁해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케마란이 질끈 입술을 깨물고는 등에 비켜지고 있던 링스피어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제게 이 링스피어를 다룰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다면, 모든 수단을 다해서 네리베르 양이 이드 님을 화원에 안내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케마란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조금 음흉하고, 뒤끝도 있지만, 단호한 결단력에 계산도 빨라 자기 몫을 챙기는 것도 확실하다.

이드는 슬쩍 에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은 신붓감이다, 에단.”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