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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57화


1392화

대전에 햇살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포근함도 대전의 싸늘한 분위기를 녹이지는 못했다. 그 원인은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있었다. 크라이 반 마스.

가장 상석에 놓여 있는 보좌에 거만하게 앉은 마스의 왕. 그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마구마구 드러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의 주변으로 검은 오라가 눈에 보일 정도랄까.

와드득! 까드득!

얼음 한 덩이를 입으로 가져가 거칠게 씹어 대는 국왕, 조용한 대전에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

새벽부터 끌려 나온 대신들은 얼음이 부서질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국왕의 이빨 사이에서 부서지는 얼음이 꼭 자신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왕이 인육을 먹는 괴물도, 이유 없이 대신들을 죽이는 폭군도 아님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인물이냐면 그건 아니다. 바로 그 선을 지킬 줄 알기에 국왕이 더 두렵다. 해서 대신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기를 빌었다.

이게 도대체 몇 시간 째란 말인가. 이젠 슬슬 배도 고파졌다.

‘나이가 들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명령을 내린 것이 언제인데. 왜 아직 연락이 없냐!’

‘타란 백작. 이 빌어먹을 인간. 뭔가 일이 있으면 보고부터 했어야지. 연락이 끊겨서 고생할 사람은 생각도 안 하나?’

‘지는 이제 중앙에 들 일이 없다. 이거야? 그러다 변경까지 밀려나면 참 보기 좋겠다!’

‘딸기 잼에 빵! 버터에 빵! 연유에 빵! 아~ 당 떨어진다.’

대신들의 집중력은 서서히 고갈되고 있었다.

단순히 하나의 일에 집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국왕이 머리 위에서 저렇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어 정신력이 몇 배로 깎여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뭔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있다면 분위기라도 좀 바꿀 테지만.

없었다.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해가 뜨기 전에 모두 마쳐 두었다.

즉, 이제는 지시한 일에 대한 결과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보통 이럴 땐 각자의 집무실이나 집에서 차를 마시거나, 가볍게 수다를 떨며 편히 쉬었는데.

‘바늘방석이구나, 바늘방석이야. 차라리 내가 직접 다녀온다고 했어야 했나?’

그러면 최소한 마음은 편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시간을 얼마나 더 견뎠을까.

슬슬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며 당장이라도 사직서를 던지고 나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 때쯤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전의 문이 열렸다.

대단한 무례였지만,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국왕이 미리 명해 둔 것이기도 했지만, 드디어 뭔가 소식이 들어왔다는 반가움에서다. 아니나 다를까.

대전으로 달려들어 온 이는 통신을 담당하고 있는 마법사였다.

국왕이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누구냐.”

“타란 백작입니다.”

눈치가 빠른 것일까. 마법사는 숨도 제대로 돌리지 않은 상태로 다른 설명을 전부 건너뛰고 통신 상대의 이름을 댔다.

그야말로 기다리던 이름에 국왕은 이제 막 입에 넣은 얼음을 와드득 씹어 부숴서는 대전 바닥에 뱉어 버렸다.

그리고는 허연 입김이 나오는 입으로 명령했다.

“너는 당장 통신을 연결하라. 절대 중간에 끊겨서는 안 될 것이다.”

“추…… 추훙!”

통신이 끊어지면 네 목도 끊어진다.

착각이 아니었다. 마법사의 귀에는 분명 그렇게 들렸다.

마법사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통신구에 자신의 마나를 몽땅 밀어 넣는 사이, 국왕은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드디어 당사자가 나타난 것 같으니, 다 같이 들어 봅시다.”

“어떤 중대사가 언급될지 모르옵니다.”

“쯧, 어차피 조용히 넘어가긴 틀린 일이 아니오?”

“……”

짧게 혀를 차는 국왕의 말에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국왕의 말은 옳았다. 초록빛으로 물든 하늘을 본 것이 어디 한둘인가. 어떻게든 덮고, 은밀히 넘어가는 것도 아는 이가 적을 때 이야기. 이건 이미 기밀이 어쩌고 할 단계를 우습게 넘긴 상태다.

불안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던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그들도 궁금했다.

도대체 새벽에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정말 그것이 영혼의 관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타란 백작은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 것인가.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결국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자신들.

어차피 일을 해야 한다면 자세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자세히 알아야 적절한 방법을 찾아 사태를 수습하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확인된 것도 없이 사고를 기정사실 중인 대신들이었지만,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타란 백작의 얼굴이 나타나길 기다리던 대신들은.

잠시 후 대전에 남은 자신들의 행동을 맹렬하게 후회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바로 그들의 머리 위에서 터진 국왕의 벼락같은 고함 소리 때문이었다. 그중 일부는 고개를 들어 국왕의 얼굴을 살폈다가 기겁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들이었다.

‘붙잡아도 나갔어야 했는데.’

‘어차피 좋은 소리 나오지 않을 걸 알면서 왜!’

‘빌어먹을. 차라리 국경이 편했다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제는 먼저 움직이는 놈이 국왕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

대신들은 굳은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언제 어느 때 국왕의 질문이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왕의 분노를 견디며 위태롭게 이어지는 타란 백작의 보고가 계속될수록 대신들의 마음에는 돌덩이 같은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제2 수도 기사단이 검왕에 쓸려 나갔다고?’

‘바벨이 습격한 것 같다고? 증거는? 뭐야, 없어?’

‘영혼의 관이 흔적도 없이 무너졌다고?’

‘생존자가 하나도 없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고위 마법사들이 건물에 깔려 죽었다는 말을 믿으라고?’

‘뭐야, 그럼 탑주도 죽었다는 소리야?’

하나같이 충격적이지 않은 내용이 없었다. 이런 일이 전부 하룻밤 사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영혼의 관을 보호하기 위해 타란 백작과 제2 수도 기사단을 파견했고, 그에 딸려 보낸 병력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모두 쓸려 나갔다고?

전쟁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무리 바벨이 나섰다고 해도, 그만한 전력이 움직이는 것을 자신들이 알지 못했다고? 그게 가능한가?

‘아니지. 절대 가능해선 안 돼. 이건 반드시 사실이 아니어야 한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만한 전력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몇몇 대신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어쩌면 국왕의 분노에 쓸려 나가는 것은 타란 백작만이 아니게 될지 모른다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개인의 책임에서 끝나는 일.

대부분은 영혼의 관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마스가 그 하나를 얻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중이었던가.

영혼의 관을 위해 전쟁까지 준비해 왔다.

그런데 그런 영혼의 관이 터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고, 탑주를 비롯해서 남아 있는 마법사들이 하나도 없다고?

차라리 영혼의 관이 무너진 것은 큰 문제도 아니다.

이름이야 대단하지만, 그래 봤자 건물이다. 왕궁처럼 역사가 깊은 것도 아니고, 탑주와 마법사들만 있으면 수십 개라도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탑주와 마법사들이 사라졌다면, 그것도 죽음이 거의 확실하다면!

이건 앞으로 계획된 마스의 행보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확실히 느끼고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국왕이었다. 그가 바로 영혼의 관을 거두어 초인 마법을 독점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장본인이 아니던가.

“이, 이, 이 무능한 인간! 그걸 보고라고 하는 것이냐! 사태를 그 지경으로 만들고 뻔뻔하게 보고를 하고 있어! 그딴 보고를 하고 싶었으면 죽었어야지. 차라리 죽고 나서 그런 소리를 했어야지! 왜 살아 있는 것이냐!”

국왕의 입에서 폭언이 비처럼 쏟아졌다.

군신 간의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흔적도 없다. 백작 정도가 되면 절대 이런 취급을 당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지적하는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감히 분노한 국왕을 말릴 담력도, 분노를 대신 감당할 생각도 없는 것도 이유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마음 역시 국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컸다.

다만, 그런 가운데 일부 대신들은 타란 백작을 동정했다.

‘국왕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는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

‘틀림없다. 국왕의 저 발언은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다.’

‘국왕의 성품을 모르지도 않으시는 분이 어쩌자고. 가문을 위해서라도 자결을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 텐데.’

‘그놈의 기사의 자존심 때문인가? 어리석다. 어리석어.’

‘하지만…… 이대로 화풀이로 죽이기엔 아까운 인물이다.’

타란 백작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 밤 일어난 사건의 범인은 바벨과 검왕이었다. 둘이 연합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합리적으로 의심이 가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그럼 생각해 보자.

과연 자신이라면 바벨과 검왕의 합공을 막아 낼 수 있었을까? 타란 백작에게 주어진 전력이 그 둘을 막아 낼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던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타란 백작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있었다. 물론 그의 선택이나 행동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당장 그가 검왕을 쫓지 않고 위치를 고수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결과가 그러할 뿐, 검왕에 대한 추적이 꼭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타란 백작의 처벌은 피할 수가 없다.’

대전에 가득한 대신들의 얼굴에 가득한 먹구름이 그 증거다.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다면 잘못이 없더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지금도 대신들의 머리는 복잡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마스는 현재 제국과의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

가벼운 국지전도 아니고, 예민한 신경전도 아니다. 이미 서로를 향해 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그야말로 선전 포고만 남은 상태.

물리고 싶어도 물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전쟁을 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영혼의 관이 사라진 이상 마스는 제국과 싸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니, 전쟁을 하기 전에 이미 많은 것을 잃은 상태였다. 영혼의 관을 잃었고, 전쟁 준비에 많은 돈이 소모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 악명이 쌓였다. 누가 뭐래도 영혼의 관이라는 비인도적인 악행을 저지른 마법사들을 품으려 했으니까.

물론 그럼에도 본격적인 전쟁보다는 낫다.

전쟁에 투입되는 돈과 자원은 악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하니까. 특히 전쟁의 승패가 갈렸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까지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제국에 사과하고 전쟁은 피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 그럼 댁이 나서서 말해 보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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