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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59화


1394화

대신들에게 던지는 국왕의 질문.

그 속에는 국왕의 속내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꼭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겠냐는 마음.

안데르 재상은 그런 자신의 왕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전하의 나쁜 버릇이 또 도지셨구나.’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잘라 보내라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국왕이 저렇게 나올 때면 그의 의지를 막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는 마스 국왕의 나쁜 버릇이었다.

일견 대범하고 거칠어 보이는 그는 의외로 작은 가능성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었다.

솔직히 이 자체만 보자면 그리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다. 작은 가능성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도전 정신과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문제는 정도가 과하다는 점이다. 나쁜 말로는 집착.

그런데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국왕의 이런 집착이 발동하는 조건이었다.

국왕은 그냥 그런 일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벼랑 끝에 몰린 승부의 순간에만 오면 이러한 경향을 보였다.

바로 이번과 같은 경우다.

사실 말이 좋아 승부의 순간이고 승부사 기질이지, 일반 평민의 가정을 가져다 대면 가장이 도박에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비장의 수가 될 영혼의 관과 초인 마법도 없이 제국과 전쟁이라니. 이게 도박과 무엇이 다를까.

그런 중 다행이라면, 평소엔 대체로 재상과 대신들이 적당히 제동을 걸어 국왕을 멈췄다는 점이다. 국왕 역시 이성을 잃은 건 아니기에 재상과 대신들의 간청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고,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국왕을 막지 못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크게 손해를 보기도 했고, 예상과 다른 이득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발동한 국왕의 버릇 때문에 또 기로에 서게 되었으니, 어떻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이번에는 도전에 실패할 경우 발생할 손해의 규모가 막심하다. 단순히 크다는 범위를 넘어, 마스의 전 국토가 병에 걸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렴 제국과의 전쟁이라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 한다.

그런 중에 허리를 졸라매는 것은 기본이었다.

물론 이런 위험 부담을 지고서라도 도박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한번 해볼 만하기는 하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위험성이 큰 만큼 예상치 못한 이득을 얻을 가능성도 컸다. 아무렴 제국이 아닌가.

다른 거 다 떠나서, 전쟁 배상금만 제대로 뜯어내도 마스 전체가 한동안 풍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행복한 결말은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겨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재상이 보기에 이 전쟁에서 마스가 승리를 얻어 낼 가능성은 희박해도 너무 희박했다. 전쟁의 신이라도 내려와 마스를 위해 싸워 주시지 않는 다음에야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국왕이 고집을 부릴 것 같으니.

‘허허. 아니로구나. 애초에 이런 위태로운 상황이니 저 못된 버릇이 나온 것이겠지.’

내심 한숨을 쉰 안데르 재상이 대신들에게 눈짓을 했다.

‘무엇을 하는가. 전하를 말리지 않고.’

그의 신호에 대신들이 앞다퉈 전쟁을 멈춰야 하는 이유를 들고 나섰다. 그러나 국왕은 쉽게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에 앞머리가 지끈거렸다.

안데르 재상은 밀려오는 두통에 포션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재상직을 수행하며 얻은 직업병과 같은 두통에 국왕이 내린 포션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두통에만 쓰기에는 효과가 좋다 못해 과한 포션인데도 두통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다.

“・・・・・・・ 그러하므로 이번 전쟁은……!”

“그만!”

그런 가운데, 국왕이 손을 들어 줄기차게 이어지는 대신들의 반대 이유를 막았다. 단호한 그 눈빛에 대신들은 단숨에 입을 닫았다.

“반대 이유는 잘 들었다. 그럼 이제 전쟁을 해야 할 이유를 들어 보지. 아니, 전쟁에 이겼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국왕의 말에 대신들이 입을 뻥긋거렸다.

전쟁을 하고 말고가 아니라, 전쟁 이후의 결과를 벌써 논하시다니. 이건 전쟁을 꼭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재, 재상 각하.’

아버지로부터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은 아이가 어머니를 찾듯, 대신들의 눈길이 안데르 재상을 향했다.

‘끙, 저런 모자란 것들이 있으니 내가 맘 편히 은퇴를 할 수 있겠는가.’

내심 혀를 찬 안데르 재상이 국왕을 향하자, 국왕의 시선도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했다.

“전하, 황공하오나, 그 문제는 전쟁에서 이긴 후에 논해야 할 문제입니다. 전쟁의 규모와 기간이 얼마나 크고 질어질지는 아직 정확한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도 알지. 하지만 대략적으로 예상은 해 볼 수 있는 일 아닌가?”

“싸움에 있어 결과를 예단하는 것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국왕의 말대로 대충 예상을 잡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안데르 재상은 그 말에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국왕이 승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대신들을 혹하게 만들려는 속셈임을 빤히 꿰뚫어 본 탓이다.

이런 안데르 재상의 반응에 국왕이 불평을 쏟아 냈다.

“노인네, 고약하기도 하지. 그런 고사로 내 입을 틀어막다니.”

사실 고집을 부리자면 부릴 수 있는 일이었다. 당장 나가서 싸우라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안데르 재상의 저 한마디로 국왕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꺼낸 말은 그만큼 유명한 고사였다.

전장에선 미신의 수준으로 취급될 정도였다.

사실 미신이라고 하면 그 경중이 애매하다. 허튼소리 같기도 하고, 중요한 격언 같기도 하니까.

그러나 경중의 문제는 어떻든,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마법과 검기도 겁내지 않는 용사와 백전노장의 병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미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제가 전쟁의 금언을 어겼다는 말이 돌아 봐라. 그렇지 않아도 암담한 상황이 더욱 암담해질 것이다.

전쟁을 생각하는 국왕에게 있어 그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니 고약한 노인의 목을 자르시지요?”

“미친 노인네. 그렇게도 목이 잘리고 싶은가?”

“전하께선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십니까?”

“하아…… 그렇게까지 해서 반대할 일인가? 내 기사와 병사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국왕이 보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팔을 올려 턱을 괬다.

“압니다. 그들의 사나움은 천하제일이지요. 전하만큼이나 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국 기사들의 날카로움도 천하제일입니다.”

“검은 뽑아서 찔러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야.”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전쟁은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재상의 말은 틀렸다. 전쟁은 이미 결정된 일이 아니었던가?”

“전쟁을 결정한 명분도 이유도 사라졌지 않습니까. 그러니 결정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는 설사 전쟁에서 이겨도 마스가 얻을 것이 없습니다. 영혼의 관은 무너졌습니다.”

“으음.”

바로바로 반론을 내놓던 국왕의 주장이 멈췄다.

그에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대신들도 서로 나서 갖가지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안데르 재상의 손을 들고 나섰다.

“재상의 말이 옳습니다. 마스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너무 적습니다.”

“전쟁 배상금 하나를 보고 싸우기에는 피해가 막대할 것입니다. 오히려 피해 복구에 전쟁 배상금 이상의 자금이 쓰이리라고 추정됩니다.”

“이 전쟁은 해로운 전쟁이옵니다, 전하.”

“그만! 대신들의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하지만 때론 피할 수 없는 전쟁도 있는 법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쉽게 고집을 꺾지 않는 국왕에 안데르 재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앞서 말했듯, 오늘 새벽에 이번 전쟁의 명분과 이유가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전하.”

“나도 안다. 하지만 재상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전쟁을 해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 그러나 과연 명분도 사라졌는가?” 

“…….”

안데르 재상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이번 전쟁의 명분도 이유도 영혼의 관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미완의 마탑.

제국의 명분은 금기를 범한 마법사들을 토벌하여 희생자를 위로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는 대륙인이라면 모두 손뼉을 칠 옳은 일이었다.

반대로 마스의 명분은 일부에서는 욕을 먹을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말이야 복잡했지만, 실상은 간단했다.

이 호박이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는 관심 없다. 대신 내 땅으로 굴러 들어온 이상, 이 호박은 내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밤, 누가 몰래 나타나 호박을 못 먹게 만들어 버렸다. 명분의 소멸이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호박이 남았다고?’

안데르 재상은 국왕이 허튼소리를 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국왕은 현명한 편에 속했다. 특히 전쟁을 계획할 때는 천재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왔다는 말은 결코 흘려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던 안데르 재상은 번뜩하고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에 타란 백작 쪽을 돌아봤다. 국왕의 명이 없었기에 머리를 숙인 타란 백작의 모습은 아직도 그대로다.

통신 마법을 유지 중인 마법사는 죽어 나가는 중이었지만, 이 판국에 그런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타란 백작을 돌아본 안데르 재상이 국왕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명분이・・・・・・ 검왕인 것입니까?”

“재상이 볼 때, 오늘 내 땅에 허락 없이 들어와 나의 것을 박살 낸 범인이 누구인 것 같은가?”

“바벨의 짓이라는 타란 백작의 말은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 확인된 상대는 검왕뿐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이런 사실은 우리만 알고 있는 게 아닐 것이야.”

“……”

그건 반반이다.

마스는 영혼의 관을 위해 타란 백작을 파견하고 주변의 경계를 철저히 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허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영혼의 관 가까이 다가온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이번 일과 검왕의 존재를 연결할 수 있을까?

‘정보를 흘리시려는 것이다.’

모르면 가르치면 된다.

검왕의 존재만 확인된다면 명분 하나는 확실해진다. 오히려 욕을 먹던 상황이 반전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명분이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순간 흔들렸던 안데르 재상이 고개를 저었다.

명분은 명분일 뿐.

아무리 좋은 명분도 전력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국왕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보통은 그러하지. 그러나 재상, 잘 생각해 보라. 검왕이 과연 언제까지 제국을 위해 검을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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