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6화


533화

“너, 나 믿을 수 있지!”

조용한 저녁 느닷없이 불쑥 네리베르를 찾아온 케마란이 밑도 끝도 없이 꺼내 놓은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낮의 일로 머리가 복잡했던 네리베르는 그녀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다 서늘하게 대답했다.

“믿을 수 없어요!”

“……박정한 년.”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케마란이 상처받았다는 듯 처연히 말했다.

네리베르는 그런 케마란의 대거리를 받아 줄 생각이 없는지 거기에는 답하지 않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반말인가요, 케마란 양?”

“뭐 어때서? 너도 가게에서 반말 썼잖아.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고, 동기끼린데 반말 좀 쓰면 어때. 그러지 말고 우리 편하게 말 트자.”

케마란은 그동안 입에 붙지 않는 말투를 사용하느라 힘들었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는 케마란과 달리 네리베르는 표정 변화도 없이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사양하겠어요. 그런 무례하고 천박한 행동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 그래. 그럼 넌 계속 고고하게 존댓말 써. 난 나 편하게 반말 쓸 테니까.”

팩!

‘저도 급하면 반말이 튀어나오는 수다쟁이인 주제에.’

이제부터 좀 더 친하게 지내 보자는 제스처가 네리베르의 즉답에 무산되자 케마란도 기분 나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네리베르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제 취향이니까 케마란 양이 반말을 사용해도 따로 탓하지는 않겠어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아.”

케마란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마주 앉았다. 과연 네리베르와 자신 사이에 쌓인 미운 정과 고운 정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케마란의 표정과 다르게 네리베르는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알 수 없는 마스터라는 분의 정체는 어떻게 된다고 하던가요?”

“헤에~ 무슨 얘길 하려는지 알았어?”

“물론이에요. 그 일이 아니라면 케마란 양이 절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오늘 이 시간에 찾아 왔다는 건 상대가 당신으로 하여금 절 찾아오도록 설득했다고 생각해야 할 테니까요.”

케마란은 머리끝을 살짝 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어둡게 변한 창밖이 보였다.

“확실히 밤에 찾아올 정도로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그래도 대단한걸? 마치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것 같잖아.”

“이 정도는 앞뒤 구분만 할 수 있으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에요. 대단한 일이 아니죠. 더구나 전 당신과 다르게 이론 수업도 우수하거든요.”

“흥, 잘나서 좋겠어!”

“나쁠 건 없지요.”

서로를 향해 가볍게 톡 쏘아 준 두 아가씨는 가볍게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던가요?”

네리베르의 질문에 케마란이 눈을 한 번 끔뻑이고는 악동 같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어. 한번 맞춰 보겠어?”

네리베르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케마란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바로 하는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 방에 들어온 후에도 평소와 조금 달랐네요.’

기분 좋게 술기운이 오른 것처럼 흥분에 취했다고 할까?

“거절하겠어요. 전 무의미한 두뇌 노동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반사적으로 누구일지 머릿속으로 추려 내고 있지만, 입 밖으로는 그 사실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 속을 모르는 케마란은 네리베르의 칼 같은 거절에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서 좀 더 놀래 주고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케마란은 네리베르도 자신처럼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이드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설득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화살처럼 날아온 믿지 못한다는 말에 깨끗이 포기했다.

“어차피 당신이 그 사람의 정체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절 설득시키기 위해서였잖아요. 그러니 빨리 말하세요.”

틀린 말이 아니다. 그 기회를 틈타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는 했지만 그녀의 임무는 여기 앉아서 시시덕거리는 것이 아니라 네리베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코홈! 듣고 놀라지 말아. 그 선배의 마스터라는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 이드라는 이름, 알아?”

너도 당해 보라는 듯 능글거리며 케마란이 이드의 이름을 꺼냈다.

그러나 네리베르의 반응은 그녀의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전혀 놀라는 표정 없이 그저 눈만 꼬옥 감았다 떴다.

“마인드 마스터. 역시 그분의 후예인가요.”

“어, 바로 알아듣네. 그런데 너무 덤덤한 거 아냐? 난 이름을 듣고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잠깐 이해를 못 했는데. 거기다 역시는 뭐야? 설마,

짐작했던 거야?”

“아니요. 저도 짧게 한 번 떠올리고 지웠던 이름일 뿐이에요. 그리고 저도 충분히 놀라고 있어요. 그저 다른 생각도 많아서 어떻게 놀라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을 뿐이죠.”

네리베르는 말을 마치고 잠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무언가 생각에 빠진 그녀의 모습에 케마란은 네리베르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다 찻잔을 비웠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드의 정체에 대해서 더 생각할 게 있나?’

케마란 자신은 이드의 이름을 듣고 놀라기 바빴다. 물론 그녀도 그의 존재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네리베르는 분위기라든가 표정이 자신과는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케마란과 다시 얼굴을 마주한 네리베르가 케마란이 이드와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물었다.

케마란은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도 빼지도, 더하지도 않고 그녀에게 전했다. 네리베르를 설득하는 대가로 링스피어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다는 사실도 말했다. 비록 그녀가 이 방을 찾은 이유가 네리베르를 설득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없는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네리베르는 영리한 선택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조용히 듣고만 있는 그녀의 모습에 어쩌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면 그걸로 됐다는 것이 케마란의 생각이었다. 그저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된다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네리베르의 행동은 그녀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다.

“잘 들었어요. 그럼 바로 록 선배를 보러 가죠.”

케마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네리베르를 내려 앉히며 말했다.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당연한 일이에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당신도 충분히 알잖아요. 이건 지금 분명히 확인을 해야 한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왜 이야기가 갑자기 그렇게 급해지냐고!”

케마란은 다시 네리베르를 잡아끌며 속으로 진땀을 뺐다. 이드의 이름에도 덤덤한 듯 보였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네리베르의 이런 모습은 검후 앞에서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거기다 시간을 생각해. 지금 록 선배의 숙소를 찾아갔다가는 이상한 소문이 날 거란 말이야.”

그렇다. 아무리 발이 넓고, 선후배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록 선배라도 지금 시간에 그를 찾아가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론, 케마란 그녀도 함께한다면 그런 소문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누구도 록이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한 번에 반하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사소한 소문의 깃털이라도 쓸데없이 날릴 필요는 없는 일.

그러나 평소라면 케마란보다 더욱 질색을 했을 네리베르가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사소한 일은 됐어요.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록 선배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뭐 급한 일이냔 말이야! 내일 확인해 보면 될 일이잖아. 방금 전까지 얌전하더니 갑자기 왜 난리야.”

네리베르는 다시 자신을 내리누르는 케마란을 노려보더니 그녀의 손을 찰싹 때려서 치워 내고는 조금 김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날카롭지만 한편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한 네리베르의 질문에 케마란은 뭔가 놓친 부분이 있는지 생각하며 대답했다.

“뭘?”

“기가 막히네요. 당신은 정말 공부가 더 필요해요. 그분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면 화원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냔 말이에요.”

케마란은 네리베르의 말에 겨우 그거냐는 듯 눈썹을 곱게 찌푸렸다.

“그게 뭐? 아까 말했잖아. 윗대가리들의 시커먼 속셈이 끼었다고!”

“그래서 이상한 거예요. 화원에 들어가는 데 어째서 속셈이 필요하죠? 가끔 이름 높은 기사분들과 황궁에서 찾아오신 손님들도 들르는 곳이에요. 저희들도 검후님의 초대를 받아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에요. 그분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면 검후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화원에 편히 머무르실 수 있도록 대접해야 하잖아요. 그분은 검후님께 중요한 손님이라구요. 절대 소드 팰러스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부딪칠 수 없는 분인 거예요.”

네르베르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케마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저는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화원에 들어가는 일에 그렇게 금방 들통 날 거창한 거짓말이 필요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해요. 검후님을 생각하면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분께 그런 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는 건………….”

네리베르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자신의 입으로는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아!”

케마란도 그제야 그녀가 하지 못한 말이 짐작이 갔다. 검후가 있다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면, 그녀가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검후가 단순히 수행을 위해 잠시 소드 팰러스에서 자리를 비운 것은 아니라는 말과 같았다.

“록 선배라면 아직 자고 있지는 않을 거야. 가자!”

벌떡 일어난 케마란이 방문을 열며 말했다.


그 밤.

두 아가씨는 록의 방에 쳐들어가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케마란이 걱정하던 소문은 전혀 돌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대로 ‘록 주제에 어떻게 두

아가씨를……………이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네리베르와 케마란의 안목을 믿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다음 날 출근 후에 접한 록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아 오후의 일은 쉬었다고 한다.


록에게 확인을 마친 네리베르가 곧바로 이드에게 직행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번만은 케마란이 적절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록에게 확인도 마친 이상 이드를 상대로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소드 팰러스의 이름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두 선배의 확신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리베르도 그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이튿날 상대가 아침 식사를 마쳤다고 생각되는 시간을 기다려 부리나케 달려갔다.

전날 있었던 자신의 무례에 대해서 사과한 네리베르는 밤새 자지 못해 붉어진 눈으로 이드와 마주 앉자마자 다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검후님은 무사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