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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61화


1396화

“암! 무엄하지. 무엄하고말고. 하지만 말이야.”

우드득!

얼음을 또 하나 입에 던져 넣은 국왕이 선명한 웃음기를 담아 말을 이었다.

“본국에 확실한 이득만 된다면 무엄하다 못해 건방을 떨어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물론 평소 국왕의 성품을 생각해 볼 때 진짜 그랬다가는 용서 따위는 없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재상과 대신들은 입을 모아 외쳐야 했다.

“마스를 아끼시는 전하의 마음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옵니다.”

“뭐, 고개는 숙이든 말든 알아서들 하고, 타란 백작.”

코웃음을 날린 국왕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영상 속 타란 백작을 노려보았다.

“전하의 명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대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

“아까 언급한 그대에 대한 처벌은 무기한 보류다. 전령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몰라줄까.”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아량에……………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국왕의 말에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린 타란 백작.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밀어낸 덕분에 그의 목소리가 갈대처럼 떨렸다.

대신들은 그런 타란 백작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엉망일 그의 속내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국왕은 소금까지 뿌려 댔으니.

사실 타란 백작은 그들의 짐작처럼 속이 말이 아니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당한 수치에 당장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령으로서 훌륭했기에 처벌을 보류한다니. 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대놓고 욕하고 조롱을 했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았다.

실제 보고를 듣고 쏟아 낸 국왕의 분노는 차라리 마음이나마 편했다. 하지만 지금 저 말은 뭐란 말인가.

더욱이 낙인을 찍는 것처럼 처벌이 무기한 보류되었다.

상쇄도 아닌 보류다. 언제든 다시 내려질 수 있는 처벌. 그것도 작은 죄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건 실패자라는 낙인을 영원히 걸어 두겠다는 뜻이 아닐까?

물론 이건 어쩌면 타란 백작의 패배감이 만들어 낸 착각일 수도 있었다. 검왕의 검을 마주하고도 살아 돌아온 뒤 그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으니까. 자신은 실패자이며, 겁쟁이라는 자괴감 말이다.

이런 중에 영상구를 통해 대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마치 그를 향해 무능하다고 욕하는 것처럼 들렸다.

스스로는 검왕과 거래를 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스를 향한 충성심에 크게 꺼릴 것 없었기에 가능한 거래였다. 자신의 말에는 결코 거짓이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국왕과 재상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보면 마치 거래가 아니라 이용을 당한 것 같지 않은가.

오가는 대화에 따르면 자신은 그저 검왕이 국왕에 전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에 불과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자신은 검왕의 말을 전한 적도 없다. 그냥 있었던 사실에 검왕의 의견을 살짝 더해서 건조하게 전달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국왕와 재상은 그 속에서 검왕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그들은 알아들은 것이다.

타란 백작은 무엇보다 그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또한 자신만 몰랐다는 사실에 또다시 깊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영상을 보면 그처럼 알아차리지 못한 대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신들과 자신은 입장이 달랐다. 대신들은 그저 전해 듣는 이야기였다면, 자신은 검왕의 뜻을 전한 당사자였다.

이건 마치 보물 상자에 독약을 넣어 국왕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차라리 실력이 달려 검으로 농락당하는 쪽이 나을 듯했다.

‘나라는 인간은 이리도 모자란 존재였다는 말인가.’

나름 중앙 정치를 안다고 여겼는데, 이런 꼴이라니.

거대한 탈력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만 싶었다. 당사자도 모르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검왕이나, 그것을 정확히 찾아내는 국왕의 심계가 너무 두렵게 느껴졌다.

‘이대로 영지로 돌아가 평생 나오고 싶지 않다.’

어제까지는 자신도 야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난 지금,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닿지 못할 것들이 있었다.

검으로는 검왕에 닿을 수 없고, 지혜도 재상을 따를 수 없으며, 국왕의 독심도 예측할 길이 없다.

이런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있는 힘을 다해 이루어 낸들 의미가 있을까. 오늘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에게 이용당하는 순간, 그 이뤄 낸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텐데. ‘영지로 돌아가자.’

타란 백작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와 함께 타란 백작의 눈빛이 칙칙하게 죽어 버렸다. 쉐어 가든에서 시작해서 오늘까지 연이은 실패에 더해 메신저로 이용당한 사실까지 더해지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무너져 내린 결과였다.

그렇게 멘탈이 흔들린 덕분에 타란 백작은 깨닫지 못했다. 이와 같은 자신의 결심과 행동 원리가 패배자들이 가지는 전형적인 패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이대로 영지로 돌아가는 순간, 타란 백작이 정계에 나타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타란 백작은 솔직히 돌아올 마음이 없는 것도 사실.

하지만 타란 백작의 이런 결심이 이뤄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왕이 깊이 가라앉는 그의 정신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그 충성은 그대가 전장에서 얼마나 활약할지를 두고 판단하겠다. 그 결과에 따라 처벌이 아니라 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타란 백작. 그대가 이번 전쟁의 선봉에 서라.”

“예. 예?”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던 타란 백작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싫은가? 공을 세울 기회를 원하지 않나? 그대가 범한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원하지 않아?”

그런 향상심도 없는 놈이라면 당장 목을 쳐 주마. 같은 말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생존 본능을 자극받은 타란 백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죄인에게 선봉에 설 영광을 내려 주신 전하의 은혜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전하께서 내려 주신 기회. 목숨을 다해 보답하겠나이다!”

처벌이 보류되어 건진 목숨이 이렇게 쓰인다.

참으로 짠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보고 있던 대신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당장 죽을 수는 없는 일.

무엇보다 백작가의 가주로서 자식과 가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좋다. 내가 바라던 대답이다. 그럼 ・・・・・・”

“전하. 아직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결정을 신중히 해 주십시오.”

그리고 국왕이 어떤 명령을 내리려던 차에, 재상이 또다시 국왕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과연 이번엔 국왕도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한층 사나워진 눈길이 안데르 재상을 향해 쏘아졌다.

“그대는 아직도 반대인가?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나눈 것 같은데?”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검왕의 속내를 짚어 내신 전하의 혜안은 실로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검왕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지, 과연 그것을 믿을 수 있을지가 확인되지 않은 이상. 여전히 마스에게 극도로 불리한 전쟁입니다.”

“그럼 재상은 어떻게 해야 전쟁에 동의할 텐가.”

어떤 조건이라도 성사시키고 말겠다. 그런 태도를 비치는 국왕에 안데르 재상은 마른침을 삼켰다.

국왕은 이미 전쟁을 결심한 상태. 그간의 경험으로 미뤄 국왕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조건을 대라고 하지만 아마도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전쟁을 포기하진 않으리라.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승리에 필요한 최소 조건을 준비시키는 것.’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안데르 재상은 곧 국왕이 말한 조건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첫째. 검왕의 확답이 필요합니다. 이는 문서로 작성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때였다면 몰라도, 지금의 검왕은 이 그레센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작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

국왕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바벨의 개입을 확인해야 합니다. 검왕이 전달한 의심은 합당하나, 확인된 문제는 아닙니다.”

“흥, 설령 확인을 한다고 해도 그놈들이 자신들이 했다고 솔직히 고백할 것 같나?”

“진위 여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스가 받아 내야 할 것은, 이번 전쟁에 바벨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확답 문서입니다. 미완의 마탑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바벨이 정신의 관 토벌에 개입한 전적이 있음을 살펴 주십시오.”

마스가 영혼의 관을 품에 안아 싸고돌 때,

그에 가장 반발한 것은 물론 제국이었지만, 그 못지 않게 크게 반응한 곳이 바로 바벨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전쟁도 영혼의 관 때문에 일어나는 것. 그 때문에 바벨이 이번 전쟁에 제국 측을 거들고 나설 가능성도 있었다. 제국만 해도 버겁다 못해 숨통이 조이는 마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피해야 할 일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국왕도 고집을 부릴 수는 없는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게도 그래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바벨을 상대하는 일은 재상이 나서도록 하시오. 그대라면 일어선 바벨도 다시 주저앉힐 수 있겠지.”

“휴우~ 최선을 다해 보겠사옵니다. 하옵고 세 번째로.”

“아직도 남았소?”

“마지막입니다. 전하께옵서는 검왕을 용납하실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의뭉스럽게 되묻는 국왕.

안데르 재상은 그런 국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안데르 재상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검왕의 확답을 얻고자 한다면 그가 바라는 바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검왕이 바라는 것은 그저 이름뿐이 아닌, 진짜 보좌일 것입니다.” 

“…….”

국왕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조용히 안데르 재상의 말을 듣고만 있다.

반대로, 단 아래서 안데르 재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대신들은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안데르 재상이 거론하고 있는 문제가 매우 민감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전하께옵서는 그에게 왕의 자리를 약속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검왕이 마스를 돕는 대신에 내놓을 조건은 분명 독립에 대한 지원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 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지금과 같은 입장에서도 대담하게 거래를 청해 온 인간이 노린다면 그 말고는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왕이다.

그레센에서 왕족이 아닌 자가 왕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전설을 써 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

무엇보다 현재의 왕들은 새로운 왕을 원하지 않는다.

새로운 경쟁자를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마스의 국왕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사태를 가장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의 침묵 후 국왕의 입이 열렸다.

“약속을 바란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내가 그를 왕으로 인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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